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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3호] 러셀 교수님,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뭔가요?
나는 《러셀 교수님,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뭔가요?》(줄리언 바지니 지음, 필로소픽, 2017)를 읽고 솔직히 시샘을 느꼈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관해 군살을 뺀,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도 철학적으로 명쾌하고 재미있는 책을 쓴다면 이보다 더 잘 쓰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능청스런 유머감각까지 갖추고 있다면, 더 이상 뭘 바랄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나는 삶을 철학적으로 성찰해야만 삶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류의 철학적 주장들에 대해 지식인의 오만일 뿐이라며 신랄하게 일갈하는 저자의 겸손한 태도가 맘에 들었다
“아니, 철학자가 이런 말을?”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줄리언 바지니는 솔직하다! 물론 인생의 의미나 가치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성찰하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삶이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 버리는 것보단 더 인간적이고 그 자체로 가치 있는 행위이긴 하지만, 철학적 성찰이 없는 삶은 동물적인 삶이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것 또한 동시에 얼마나 오만방자한 일인가?
예를 들어 저자는 만화 스누피를 만든 작가 찰스 슐츠와 알베르 카뮈를 비교한다. 찰스 슐츠는 스스로의 삶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찰스 슐츠는 이 인용문에 나와 있듯, 인생의 의미나 가치 같은 무거운 질문들에 관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또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내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심한 것 같다. “그게 뭐 어때서? 그래도 내가 살아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어.” 이렇게 말해 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히 쿨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알베르 카뮈 같은 작가에겐 인생의 의미와 무의미는 너무나 심각하고 절박한 문제다. 그에겐 가장 최우선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가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카뮈에게 인생의 의미 문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진지하고 무겁게 받아들이고 철학적으로 숙고해야 하는 무엇이다. 인생의 문제로 고뇌하는 자, 카뮈에겐 그게 바로 인간다운 인간이다. 그러나 과연 진짜 그런가? 줄리언 바지니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실 우리는 낭만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작가나 철학자들에게서 ‘고통’이 갖는 의미에 대한 과장된 의미부여를 자주 발견하곤 한다. 마치 고통 없는 삶은 삶이 아니며, 고통을 겪어야만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마치 전쟁의 참혹함을 진정으로 깨닫기 위해선 실제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젊은 시절 한때 카뮈에게 깊이 경도되어 있는 나 자신도, 어느 날 위의 인용문과 같은 진실을 깨달았다. 한때 나도 이런저런 고통을 많이 겪었기에 내가 겪은 그 고통이 무의미하지 않았고, 그 고통 자체가 큰 가치가 있다고 믿은 적이 있다. 그러나 뒤늦게 깨달았다. 인생은, 결국 운과 우연에 달린 것이고, 고통은 겪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사실을. 물론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고 해도, 삶은 꽤나 잔인하기도 하여 그것을 용케 피해 나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이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어떤 의미가 있기를 바라고, 말도 안 되는 의미를 마구잡이로 갖다 붙이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를 ‘과도한 의미 편향’이라고 이름 붙이곤 하는데, 운이 나빠서, 혹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초래되었던 비극조차도 마치 그런 비극이 자신의 삶에 커다란 의미가 있었던 양 미화하곤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저자는 무의미함의 위협에 대해서도 이 책에서 참으로 정직하게 다각도로 검토하지만 결론은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논증한다. 삶을 둘러싼 다양한 주제에 관해 이토록 명쾌하고 재밌게 쓸 수 있는 바지니의 솜씨가 이 책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리하여,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