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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3호] 유성구 신성동_옛 마을 사라진 곳, 새 시간이 흐른다
비 소식이 있던 하루, 아침 일찍부터 흐린 하늘이 신성동에 거대한 그늘을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후두두 소낙비가 쏟아질 것 같은 고요함 속에 혼돈이 예정된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 신성동이란 공간이 꼼짝없이 갇혀 있다. 연구단지와 아파트 단지, 원룸 단지, 상가와 학교가 또 이를 둘러싸고 흐르는 탄동천이. 신성동은 한 사람이 살기에 더 필요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갖췄다. 이곳에서 평생을 살더라도 공간에 쉬이 질리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신성동에서 평생을 산 이를 찾기는 어렵다. 1970년대 이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며 옛 마을이 없어지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성구 동북쪽에 있는 신성동은 동쪽으로 전민동, 서쪽으로 지족동과 반석동, 서북으로 외삼동, 남쪽으로 온천2동, 북쪽으로는 구즉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선 초기에 공주군 탄동면 지역이었고 1895년에 회덕군 탄동면에 속하게 됐고 1914년에 대전군 탄동면이 되었다. 1935년에 대덕군에 속했다가 1983년에 대전시 중구 관할로 편입했다. 이후 1984년, 대전직할시 유성출장소의 관할이었다가, 1989년 유성구 신성동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1995년 대전광역시 유성구 신성동이 되었다
사람들은 신성1교로 탄동천을 건넌다
유성문화원이 2010년에 발간한 《선비고을 유성이야기》에 따르면 신성동의 옛 마을로는 신성이, 숯골, 각장골, 승적골, 주막거리, 장방촌이 있었는데, 1970년대 이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며 없어졌다.
신성동의 동쪽을 흐르는 탄동천은 숯골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성마을 남쪽에 자리했던 옛 마을 숯골과의 연관성보다는 추목동의 숯골과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탄동천이 추목동 숯골 뒤 금병산에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금병산에서 발원한 물이 추목동, 신봉동, 자운동 등을 거쳐 신성동을 흐른다. 그리고 가정동, 구성동 등을 거쳐 갑천과 만난다.
탄동천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데 신성동에서는 애경종합기술원 쪽에서부터 걸을 수 있다. 대림산업 기술연구소, 쌍용 기술연구소 등을 거쳐 탄동천이 갑천을 만나는 국립중앙과학관 쪽까지 산책로가 이어진다
비를 한껏 품은 하늘 탓인지, 천을 따라 걷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자전거 탄 사람 한두 명쯤이 전부였다. 사람 대신 다른 생명들의 움직임이 도드라진다. 소금쟁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물 표면엔 비가 오는 듯한 파동이 생기고 바람결에 따라 커다란 나무의 가지들이 몸을 흔든다. 가만히 걸음을 멈추면 바람결에 나뭇잎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애경종합기술원 쪽부터 걸어 신성교를 기점으로, 아파트 단지들이 위치한 승적골 삼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신성동은 크게 동쪽과 남쪽에 연구단지가 위치하며 서북쪽으로 주거 지역이 위치한다. 신성동의 북쪽과 남쪽 사이를 8차선 도로가 가른다.
신성동에서 오래 산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신성네거리 근처 유성구 노인복지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성구 곳곳의 어르신들이 모이는 여가형 노인복지시설이다.
신성동에서 오래 산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말에, 안내데스크를 지키는 직원은 “복지관에 신성동 어르신들도 계실 텐데 누구인지 찾기는 어렵다. 신성동에 관해서라면 폐지 줍는 할머니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나을 거다”라고 안내했다.
해 질 녘 탄동천
마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할머니의 노점상이 있다
신성동을 몇 번 다니며 폐지를 줍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기는 했다. 한 분인지 두 분인지 유모차나 리어카에 아슬아슬하게 박스나 신문 등 폐지를 싣고 골목을 다니는 모습을 봤었다.
복지관에서 나와 복지관으로 향하고 있는 할머니 몇 분을 만났다. 모두 신성동에 살고는 있지만,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게 없다며 잰 발걸음을 옮겼다.
금산에서 왔다는 한 할머니는 제법 오랜 시간을 내주었다. 몸이 안 좋아지면서 딸네 아파트에서 머무는 중이라고 했다. 금산 시골에 비할 바야 못 되지만, 동네가 조용해 지낼 만하다는 할머니는 마침 복지관으로 가는 길이었다. 딸이 복지관에 나가 보라며 그렇게 얘기를 하는 통에 아침이면 복지관으로 향한 지가 꽤 됐다.
그렇게 신성동의 어르신들이 유성구 노인복지관으로 향하는 동안, 근처 성덕중학교와 금성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시간이 펼쳐진다. 성덕중학교가 설립된 때는 1968년, 당시 금성중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다가 1994년에 성덕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금성초등학교는 1942년 탄동초등학교 신성분교장으로 설립됐다가 1949년 금성초등학교로 승격됐다. 근처의 한울 아파트가 1992년 입주를 시작했고 럭키하나 아파트가 1993년에, 대림두레 아파트가 1993년에 입주를 시작했는데, 성덕중학교와 금성초등학교는 이 시기보다 먼저 이곳 아이들의 공교육을 책임지고 있었다.
성덕중학교 앞 도로, 차와 사람 없이 한적하다
대림두레 아파트 뒤편, 노면 주차로 좁아진 골목은 가끔씩 붐비곤 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머무는 시간, 학교 근처는 평화로울 만큼 조용했다. 간간이 차가 다닐 뿐, 길에 사람도 거의 없었다.
경비원으로 일하는 김 씨 아저씨는 한울 아파트 단지 안에서 만났다. 퇴직 후 작년부터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동네에 사는 아저씨는, 신성동을 ‘조용하고 수준 높은 동네’라고 설명했다.
“이 동네에서 오래 산 사람은 없을 거예요. 대부분 연구원이나 군인 퇴직한 사람들이 살죠. 그래서 조용하고 아무래도 수준이 높아요. 사람들이 점잖고요.”
아저씨의 말마따나 동네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평화로운 아파트 단지 내 잘 가꿔 놓은 화단을 따라 걸으며 노인정으로 향했다.
노인정 할머니방에는 할머니 두 분이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올해 여든넷이 된 이옥순 할머니와 여든셋이 된 강재선 할머니다.
“나는 여기 온 지 25년이 넘었어. 장수에서 살다가 연구원 아들네로 온 거야. 주로 여기는 연구단지 다니는 사람들이 살아. 처음에 와서는 친구도 없어서 애먹었지. 그런데 살다 보니 좋은 친구도 생겼어. 여기가 사람 살기엔 좋은 데야. 차도 별로 안 다니고. 어디 가서 신성동에서 왔다 하면 ‘좋은 데 사시네요’ 한다고.”
이옥순 할머니가 처음에 신성동에 왔을 때만 해도 동네에 단독주택이 많았는데, 하나둘 부수고 지금은 그 자리를 원룸 빌딩들이 메웠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더 깨끗해지고 살기 좋아졌다.
할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배드민턴을 치고 이곳 노인정으로 나온다. 복지회관도 있지만 그곳은 ‘젊은이들이 가는 곳’이다.
부산에 살던 강재선 할머니는 아들을 따라 미국에서 머물다 이곳으로 온 지 19년이 됐다. 노인정에 나오는 어르신들 대부분이 두 할머니처럼 다른 지역에서 아들을 따라, 딸을 따라 신성동으로 왔다고 했다.
신성동 주거 지역은 아파트 단지와 원룸 빌딩들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 할머니들은 다 스마일이야. 아침에 산에 가면 거기 할머니들하고 웃으면서 ‘굿모닝’ 하고 ‘하와유’ 하지. 또 헤어질 때는 ‘바이’ 하고. 여기 사람들만치 찡그리고 다니질 않고 항상 밝지. 나는 원래 밝았어, 스마일이고. 여기 할매들도 사람들이 순진하고 좋아. 얼마나 평화로와.”
이야기를 끝낸 강재선 할머니가 나갈 채비를 한다. 작은 색 하나를 매고 모자를 쓴다. 벽에 붙은 포스터들을 떼고 쓰레기를 주우러 나가는 길이다. 이렇게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세 시간쯤 일을 하며 용돈을 번다.
“이렇게 돈도 벌고 자식놈들도 용돈 주지, 나라서 돈 주지 하니까 옛날만치 깨굴깨굴 사는 사람이 없어.”
강재선 할머니가 일을 하러 나가고 노인정에 혼자 남은 이옥순 할머니는 막 점심 반찬 준비를 시작한다.
“나이가 들어도 다 일자리 나가. 나도 노인돌보미 하는걸. 밖에 못 나가는 노인들 말동무하는 거지 뭐. 내가 가면 할머니가 ‘아이고’ 한다고. ‘날 찾아오는 사람은 이 여사뿐이여’ 하면서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여기 나오던 이가 못 나오고 집에만 있으니까 내가 마음이 그렇지.”
이옥순 할머니가 노인돌보미로 일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우리 또래 다 혀”라며 웃는 할머니가 앞으로 바라는 건 ‘죽을 때 밥 잘 먹고 누웠다가 하늘나라 가는 것’이다. 증손주가 자신을 ‘왕할머니’라고 부르는 걸 재미로 삼고 노인돌보미 일과 노인정 나오는 걸 일로 삼는 할머니는 이제 남은 생을 신성동에서 보낼 것이다.
대덕연구단지 입주와 함께 많은 이가 함께 이곳으로 왔다. 식당과 카페, 마트와 편의점 등 상가도 구성됐다. 대덕연구단지와는 상관없는, 어쩌면 더 먼 옛날부터 이곳과 인연을 맺어 온 이들도 이제는 달라진 동네에서 살아간다.
잔뜩 흐렸던 하늘은 오후 늦게 개었다. 이날 비는 내리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의 시간이 흘렀다. 깨굴깨굴 살든, 그렇지 않든 누구에게나 같은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