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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3호] 열아홉 차유림 너와 나의 노트를 드러내다
올해 4월 유림 양의 노트가 세상에 나왔다. 열일곱 살부터 썼던, 그림과 글이 함께 있는 노트다. 제목은 허그.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그 나이엔 누구나 자기만의 노트를 가지고 있다.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다 보면 따뜻한 그림과 손 글씨가 포근하게 나를 안아 준다. 그래서 HUG. 부제는 I Can Give you이다.
예고에 입학하기 전, 유림 양은 미술학원이라고는 다녀 본 적이 없다. 그림이 좋아서 혼자서 그렸다. 엄마, 아빠가 그림 도구와 책을 사 줬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 보자 싶었다. 그래서 예고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모든 걸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친구들 대부분이 학원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자율수업 시간, 그리고 싶은 걸 그리라고 했다. 유림 양은 보이는 사물을 조그마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에 더해 날짜를 쓰다가, 글을 써 볼까 했다.
“저는 새벽이나 밤에, 안 좋은 일이 있거나 할 때, 감성이 폭발해요. 그 시간에 글을 써 둬요. 다 잠들 시간에, 글을 써요.”
의외였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줄 알았는데 글이 먼저라고 했다. 책 속에 담긴 수채화 그림 옆의 손 글씨로 쓴 간결하지만 깊은 생각을 담은 글들. 출판사에서 도서 《HUG》에 붙인 ‘감성시집’이라는 명칭대로, 이 책은 짧은 시로 채워졌다.
“어떤 감정을 갖고 있어요. 그런 맘으로 누가 어떻게 이야기할까 생각해 보면, 사물이 먼저 말할 수도 있겠구나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러고 나서 그림이 나와요.”
유림 양은 수업 시간에 시를 접하면서 글을 좋아하게 되었다. 시인 윤동주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을 모으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100원짜리만 한 아주 작은 그림과 글이 담긴 노트가 그렇게 쌓여 갔다. 마음속 이야기가 그렇게 풀려 나왔다.
“친구들이 재미있어 했어요. 그렇게 그리다 보니 노트가 모이고, 출판사에 한 번 보내 볼까 해서 몇 군데 보냈는데, 마침 출판해 주겠다는 곳이 있어 책이 나왔죠.”
책을 낸다는 거, 글과 그림을 나눈다는 건 소통하는 일이다. 책이 나오자 친한 친구가 “내 친구 이런 면이 있었네” 하며 낯설어했다.
“책을 내면서, 나라는 존재를 알려서 뿌듯했어요. 하고 싶은 말을 전하니까 숨어 사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좋았어요.”
유림 양 속에 숨어 있던 무언가가 그림과 글, 책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숨어 사는 느낌’이라는 말에 맘이 아련하다.
나를 표현하지 못하는 시간. 우리의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은, ‘입시’라는 대명제 속에서 언제나 나를 감추어야 했던 시간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 나이의 친구들은 모두 하나의 깃발을 향해 달려가야만 한다. 열아홉 유림 양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참 앳되다. 뒤돌아보니 나는 그 앳된 나이에 지나치게 심각했구나 싶다. 미래란 이 3년 동안 입시를 어떻게 준비하느냐가 아닌, 이 앳되고 푸른 나이를 얼마나 행복하게 보냈느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저보다는 주변 친구들이 힘들어해요. 각자 꿈을 가지고 있는데 학원에서는 반대를 해요. 입시에 맞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죠. 저도 고3이니까, 요즘 입시 준비해요. 사물 보고 그림을 그리는데, 같은 사물인데도, 입시 정물을 그리는 것과 느낌을 담는 것은 달라요.”
이제 수능이 몇 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스트레스 받지만, 자책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는 않는다. 점심시간에는 친구들과 배드민턴도 치고, 탁구도 친다.
“요즘은 그냥, 입시에 너무 목매지 말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열심히 해 보자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입시, 수능하고 가까워지니까.”
유림 양은 《HUG》에 실린 글 중에 ‘새싹’을 가장 좋아한다.
마음속에 어떤 씨앗을 심었는지 중요해요. 당신은 어떤 씨앗을 심었나요? ‘씨앗 그리고 새싹’
“힘들 때, 아빠가 저한테 하는 말이 있어요.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마음먹은 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 주셨어요.”
유림은 그렇게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하나씩 세상에 틔워 내고 있다. 아홉 명의 친구와 전시회를 열어 희귀병 질환 어린이를 돕기도 하고, 이렇게 생각을 모은 책도 냈다. 남들이 입시 준비에 한창일 때 조금씩 하고 싶은 일을 실천에 옮겼다.
숨기지 않고 드러낸 이마가 참 당차다. 숨어살지 않고 나온 새싹이 참 어여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