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23호] 피스보트_평화는 타자에 대한 응답

노히라 신사쿠 피스보트 공동대표
피스보트의 허미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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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지하는 아지트 같았다. 작당모의 기운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그곳에 하얀 가운을 입은 괴팍한 과학자 한 명 정도 있어 주면, 썩 잘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다. 별다른 장식 없는 넓은 테이블에 노인 몇이 앉아 편지봉투에 풀칠을 했다. 활기가 넘쳐 통통 튀어 다닐 듯한 청년은 어깨에 에코백을 둘러메고 인사를 한 뒤, 계단을 뛰어올랐다. 에코백에는 작은 주머니 여러 개가 노출 형태로 달렸다. 그 안에는 테이프 등을 꽂아 두었다.

노인과 청년 모두 자원봉사 마일리지 할인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돈이 없어서 배에 못 타는 친구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에요. 35세까지는 자원봉사 마일리지로 여행비 전액을 모을 수 있고요. 그 이상은 50%까지 할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로 포스터를 붙이거나 홍보 우편물 발송하는 일이 많아요. 신문광고도 내지만 실제로 확인해 보면 포스터를 보고 문의전화를 가장 많이 하더라고요. 홍보 효과가 가장 높은 수단이 ‘포스터’인 셈이지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촬영한 가게 안에 우리 포스터가 붙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걸 보고 문의도 많이 왔어요. 그만큼 우리가 붙인 포스터의 양이 많고 홍보 효과도 있다는 얘기지요. 노인층은 꼭 여행경비를 아끼려는 목적으로만 오는 건 아니에요. 무척 긴 일정으로 배에 오르는데, 출발하기 전에 자원봉사를 하면서 서로 얼굴이라도 익히고 친구도 사귈 수 있으니까 좋은 거죠.”

일행을 맞이하고 마일리지 프로그램에 관해 설명해 준 사람은 피스보트에서 일하는 허미선 씨다. 2005년 대학 4학년 2학기 때, 피스보트가 운영한 지구대학에 참가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아시아 역사 교과서 관련 일을 하다가 환경재단과 피스보트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피스그린보트에 탔던 것을 계기로 2012년부터 상근자로 피스보트에서 일한다.

다국적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피스보트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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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보트’가 처음 항해에 나선 것은 1983년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시끄러운 이슈였다. 이 소용돌이 안에서 일본의 청년들이 배를 띄웠다. 논란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나라를 직접 방문해 이야기를 듣고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이후 배를 띄우며 게스트를 초대해 강의 듣고 전쟁 피해자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작업을 계속했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돌던 피스보트는 현재 전 세계를 무대로 매년 세 번, 배를 띄운다. 겨울에 출발하는 배는 남반구를 중심으로 돈다. 여름에는 북유럽을 중심으로 돌고, 봄에는 섞어서 코스를 구성한다. 봄에는 특별히 5일짜리 크루즈를 운영한다. 체험용이다. 직접 승선해서 경험한 후 여행 참가를 결정할 수 있도록 마케팅 차원에서 움직인다. 이외에 여름에는 우리나라 환경재단과 함께 피스그린보트를 운영한다. 올해 7월에 열 번째 배가 출항한다. 앞으로 중국이나 대만, 싱가폴 등 아시아 다른 나라와 공동으로 진행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100일가량으로 항해 기간이 길다 보니 피스보트 주요 고객은 아무래도 60대 이상이다. 40~50%에 달한다. 20대 전후가 30~40%, 나머지는 30~40대 전문직이다. 전체 승선 인원 중 동료 없이 홀로 타는 인원이 60~70%에 달하는 것도 흥미로운 결과다.

피스보트가 초기에 아시아를 중심으로 역사 인식 문제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피스보트 관심사도 다양하게 확장했다. 환경문제를 기본으로 평화와 반전 등 다양한 지구 현안에 관심을 기울인다. 고베 대지진 때도 배를 보내 적극적인 자원봉사활동을 펼쳤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아예 재해와 지진에 대응하는 PBV라는 사단법인을 별도로 만들어 운영 중이다. (사)PBV도 도쿄에 있는 본사에 사무실을 같이 사용한다. 최근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는 탈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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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다닐 때, 남북문제를 비롯해 아시아 경제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기본적인 생각은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착취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하는 피스보트에 참여했습니다. 막연하게 일본에 착취당해 불행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너무 밝았어요. 각 나라의 음악과 음식도 좋았어요. 오히려 내가 리빌딩이 되는 기분이었죠. 관심이 많았던 경제 양극화 문제보다 역사 인식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피스보트의 노히라 신사쿠 공동대표(이하 대표)가 피스보트와 인연을 맺은 계기다. 그는 경제 양극화와 국가 간 착취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열혈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직접 눈으로 확인한 현실 앞에 한 뼘쯤 성장해 인생 전체의 전환을 맞이한다. 1990년대 초, 피스보트에 합류했다. 피스보트에서 일한 지 이제 30년 가까운 세월이다. 노히라 신사쿠 대표는 그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밝힌다. 여러 번 재차 확인하고 물었지만 답변을 번복하지 않았다. 억울하다는 느낌을 주는 웃음만 흘렸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저에게 엄청난 자극을 줍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반 기업에서 잠깐 일한 적도 있어요. 그때를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나이 50살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나의 이상향과 비전을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하루 이틀 육체적으로 힘들 때는 있어도 정신적으로 힘들 때는 정말 없어요. 보람 있고 즐거운 일입니다.”

예전에 그는 1년에 절반을 배에 올라가 지내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1년에 한두 번 짧은 크루즈만 탄다. 그런 그가 정의하는 여행은 “타자를 알고 나를 아는 것”이다

여전히 꿈을 꾸고 비전을 설정하는 그가 요즘 관심을 두는 핵심 사업 중 하나는 바로 ‘에코십(ECO_ship)’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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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히라 신사쿠와 피스보트가 관심을 두는 ‘에코십’은 2013년 즈음부터 고민을 시작했다. 그 즈음은 피스보트가 30주년이 되던 해였다.

환경과 반핵을 외치는 단체에서 바다에 띄우는 배가 엄청난 양의 화석연료를 소모하며 환경오염물질을 배출한다는 것은 늘 뒤통수가 간지러운 현실이었다. 계획대로 잘 추진해 2020년에는 에코십을 바다에 띄우고 싶다.

“풍력과 태양광 등 대체 에너지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배 안에서 완벽한 에너지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거죠. 예를 들면, 음식물 찌꺼기를 배 안에 있는 작물 재배 공간에 퇴비로 활용하고, 헬스장에서 사람들이 운동하면서 발생하는 에너지도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어요.”

‘에코십’을 설명하는 노히라 신사쿠의 눈이 반짝거린다. 이 배를 활용해 하고 싶은 일도 많다. 우선, 배 안에서 적극적인 국제교류가 가능하길 희망한다.

현재 피스보트에 승선하는 인원은 여전히 일본 사람이 대부분이다. 말레이시아, 중국, 대만, 한국 사람이 조금씩 타지만 많지 않다

“앞으로 50%는 해외에서 타시는 분이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기항지에서 현지 사람과 만나는 상태지만 앞으로는 배 안에서 직접 국제교류가 가능한 피스보트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 때문에 기항지에 가면 선내 견학 등으로 적극 마케팅하고 있죠.”

그가 배 안에서 펼치는 국제교류는 ‘다민족 다원적 시민사회 모델의 실험’이다. 일본은 본래 배타주의적 성격이 강한 나라였지만, 최근 미국과 유럽 등에서도 점점 배타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그는 이를 거론하면서 더 다양한 나라 사람 1천여 명이 같은 배 안에서 100여 일을 함께 보내니, 피스보트 안은 충분히 실험이 가능한 다민족 다원적 시민사회라고 했다.

“다른 비전은 에코십을 다른 나라와 함께 다국적으로 운영하고 싶다는 겁니다. 대학과 제휴를 맺어 학점 이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도 이 계획 안에 있어요. 일본은 이미 제휴를 맺은 대학이 많습니다. 중국과 싱가폴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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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가 함께 운영하는 ‘에코십’은 어쩌면 이미 우리나라 환경재단과 공동으로 운영하는 ‘피스그린보트’에서 실험을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노히라 신사쿠가 이야기하는 다국적 운영에서 ‘국’은 ‘정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피스그린보트가 지닌 가장 큰 의미는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책임을 지고 공동으로 배를 띄운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한쪽이 주인이고 다른 쪽이 손님이 아닌 거죠. 이렇게 공동으로 운영한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어요.”

공동 운영 주체는 환경재단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정부기구다. 피스보트도 여행사가 아닌 NGO다. 크루즈 운영은 Japan Grace(저팬 그레이스)라는 크루즈 여행사가 맡는다. 배 ‘오션드림호’는 미국 회사 소유다. 임차해 사용한다. 결국 하드웨어적인 것을 제외하고 피스그린보트 운영은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 영역에서 맡아 진행하는 셈이다.

“국가가 강한 권력을 가질수록 제대로 된 역사는 없어요. 시민사회 권력이 커질수록 국가 권력은 약해집니다. 국경을 넘어서 시민사회가 손을 잡아야 해요.”

피부색도 종교도 태어난 고향도 다른, 다양한 사람 1천 명이 100일간 배를 타고 세계 각국을 다니며 반전 평화와 탈핵 환경과 인류애를 이야기하는 프로젝트는 이미 30년 전에 시작했다. 지나온 시간도 충분히 의미 있지만 앞으로 만날 시간이 더 기대되는 프로젝트다

“평화는 타자에 대한 응답”이라고 정의하는 노히라 신사쿠는 아들 중학교 입학식에 다녀오느라 늦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평범한 우리네 이웃이었다.

글 사진 이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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