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123호] 가슴 울리는 '연결' 위해 '느림'이 필요하다
도쿄 시나가와 역 시계탑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스지 신이치가 사람들 사이로 보였다. 그는 키가 훌쩍 컸다. 눈은 우물처럼 깊었다. 가죽 재킷에 청바지, 운동화, 백팩, 머플러를 둘렀다. 마른 몸이었다. 단정하게 자른 머리는 하얗게 셌다.
지하철역 바로 인근 카페로 옮겨 앉은 그는 차가운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대화가 끝날 때까지 딱한 잔뿐이었다.
“박근혜 개인 문제에 집중되어 있어서, 한국 사람의 근원적 삶을 어떻게 바꿔 나갈지는 잘 보이지 않아요.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미 대선 결과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지요. 또 한국은 북조선과의 문제가 있어서 여러 가지를 상상하기는 많이 어려운 현실입니다.”
박근혜 탄핵을 요구하는 시위가 한창일 때였다. 자연스럽게 국내 정치 상황에 관한 이야기가 테이블 위에 맨 먼저 올라왔다.
“각 국가, 각 지역이 살아갈 목적을 가지고 전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중요해요. 현재 세계는 세계화(글로벌)와 반세계화가 부딪쳐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그 두 길 모두 아니에요. 제3의 길을 가야 한다고 봐요.”
세계화뿐만 아니라 반세계화에 대한 이해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 스지 신이치의 이야기였다. 최근 반세계화는 세계화를 반대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오히려 내셔널리즘이나 민족주의와 같은 것이 반세계화의 탈을 쓰고 필요한 이득을 취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얘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식과 유사합니다. 세계화의 흐름이 그렇지요. 세계화의 중심에 있지 못해 손해를 본다고 판단하는 국가가 반글로벌을 지향합니다. 로컬리제이션과 내셔널리즘은 명확하게 구분해야 해요. 둘은 같지 않아요. 국가와 민족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걸 넘어서지 못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인류가 몇 백 년 동안 추구해 온 사안이지만, 이제서야 그것이 실현되기 직전에 있다고 봅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는 지역화(로컬리제이션)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다. 이 생각은 세계 각국의 시민이 ‘망해 가는 정치와 자연환경’을 지켜보면서, 지역화에 관해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지금 한국은 삼성이라는 대기업에 의존도가 너무 심하죠.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3세계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일본은 이제 큰 출판사가 섬으로 가고 컴퓨터 회사가 지역으로 가지요. 유명한 패션 브랜드 대부분도 지방에 있어요. 이런 사례가 점점 많아집니다. 조그만 마을이 없어질 것 같았는데, 그 마을에 사원과 가족이 들어가요. 그러니까 마을이 다시 살아나지요. 이런 사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국가를 배제하는 걸 고민했는데, 그건 훨씬 더 뒤에 해야 할 논의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대기업을 위해 일하는 국가가 국민을 위해 일하도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지요.”
대화 과정에서 스지 신이치는 ‘가짜’에 관해 끊임없이 지적했다. 반세계화라는 탈을 쓴 내셔널리즘을 경고했고, 그가 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한 ‘슬로 라이프’도 대자본 기업의 마케팅 요소로 활용되는 현실을 개탄했다. 국민이 아닌 대기업을 위해 일하는 국가도 같은 맥락에서 혁신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 모든 문제의 해법으로 ‘지역’을 이야기했다. 지역 안에 삶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비롯해 에너지까지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그는 지역 안에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문득,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곳이 도쿄의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도쿄에 있는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로 근무한다.
“나는 스스로를 노마드라고 생각해요. 내가 어디에 가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으로 있고 싶어요. 현재 내가 사는 곳은 도쿄 외곽, 논과 밭이 있는 요코하마입니다. 마을에 있는 조그만 사찰에 커뮤니티 카페도 만들면서 동네 주민과 함께 마을만들기 사업을 펼치죠. 그러니 난 도쿄가 아닌 지역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 거대도시 도쿄도 역시 지역입니다. 이 안에 ‘지역’이 있지요.”
스지 신이치는 ‘지역’이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는 기준을 제시했다. 자연생태계가 보여야 한다는 것을 우선으로 꼽았다. 논과 밭, 그리고 숲이다. 여기서 말하는 숲은 도시에 인위적으로 조성한 공원이나 수목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건강한 생태계가 구축된 숲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제시한 중요한 조건이 내 옆에 살고 있는 사람이 누군인지 알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지역’이 아니라고 말했다.
스지 신이치 씨
“지역에서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자기 자신, 세 개의 연결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세계화한다는 것은 이 세 개의 연결을 전부 잃어버린다는 것이지요. ‘연결’은 일정 이상의 ‘느림’을 필요로 합니다.”
그가 주창한 ‘슬로 라이프’의 핵심도 바로 이 ‘연결’이었다. 그래서 본인은 무척 ‘바쁘다’라고 말했다. “Slow is busy.” 그가 구사한 문장이다. ‘슬로(slow)’와 ‘비지(busy)’가 한 묶음으로 등장했다. 그의 대표 저서 제목은 ‘Slow is Beautiful’이다.
“슬로 라이프가 한가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슬로 라이프를 실현하려면 바쁠 수밖에 없지요. 우리 삶에서 무척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자신의 영혼을 울리는 연결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큼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일본 고령자에게도 가장 문제로 제기되는 것이 삶의 의미를 잃어 간다는 것이잖아요. 이들에게도 역시 필요한 것은 바로 의미 있는 연결입니다.”
스지 신이치는 본인도 이 연결을 위해서 무척 바쁜 일상을 보낸다고 말했다. 슬로 라이프를 주창한 것도 현대사회가 끊임없이 강요하고 압박하는 ‘의미 없는 바쁨’에 대한 반발이었다. ‘슬로’가 필요한 것은 ‘의미 있는 연결’ 때문이라는 명쾌한 이유를 제시했다.
연결을 가능하게 하려면 일정 이상의 ‘느림’이 필요하다는 말을 되뇐다. 공사다망(公私多忙)에서 망(忙)은 결국 마음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망(忙)이라는 글자가 마음 심 ‘忄’ 변에 ‘없어지다’라는 뜻도 있는 망할 망(亡)자가 더해져 만든 글자라는 걸 생각하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을 움직이는 의미 있는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 중 하나로 꼽은 것은 ‘명상’이었다
“명상은 사실 모든 종교적 태도를 초월하지요. 그런 영상을 본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할 때는 무척 행복한데, 돌아오면 불행하고 단절된 느낌을 받는다는 고민을 털어놓는 영상이었어요. 그러니 계속 떠날 수밖에 없다는 고민을 토로했지요. 명상이 일상과 여행의 단절을 다시 연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지요. 비일상을 통해 느낀 것을 매일의 일상으로 가져오는 것이 여행의 목적 아니겠어요?”
스지 신이치의 선친은 한국인이다. 선친이 지어 준 그의 이름은 이규(李珪)다. 본인을 문화인류학자나 교수로 소개하기 앞서 환경운동가라고 소개했다. 그것이 제1 아이덴티티(Identity)라면서 말이다.
“사는 건 선물이에요. 식사하기 전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행복해지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를 기원해 보세요.”
스지 신이치는 다시 시나가와 역 시계탑 옆을 지나쳐, 수없이 오가는 퇴근 인파 속으로 순식간에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