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22호] 맥주를 마시는 구멍가게 여름풍경

여름이 좋은 이유는? 빨래를 널어놓으면 바싹 마르기 때문에, 자연이 짙은 녹색으로 변해서, 노출의 계절이기에, 이런 답변보다는 더워서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른다. 술꾼들에게 여름이 좋은 이유를 물어보면 이런 대답을 하는 이들이 종종 있을 것이다. 편의점 밖이나 구멍가게 앞에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 맛 때문이라고.

애주가의 입장에서 봤을 때 여름은 맥주의 계절이다. 오비맥주나 크라운맥주에 익숙했던 세대들은 갈수록 주종 선택의 폭이 넓어져 가끔은 결정장애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즐거운 비명이리라.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 들어온 수입 맥주량은 총 22만 톤으로 2015년 17만 톤에 비해 30% 가까이 부쩍 늘었다. 수입액도 2016년 기준 1억 8천만 달러로 전년 대비 31% 증가하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편의점에서는 수입맥주 비중이 60%에 육박해 국산맥주의 매출을 크게 따돌렸다는 소식이다. 편의점 냉장케이스에 붙어 있는 ‘4캔 1만 원’ 묶음 판매 문구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다양한 맥주를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산맥주와 가격 차이가 거의 없고 때로는 더 저렴한 경우도 있다. 수입맥주의 이런 마케팅이 효과를 발휘해 점유율이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1인 가구가 늘어나고 혼술 트렌드가 확산되는 추세까지 더해져, 새로운 맛을 즐길 수 있는 수입맥주의 소비는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편의점 앞 파라솔 아래에서 캔을 따는 재미는 한 마디로 술꾼들의 ‘저녁이 있는 삶’이다. 편의점이 아니면 아파트 입구에 자리잡은 슈퍼마켓, 골목 안 구멍가게 앞은 그 어떤 술집보다 가성비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낭만풍경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다. 나는 여름날 밤이면 아파트 상가에 있는 동네 슈퍼마켓 파라솔 아래에서 자주 술을 마셨다. 때로는 입가심의 명분으로 맥주 한 두 캔을, 어떤 때는 일찌감치 좌판을 벌여 소맥 폭탄주로, 안주는 오징어 쥐포 아니면 새우깡이다.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으면 동네 소식들이 하나 둘 들려온다. 물론 전달자는 주인의 몫이다.

“새로 뽑은 동 대표가 영 거시기 하네.” “무슨 일 있었나요?” “딱히 무슨 일이 있었다기보다는, 그것도 완장인가 어깨에 힘주고 돌아댕기는 것 같아서.” 주인이 이렇게 말을 던지면 손님은 적극적인 공감대를 표시해야 한다. 사실 아파트 동대표의 이름과 얼굴을 모르지만 뒷담화에 동참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빠진다. “그 사람 몹쓸 사람이네요, 동 대표는 봉사하는 자린데.” “내 말이 그 말이지.” 이렇게 맞장구를 몇 번 치고 나면 주인은 잠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 숨겨 두었던 별미를 가지고 나온다. “엊그제 낚시 갔다가 바로 냉동했는데 적당히 녹아서 먹을 만할 겨.” “씹는 맛이 그만이네요.” 주인이 내놓는 안주거리를 기대하며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갈 때마다 어떤 색다른 공짜안주가 나올까 기대를 갖기도 한다. 대천 앞바다 멀리는 목포까지 가서 낚시를 즐기는 주인은 종종 휴대폰을 꺼내 월척 사진을 보여 준다. “와 엄청나네요. 이걸 직접 잡았어요?” “이거는 별거 아녀.” “솜씨가 참 좋으시네요.” “솜씨는 무슨, 그냥 고기 나오는 데를 좀 아는 거지.”

주인과 두런두런 말을 섞고 있으면 아저씨 두세 명이 옆 테이블에 앉는다. 물론 이들도 슈퍼마켓 단골이자 술꾼들이다. 테이블 두 개의 마지막 한 자리를 채우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낚시 다녀오셨나 봐요.” “산삼은 가끔 나오는가?” 슈퍼마켓 주인이 약초 캐는 취미를 가진 사람과 안부를 나누면, 함께 자리한 이들은 산삼의 효능을 묻는다. 내가 종종 마주치는 멤버들이라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단골 소재를 기억한다.

“산삼이 그렇게 많이 나오나? 장뇌삼 아닌가?” “장뇌삼이나 산삼이나 똑같이 산에서 자란 거 아녀.” “그게 무슨 말여, 산삼이라니까.” 이들은 티격태격하면서 잔을 기울인다. 더덕도 오래되면 산삼 못지 않다는 얘기라도 하면 단박에 무시를 하고, 도라지밖에 못 먹어 본 사람이 어떻게 산삼을 알겠냐며 타박하기도 한다. 거리의 파라솔 아래서 술을 마시는 이들의 대화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게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과 행인들에 대한 촌평이다.

“저렇게 짝 달라붙는 바지를 입으면 안 답답한가?” “답답한 건 저 여자 사정인디 뭘 걱정이랴.” “저렇게 배가 많이 나오면 여름에 힘들 텐디.” “남의 배 걱정 말고 본인 뱃살 걱정이나 하더라구.” 대화의 소재는 개인의 일상사에서 행인의 건강까지, 때로는 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논평을 이어 가는 동안 밤은 점점 깊어 간다. 각기 다른 두 개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의기투합할 때도 있는데, 그건 한화이글스의 야구 중계를 볼 때다. 멀리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 있는 텔레비전은 상황을 짐작할 정도만 보인다. 시청거리가 멀어서 누가 던지고 누가 타석에 들어섰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정황상 분석은 가능하다.

“거기서 삼진을 당하면 어떻게 햐. 외야로 날려야 한 점이라도 뽑지.” “투수를 또 바꾸네. 너무 자주 바꾸는 거 아녀.” “저 친구는 몸무게가 100킬로가 넘는디도 참 잘 때려, 타격 폼이 흐트러지질 않어.” 반쯤은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해설위원보다 앞선 분석으로 팀과 선수들은 금세 안주거리가 된다. 술꾼들이 술을 마시는 장소는 다양하다. 시끌벅적한 삼겹살집에서 여전히 잔을 돌리거나, 치킨에 생맥주 한잔으로 더위를 달래거나, 여름에는 불이 없는 곳에서 고기를 먹어야 한다며 수육이나 족발을 찾거나, 취향과 함께 마시는 사람들에 따라 장소는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주종에는 시원한 맥주만 한 것이 없다. 물론 황금비율의 소주가 섞이면 금상첨화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잔이다.

마침내 맥주를 다 마신 뱀포드는 거품이 없는 잔을 들여다봤다. “제대로 씻지 않았을 뿐이죠.” 뱀포드는 슬픈 어조로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맥주잔을 접시와 같이 닦을 겁니다. 이 사람들이 뭘 하는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하는 건 아니죠. 맥주는 제대로 만들기만 하면 거품을 내는 잠재력이 충분합니다. 거품과 관련된 문제의 95% 어쩌면 98%는 맥주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맥주를 어디에 어떻게 따르느냐에 달려 있지요.” (아담로저스, 《프루프 술의 과학》, MID, 123쪽 인용)

구멍가게에서 깨끗한 유리잔을 요구하기에는 좀 미안한 일이다. 그래서 종이컵에 따라 마시거나 캔에 입을 대고 직접 마신다. 뱀포드 같은 술 전문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제값을 주고 먹는 술집에서는 잔을 더러운 접시와 함께 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가끔은 행주 냄새가 나는 잔을 입에 대는 순간, 더위가 식기는커녕, 높은 열기가 솟구친다는 것을 술집 주인들은 명심했으면 한다. 올 여름에도 시원한 맥주를 유쾌하게 즐길 수 있기를 바라면서 드리는 말이다.

글 사진 정덕재(시인, 르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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