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22호] 제8회 월간토마토문학상 대상 수상작_오비랍토르

오비랍토르

도어락의 마지막 비밀번호는 4였다. 빗장 열리는 소리가 조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거실에는 공룡 피규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조는 눈에 익은 공룡 피규어를 움켜쥐었다. 홍의 아이가 이 공룡의 목을 잡고 마트에 가고 놀이터에 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조는 공룡을 철가방에 집어넣었다.

홍의 머리카락이 뭉쳐 있었다. 내추럴 브라운으로 염색된 머리카락. 엄지와 검지로 집어 올려 코에 댔다. 홍의 뒤를 밟으면서 맡았던 체취가 코끝을 간질였다. 홍의 머리카락을 휴지에 싸서 철가방에 넣었다. 조는 준비해 온 장비를 철가방에서 꺼냈다. 뭔가 떨어지는 소리에 조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베란다 창으로 비바람이 들이쳤다. 조는 베란다로 나가 실외기가 놓인 쪽 창을 닫았다. 양쪽이 열려 있을 때보다 바람 소리가 잦아졌다. 건너 아파트의 창이 눈에 들어왔다. 이 집에서 앞 동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앞 동에서 마음을 먹으면 밤에는 이 집이 환히 보였다. 조는 펄럭이는 버티컬 블라인드를 묶었다. 베란다 창이 가려지지 않게 정리하면서 앞 동의 한 집을 건너다보았다. 조는 안방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장마철의 퀴퀴한 냄새가 안방 화장실과 장롱 속에서 풍겨 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방이 더러울까, 내 발이 더 더러울까. 조는 중얼거리며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얼룩처럼 검은 물체가 조의 발에 걸렸다. 침대 밑에 상자가 있었다. 조는 어릴 때 엄마와 함께 열어 봤던 상자가 떠올라 심장이 요동쳤다.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실꾸리가 있었다. 대문 밖이 소란스러웠다. 상자를 닫아 침대 밑에 밀어 넣었다. 숨을 참으며 귀를 기울였다. 열린 방문으로 부엌 싱크대가 보였다. 칼꽂이에 종류별로 꽂힌 칼을 노려봤다. 앞집 노인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도어락을 누르고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잠해졌다. 조는 거실, 부엌, 안방, 화장실에 장비를 설치했다. 조는 변기에 소변을 누고 물을 내리지 않았다. 냉장고 칸을 열어 보다가 자두를 찾아냈다. 한입 깨물어 오물거리고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조는 홍이 실체 없는 누군가를 느끼고 공포가 홍을 잠식하길 바랐다. 조는 신발장에서 철가방을 열었다. 공룡 피규어를 두고 갈까 망설이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홍과의 일이 불거진 것이 꼭 그 위치였다.

철가방을 열고 짜장면과 짬뽕을 꺼내 거실 바닥에 놓았다. 핫팬츠에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홍이 다가왔다. 홍은 짜장면 그릇을 들어다 식탁에 옮기고 짬뽕 그릇을 가지러 왔다. 조는 멍청히 서서 아이가 들고 다니는 공룡 피규어를 보았다. 아이는 공룡을 짜장면 그릇 옆에 세워 두고 식탁에 앉았다. 너도 같이 먹자. 아이가 공룡을 쓰다듬었다. 남편은 보이지 않았고 다양한 종류의 공룡 피규어만이 거실 바닥을 굴러다녔다. 카드 되죠? 홍이 물었다. 신발장과 연결된 진열장 위에 까만 장지갑이 있었다. 아, 카드는 휴대폰에 꽂혀 있는데. 홍은 거실 이 구석, 저 구석을 돌아다니고 부엌을 더듬으며 휴대폰을 찾았다. 만 원 이하는 카드가 안 되는데, 홍은 2년 단골이라 사장이 카드계산을 허락했다. 홍이 시키는 메뉴라고는 조가 있던 2년 동안, 거의 매주 짜장면과 짬뽕이었다. 조는 카드를 받아 기계에 꽂고 영수증을 주고 돌아 나왔다. 저녁때 중국집으로 전화한 홍의 남편은 정중히 경고했다.

“실수했더라도 이유를 묻지 않겠으니, 지갑만 돌려 달라고 전해 주세요. 그 안에 주민등록증이랑 운전면허증 각종 카드가 들어 있어서 다 만들어야 해서요. 부탁합니다.” 사장은 조의 얼굴을 봤다. 조는 고개를 저었다. “주일마다 교회 다니는 착실한 사람이에요.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사장은 전화기에 대고 말했지만, 조의 얼굴을 다시 훑어 볼 때는 의혹이 짙은 눈이었다. 사장은 장사가 끝난 밤에 조를 데리고 홍의 집으로 갔다. “생각해 보세요. 돈 만 원이 없어서 카드 계산을 하는데, 지갑을 뭐하러 훔치겠어요?” 지갑은 신발장 마지막 칸에서 나왔다. 사장이 찾아냈다. 홍은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열어 봤는데. 하루 종일 찾던 게 왜 거기서 나올까. 발이 달렸나? 이해가 안 가네.” 홍의 중얼거림이 문밖으로 고스란히 넘어왔다.

조가 아파트 로비를 나설 때, 홍이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펼치는 모습이 보였다. 홍의 휴대폰 번호가 자동차 앞유리에 붙어 있었다. 조는 홍을 스치고 지나갔다. 홍은 잠시 조한테 눈길을 주었지만,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홍은 휴대폰에서 거의 눈을 떼지 않고 아파트 로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는 홍의 SNS에 올려진 글이 떠올랐다.

홍의 SNS에 올라온 사진은 조의 얼굴이 아니라 중국집 짜장면 그릇이었다. 발 빠른 홍의 팔로워들이 팔로워들이 글을 퍼가 조의 신상과 함께 다시 올렸다. SNS에서 홍의 얼굴은 포토샵 처리가 되어 생기발랄했다. 홍은 흔히 말하는 SNS 공주였다. 팔로워들이 5천 명이 넘었다. 팔로워가 거의 없는 조가 자신의 SNS에 올려놓은 사진을 그들이 퍼갔다. 조가 헬멧을 쓰고 찍은 사진이었는데, 혐오감을 준다는 추천이 500건이 넘었다. 이름, 나이, 사는 곳, 직업, 직장, 종교. 조에 관한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평범한 사람이, 익명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노출되고 어떻게 욕을 먹으며, 그들의 말에 의해 무덤이 만들어지는지, 조는 그 과정을 고스란히 겪었다. 조는 악성 댓글이 도배된 SNS를 탈퇴했다. 메일함은 차고 넘칠 만큼 욕설이 쏟아졌다. 중국집에 배달 전화보다 조에 관해 묻는 전화가 더 자주 왔다. 사장은 조를 직원으로 둘 이유가 없었다. 번호가 유출된 조의 휴대폰은 시도 때도 없이 울렸다. 홍의 한마디로, 그간에 조가 만들어 온 세상이 막을 내렸다. 조가 다른 계정으로 홍의 친구가 되자 SNS를 통해 홍의 이름, 나이, 사는 곳, 취미, 가족관계까지 알 수 있었다.

조는 바이크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홍을 따라갔다. 홍과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조가 먼저 20층을 눌렀고 홍이 10층을 눌렀다. 홍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코를 막았다. 8인승 좁은 엘리베이터 안이 찌든 음식 냄새로 가득 찼다. 조는 홍이라는 여자의 기억력에 기가 찼다. 홍에게 조는 그저 냄새나는 없는 존재인 듯했다. 조는 오른쪽 벽에 붙은 광고판을 보다가 거울을 통해 홍의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홍은 SNS를 보며 좋아요, 를 연신 클릭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홍이 내렸다. 조는 참았던 숨을 뱉어 냈다. 홍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뒤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닫혔다. 조는 홍의 머리털 한 올도 잡아채지 못했다. 철가방 안에는 아이의 공룡 피규어와 홍의 머리카락 몇 가닥만이 들어 있었다. 조와 철가방 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20층이었다. 조는 서둘러 내린 후 엘리베이터가 닫히길 기다렸다. 30초 후 버튼을 눌러 다시 탔다.

홍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등이 뜨거웠다. 좀처럼 사람의 눈을 보지 않는 홍이었다. 홍은 뒤돌았다가 남자의 눈을 보고 말았다. 무심한 듯 광고판과 거울을 들여다보던 남자의 눈이 흙빛으로 일렁였다. 홍은 그런 눈을 본 적이 없었다. 원한과 증오와 한이 담긴 눈이면 저런 빛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살면서 기쁨이라고는 느껴보지 못한 눈이었다. 홍은 몸으로 도어락을 가리고 번호를 눌렀다.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나와 홍을 잡아채 갈 것 같아 손이 떨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홍은 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 남자가 내린 기색은 없었다. 홍은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가 서는 층 번호를 보았다. 20층에서 멈추는 엘리베이터를 확인하고 홍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를 어디서 봤을까. 홍은 미간을 찌푸렸다.

조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철가방을 던져 놓고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네 개의 프레임이 홍의 동선을 보여 주었다. 홍은 옷을 벗고 맨몸이 되었다. 화장실 문을 열어 놓고 샤워를 시작했다. 샤워하고 머리를 동여맨 홍이 거실과 부엌과 방을 맨몸으로 돌아다니며 물을 마시고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렸다. 조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홍의 움직임을 살폈다. 행주를 집어 든 홍은 식탁을 쓱쓱 닦고 행주를 싱크대에 처박았다. 홍은 공룡 피규어가 잔뜩 굴러다니는 거실 바닥을 비로 싹싹 쓸어 단숨에 치워 버렸다. 홍은 소파에 누워 낮잠에 빠졌다. 조는 목이 말라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철가방에서 튀어나온 공룡 피규어가 조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비랍토르. 공룡 이름이 영어로 씌어 있었다. 홍의 SNS를 뒤졌다. 홍이 올려놓은 사진과 정보가 있었다.

오비랍토르.

1924년 몽골의 백악기 후기 지층에서 발견되었다.
오비랍토르(Oviraptor)란 이름은 ‘알도둑’이란 뜻인데 처음 골격 화석이 발견된 당시 프로토케라톱스(Protoceratops)의 알로 추정되는 공룡알과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에 오비랍토르가 이 공룡 알들을 훔쳐 먹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후에 오비랍토르의 알 화석과 둥지 속의 알을 품고 있는 골격 화석을 발견하게 되어 알을 훔쳐 먹었던 것이 아니라 둥지 속의 알을 품어 새끼를 돌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는 벗어 놨던 헤드폰을 끼고 화면을 들여다봤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울음을 터트렸다. 홍이 아이를 안고 달랬다. 홍과 아이는 공룡을 찾아 집 안을 뒤지고 다녔다. 조는 옆에 놓인 오비랍토르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늘 잡고 다녔을 목 부위의 칠이 벗겨져 번들거렸다. 홍과 아이는 안방의 침대를 뒤지고 침대 밑을 살폈다. 앞 베란다를 샅샅이 뒤지고 나머지 두 방과 소파 밑까지 뒤졌다. 조는 베란다로 뛰어나가 그들을 보았다. 베란다로 나온 아이는 방충망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홍이 아이를 밀어내고 방충망을 닫았다. 프레임 안에서 아이는 오후 내내 울었다. 아이는 밥을 먹지 않았다. 울다가 지쳐서 잠든 아이를 홍이 안아다가 침대에 뉘었다. 홍은 베란다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홍이 저렇게 앉아 조의 집 쪽을 보고 있을 때면, 조는 망원경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망원경으로 훔쳐본 홍의 얼굴은 멍해 보였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늦게 귀가한 남편이 아이와 함께 침대에서 잠들었다. 홍은 소파에 누워 홈쇼핑 채널을 켰다. 홍은 무릎을 세워 쪼그리고 앉아 홈쇼핑을 보다가 물건을 시켰다. 그사이 순간, 순간, 홍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카메라를 설치할 필요가 있었을까. 조는 계속 업데이트되는 홍의 SNS를 보고 픽,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SNS의 홍과 현실의 홍은 달랐다. SNS의 홍은 뽀얗게 반짝이고 매 순간 화보처럼 행복하게 사는 여자였다. 현실의 홍은 연민이 들 만큼 지루하고 진부하고 늙고 평범한 여자였다.

홍은 사람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홈쇼핑 채널을 켜 놓았다. 남편은 입 다물고 있는 시간이 휴식시간이었다. 홍은 굳이 남편과 이야기하지 않고도 하루를 잘 보냈다. 단지 만사가 귀찮고 짜증이 났으며 신경질이 났다. 홍은 아이가 잠들어 있는 시간이 제일 편했다. 하루는 나른하게 시작해서 재미없게 흘러갔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베란다 창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홍에게는 더할 수 없는 위안이었다. 그리고 SNS를 통해 남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 그런데 그 흐름을 뚝, 끊어 놓은 게 공룡이었다. 홍은 베란다 창과 자신의 발가락을 카메라에 담아 SNS에 올렸다.

발밑의 어둠이 아름다운 밤. 추천과 댓글이 달리느라 휴대폰이 웅웅, 어둠 속에서 울었다. 홍은 팔로워들의 댓글을 훑어보았다. 공허했다. 공룡은 어디 갔을까. 홍은 건너 아파트에 차곡차곡 켜진 불빛에 시선을 돌리다가 멈췄다. 홍의 동공이 커졌다. 공룡을 잃고 미친 듯이 울던 아이의 눈이 누구와 닮았는지 생각났다. 낮에 엘리베이터에서 보았던 배달부의 눈이었다. 6년 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홍은 작은 사람을 키워 어른을 만드는 것은 중노동이라는 것을 배웠다. 아이는 끝없이 요구하고 칭얼거렸다. 만사가 귀찮은 홍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아이를 베란다 밖으로 던지는 상상을 간혹 했다. 그러나 상상일 뿐 아이는 홍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조는 새벽에 바이크를 몰고 대로를 질주했다. 야식배달을 하는 것처럼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홍의 자동차를 지나며 예리한 드라이버로 뒷유리창 모서리를 찍었다. 철가방에 드라이버를 집어넣었다. 오비랍토르와 드라이버가 덜컹거렸다. 집에 돌아와 홈쇼핑 채널이 돌아가는 홍의 집을 들여다봤다. 모니터 안에 남편이 등장했다. 남편이 옷을 벗고 소파로 다가갔다. 홍이 벌거벗은 채 남편의 허리에 올라앉아 몸을 흔들었다. 조는 뛰었다. 오빠 싸. 해 봐. 남편의 거친 숨이 문을 넘어왔다. 조는 숨을 헐떡거리다가 침을 뱉었다. 고개를 들었다. 복도 벽에 ‘금연’이라는 붉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어릴 때 주인집 남자가 피우던 담배 연기가 코끝을 스쳤다.

지포 라이터의 열고 닫히는 음이 경쾌했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주인집 남자가 조에게 돈을 내밀었다. “양담배 좀 사 와. 남은 돈으로는 너 맛있는 거 사 먹고. 꼭 길 건너 슈퍼에서 사 와야 한다. 거기 담배가 맛있거든. 알았지?” 담배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주인집 남자는 후했다. 눈을 찡긋거리고 조한테 빨리 다녀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조는 머릿속으로 남은 돈을 샘하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조는 집 밖을 나와 두리번거리다가 가까운 슈퍼로 들어갔다. 집까지 한달음에 뛰어왔을 때 문밖에서 우뚝 멈췄다. “빨리 끝내고 가요. 조 오겠어요.” 엄마의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기분 잡치게 왜 서둘러? 그 녀석 심부름 한두 번 해? 올라와 봐.”

주인집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이를 악문 엄마의 신음이 문을 타고 넘어왔다. “사모님도 눈치가 이상해요. 담배 피운다고 나가서 자꾸 안 들어온다고 내 앞에서 부러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엄마 말이 느릿느릿 이어졌다. 주인집 남자의 숨이 거칠어졌다. 봉지를 들고 있던 조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조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집 밖으로 나온 조는 담배를 한 개비씩 꺼내 짓뭉갰다. 엄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베개 맡에 놓인 수표를 만지작거렸다. 조는 자신이 몇 번이나 담배 심부름을 했었는지 세어 보았다. 후한 심부름값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조는 주인집 남자가 흘리고 간 지포 라이터를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번 심부름부터는 정신없이 달려갔다 왔다. 주인집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고 입맛을 다셨다. 달리기 선수 시킬까 봐요. 엄마가 주인집 남자를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홍이 아이를 카시트에 앉히고 문을 닫았다. 조는 바이크로 홍의 차를 따라갔다. 홍의 차는 마트로 향했다. 홍이 차에서 아이를 내리고 마트로 들어갔다. 쾅 소리와 함께 닫힌 유리문에 서서히 금이 갔다. 조는 행인처럼 천천히 걸어가며 차 유리를 보았다. 금 간 유리로 보이는 차 안은 칠흑처럼 검었다. 조는 문득 목이 말랐다.

“오비랍토르 없잖아. 안 팔잖아. 없어. 엄마. 없다고. 내 공룡 데려와. 엄마….” 아이가 홍의 손에 잡혀 질질 끌려오며 소리 질렀다. 홍이 진땀을 흘리며 아이의 두 팔을 잡아끌었다. “제발 떼 좀 그만 부려. 다 떨어졌다잖아. 엄마가 어떻게 하겠어. 정말, 아들 하나 키우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내가 너 때문에 못 살겠어. 미치겠어.” 못처럼 날카로운 홍의 목소리가 조의 귀를 찔렀다. “내 공룡. 내 공룡 데려오란 말이야. 난 엄마보다 공룡이 백배는 더 좋아.” 아이도 지지 않고 악을 썼다. “유리가 깨졌어. 이것 봐. 차 유리가.” 홍이 아이의 손을 놓고 말했다. 아이는 바닥을 구르면서 울었다. 홍이 휴대폰을 꺼내 유리창을 찍었다. 잠깐 사이, 홍은 SNS에 사진과 글을 남겼다. 누군가 내 차를 난도질했어요. 어떻게 하죠?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지만, 홍은 남편에게 전화했다. 아이가 우는 소리 때문에 한쪽 귀를 막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엄마 CCTV 확인해 봐야겠어. 누가 그랬는지 잡히기만 해 봐. 아, 짜증나는 날이네. 진짜. 너 여기 얌전히 있어.” 홍이 아이를 앞자리에 밀어 넣고 달려갔다. 아이는 주차장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조는 카메라를 피해 앞쪽으로 다가가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 “어? 짜장면 아저씨네.”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말했다. 아이는 차 유리를 내렸다. 아이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었다. 얼마나 힘껏 울었는지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홍에게는 2년 동안 없는 사람이었던 조가, 아이에게는 있는 사람이었다. “공룡을 찾니? 오비랍토르.” “어?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오비랍토르 이름을 부르면서 울었잖아.” 아이가 풀이 죽어 대답했다. “엄마가 공룡이 집을 나갔대요. 내가 말을 안 들어서요.” 아이는 울상을 지었다. “엄마는 거짓말을 하는 거야. 오비랍토르는 네가 말을 안 들어서 집을 나간 게 아니야. 이건 비밀이야. 엄마한테 절대 말하면 안 돼. 내가 오비랍토르를 찾게 도와줄게.” 아이는 홍이 사라진 곳을 향해 눈을 돌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홍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던지듯 내려놓고 카센터로 갔다. 자동차를 맡긴 홍은 택시를 타고 아파트 관리실로 달려갔다. 마트에서 폐쇄회로를 확인했을 때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었다. 관리실 폐쇄회로를 본 홍은 뒷목을 잡았다. 홍이 세워 두었던 주차구역에는 폐쇄회로가 없었다. 누구였을까. 홍은 나른한 일상을 흩트려 놓은 사람을 생각해 내려 애썼다. 자주 물건을 배송하지만 문 앞에서 택배를 빼앗듯이 받고 돌려보내던 택배 기사와 피자집 중국집 배달부들, 그 밖에 급할 때만 들르는 골목 슈퍼의 주인, 몇 명이 함께 교대하는 경비들. 기억할 가치를 두지 않는 말 그대로 없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홍의 일상이라는 것이, 벨리댄스를 추고 집에 와서 청소하고 낮잠을 자는 게 고작이었다. 그 사이 순간순간 SNS를 하고. 홍은 입맛이 없어서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았다. 사람 눈을 쳐다보는 것도 귀찮아서 상대를 볼 때 멍한 눈으로 시선을 피해서 봤다. 블랙박스 안 달렸어요? 사각지대이고, 애매한 곳이라 주변에 세워진 차가 없으니…. 의도적인 것 같은데, 원한 살 만한 일은 없죠? 남의 차를 긁었다던가. 관리실 직원의 말에 홍은 머리를 긁적였다. 홍은 흙빛 눈이 떠올랐다. 어떻게 다른 CCTV라도 보실래요? 의심스러운 사람 있는지요. 관리실 직원이 물었다. 아니요. 다친 사람도 없고요. 그냥, 우리가 갈아 끼워야죠. 뭐, 잡겠다고 나서도 잡히는 것도 아니고요. 홍은 박카스를 사서 관리실에 주고 돌아왔다.

조는 검은색 우의를 입고 마스크를 꼈다. 장마는 한 달째 계속되었다. 홍이 아이를 보내면서 짜증내는 소리가 들렸다. 홍은 아이의 걸음이 느리다고 채근했다. 장화를 신고 우산을 든 아이가 홍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조는 아이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오늘이야.” 조가 소곤거렸다. 아이는 홍을 흘깃거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우산에 그려진 캐릭터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우산 똑바로 들어. 뒤돌아선 홍의 목소리가 빗속에 섞여들었다. 홍은 화를 내면서도 아이의 우산을 카메라로 찍었다. 홍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앞서 걸었다. 어린이집 늦었어. 엄마도 빨리 가 봐야 한단 말이야. 조는 양쪽 귀가 못에 찔리는 것 같아 귀를 막았다. 조는 화내던 엄마를 보듯 홍의 뒤태를 노려봤다. 침대 밑 상자를 열어본 엄마는 조를 흘겨봤다. “그냥, 잠깐 보고 주려고요.” 조는 두 손을 비비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엄마는 주인집 아들이 아끼는 게임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러면 안 돼. 이거 잃어버렸다고 집안을 발칵 뒤집었었어. 우리 방 뒤진다는 걸 주인집 아저씨가 간신히 말렸어.” 날카로운 엄마의 목소리에 조는 몸을 움츠렸다. 몸을 못으로 긁는 것 같았다. “이건 그냥, 놀이예요. 엄마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 물건을 잠깐 보관했다가 화 풀리면 돌려주려고요. 골탕 좀 먹으라고요.” 엄마는 베개 맡에 놓인 수표를 펼 때처럼 묘한 만족감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도 이러면 안 돼.” 엄마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부드러워졌다. 주인집 아저씨의 지포 라이터를 들어 불을 켜 보던 엄마는 그것을 내려놓았다.

주인집 아저씨의 지포 라이터를 잃어버렸다고 말한 것은 주인집 아줌마였다. 엄마와 주인집 아저씨는 의뭉스럽게 입을 꼭 다물었다. 누가 훔쳤는지 내 손에 잡히면 반 죽여 놓을 거야. 아주. 주인집 아줌마가 엄마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주인집 아줌마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엄마를 괴롭혔다. “그래, 이건 잠깐 보관하는 것이구나. 돌려주면 돼.” 엄마는 주인집 아줌마의 반지를 집어 들었다. 집 한 채값이라고 자랑하던 것이었다. 주인집 아줌마는 엄마를 자주 괴롭혀서 큰 걸 집어 와야 화가 풀릴 것 같았다. 반지를 손가락에 껴 보는 엄마의 얼굴이 환했다. 엄마와 반지가 갑자기 사라져서, 조는 주인집 아줌마한테 반지를 돌려줄 수 없었다. 조의 놀이도 끝이 났다.

조는 장갑 낀 손으로 도어락을 눌렀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집 지키는 개처럼 공룡 피규어들이 입을 쩍쩍 벌리고 있었다. 조는 설치했던 장비를 거둬들여 철가방에 넣었다. 베란다로 고개를 돌렸다. 에어컨 실외기 쪽 창은 열려 있었다. 조는 침대 밑 상자를 찾아 열었다.

조의 엄마가 떠난 후, 주인집 여자는 침대 밑 상자를 발견했다. “도둑년. 경찰에 신고해서 콩밥을 먹여야지.” 주인집 여자는 조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조는 주인집 여자한테 발길질을 당해 걸레처럼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주인집 여자는 조와 엄마가 머물던 방의 살림살이를 헤집었다. 주인집 남자는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엄마가 아니라 내가 다 훔쳤어요.” 조의 말에 주인집 여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꼴에 저 버리고 도망간 년도 엄마라고 싸고돌긴. 내가 모를 줄 알아? 좋아, 그럼 반지 내놔 봐.” 주인집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아줌마가 엄마한테 침 뱉은 날 변기에 넣고 똥하고 내렸어요. 그리고 지포 라이터는 훔친 거 아니에요. 아저씨가 우리 집에….”

조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주인집 남자가 지포 라이터를 쥔 손으로 조의 뺨을 후려쳤다. 도둑놈. 주인집 남자는 욕을 퍼부으면서 조를 때렸다. 뭐라는 거야? 주인집 여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양 볼이 떨어질 듯 뜨거워졌을 때 게임기가 콧등으로 날아왔다. 게임기를 던진 주인집 아들의 눈에 야비한 웃음이 흘렀다. 주인집 여자는 엄마가 조를 찾으러 올까 봐 내쫓지 않고 궂은일을 시켰다. 주인집 아들은 도둑놈 새끼, 라고 학교에 소문을 냈다. 맞고 또 맞고. 학교 아이들이 반지 값만큼 조를 때렸다. 조는 밤마다 주인집 아들의 혀를 뽑아 씹어 먹는 상상을 하며 자랐다.

조는 상자에서 실꾸리를 꺼냈다. 가느다란 검은 실이었다. 공룡 목에 실을 감아 묶고 실 길이를 늘였다. 실꾸리에 실을 감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정돈해 침대 밑에 넣었다. 철가방에서 홍의 머리카락을 꺼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요긴한 단서였다. 공룡의 목 부분 실에 머리카락을 돌돌 말았다. 공룡을 들고 베란다로 갔다. 실외기는 베란다 안 바닥에 놓여 있었다. 실외기가 설치된 창은 반쯤 막힌 채였다. 에어컨을 돌리려면 실외기의 열기를 내보내려고 창문을 열어 두어야 했을 것이다. 에어컨을 켜지 않을 때는 안전을 위해 창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게으른 홍은 매번 여닫기 번거로워 늘 열어 두는 듯했다. 아이가 실외기 위에 올라가 난간에 발을 내민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었다. 낡고 얇은 방충망은 세게 밀면 찢어질 것 같았다. 비가 내려 창틀도 난간도 미끄러웠다. 조는 실을 놓칠 것 같아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공룡을 밖으로 향하게 하고 실을 난간에 묶었다. 공룡의 무게 때문에 실은 아래로 미끄러져 난간 끝에 매달렸다.

아이의 캐릭터 우산이 돌아오는 게 보였다. 오전 내 내리던 비가 오후까지 퍼부었다. 아이는 잠시 우산을 젖히고 자신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망원경 안에서 빙긋 웃는 아이의 눈이 흐릿하게 보였다. 참 착하구나, 착한 아이는 어른 말을 잘 듣는 거란다. 엄마한테 아저씨 이야기하면 안 된다. 알았지? 아이는 칭찬을 하자 함빡 웃었었다. 홍이 아이를 채근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베란다로 나왔다. 아이는 실외기에 올라갔다. 아이가 얇은 방충망을 열었다. 아이는 실에 매달린 공룡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아이는 실을 잡아채 용케 공룡을 끌어 올렸다. 아이는 미끄러운 난간을 잡고 몸을 숙였다. 아이의 손에 공룡이 잡혔다. 아이의 머리카락이 비에 젖었다. 아이가 공룡 목을 잡고 씩, 웃었다.

홍은 아이를 건네주던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머리를 감았다. “아이 아빠는 아이를 가진 것만 알지 낳았는지는 몰라요. 서류는 가짜니까, 본인만 알고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쥐도 새도 몰라야 합니다.” 머리를 헹궈 내며 홍은 엘리베이터에서 보았던 남자의 눈을 아이의 눈과 비교해 보았다. “애 엄마는 고등학생이었어요. 아이 아빠라고 해봐야 노는 녀석이었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경우 찾으러 올 일은 절대 없거든요.”

홍은 배달부의 나이를 가늠하려고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좀처럼 얼굴은 떠오르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맡았던 찌든 음식 냄새만 생각났다. 흙빛으로 빛나던 눈과 그 눈 속에 들어 있던 그 무엇. 홍은 배달부가 언제부터 보였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홍이 차에서 내릴 때 배달부는 로비에서 나오던 길이었다. 스치고 지나갔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배달부는 홍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다. 홍은 어깻죽지에 소름이 돋았다. 아이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을까. 홍은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매고 휴대폰을 찾았다. 중국집에 배달을 시켜 배달부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배달부? 홍은 수건에 감긴 머리를 잡아 뜯었다. 홍은 자신의 SNS에 올렸던 사진을 넘기면서 살폈다. 창문을 찍었던 사진에 눈길이 멈췄다. 누군가 베란다 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홍은 고개를 들고 사진에 찍혔던 집을 건너다보았다. 누군가 홍의 집을 보고 있었다. 아이를 찾으러 왔을까. 홍은 눈에 힘을 주고 망원경을 든 사람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홍은 망원경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홍의 눈에 난간에 올라가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의 작은 손에 공룡이 들려 있었다.

홍의 지갑이 없어졌던 날, 홍은 정신이 없었다. 홍은 휴대폰에 꽂아 둔 카드를 찾겠다고 집을 더듬고 다녔다. 아이가 식탁 위에 공룡을 올려 두었다. 아이는 종종 공룡한테 짜장면을 먹였다. 그러고 나면 아이는 공룡을 목욕시키겠다고 욕실을 거품 천지로 만들어 놨다. “식탁에서 공룡 치워. 또 짜장면 그릇에 공룡을 처넣으려고 그러지? 너 짜장면 못 먹게 할 거야. 홍이 아이한테 소리쳤다.”

홍은 아이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속이 터졌다. 이성을 잃고 아이한테 소리 지르고 나면 자괴감에 가슴이 답답했다. 나른한 일상과 남편의 무관심까지 모두 아이 탓 같았다. 홍은 아이를 향해 몇 번 더 소리를 질렀다. 얌전히 앉아 짜장면 먹으라고. 옷에 흘리지 말라고. 홍은 휴대폰을 아이가 숨긴 게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이는 공룡 목을 꽉 쥐고 바닥에 내려놓지 않았다. 배달부는 의뭉스럽게 서서 아이와 공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달부가 고개를 기울여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홍은 불안했다. 홍은 조급한 마음에 소파 구석과 텔레비전을 올려둔 서랍을 뒤졌다. 홍은 자신이 불안한 게 배달부 때문인지, 늘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놓쳐서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홍은 주방 서랍에서 휴대폰을 발견했다. 홍은 자신도 모르게 SNS를 눌러 확인하며 안도했다. 그러다 우두커니 선 배달부와 눈이 마주쳤다. 카드를 받아 드는 배달부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경찰에 신고하세요. 우리 직원은 훔치지 않았으니까, 경찰에서 가려 주겠죠.” 중국집 사장이 큰소리쳤다. 홍은 사장의 거침없는 목소리를 이웃이 들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오후 내내 요동치던 가슴이 터질 듯이 방망이질했다. 그럴 생각까진 없고요. 홍이 사장을 만류했다. 홍은 경찰이 오고, 경찰이 집을 뒤지고,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작성하는 과정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카드사에 일일이 전화해 카드는 모두 정지된 상태였다. 지갑 속에 아이의 입양 당시 사진이 없었다면, 지갑을 포기했을 것이다. 냉장고 속에 있을지 몰라요. 많이들 그러거든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 홍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순해져서 냉장고를 열어봤다. 경찰, 이라는 단어가 홍에게 오히려 위협적이었다. 사장은 쪼그려 앉아 신을 고쳐 신었다. 부엌에서 돌아온 홍과 남편은 지갑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장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덥네요. 사장은 손부채질을 하고 파카 지퍼를 내렸다. 사장의 얼굴은 붉게 상기 돼 있었다. 제가 찾아볼게요. 사장이 신발장을 열고 단숨에 지갑을 찾아주었다. 홍은 사장한테 사과했다. 제가 이 밤에 여기까지 온 이유는, 계속 저희 집을 이용해 달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혹시 이번 일로 단골을 잃을까 봐 그럽니다. 2년 단골 아닙니까. 부탁하러 왔다는 사람의 말투가 건달처럼 거칠었다. 홍은 큰 죄를 저지른 것 같아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빌고 싶은 기분이었다.

“네가 여기다 넣어 놓은 거 아니야? 지갑이 왜 여기 들어가 있어?” 중국집 사장이 돌아간 후 홍은 아이를 세워 놓고 물었다. 이 집에서 지갑을 옮길 손은 아이밖에 없었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애는 잡고 그래. 아무래도 저 사람 손이 탄 게 아닐까 싶은데.” 홍의 남편은 아이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지? 홍은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의 무례함이 괘씸했다. 홍은 여봐란듯이 주말에 그 중국집에 배달을 시켰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내 아이를 훔쳐보다니. 홍은 속이 후련했다. 홍은 폭로하고 야유할 수 있는 또 다른 홍이 SNS에 있다는 것이, 무슨 짓을 해도 그 안에서 지켜지는 자신이 있다는 것이, 몇천 명의 친구들이 덮어 놓고 편들어 주고 나서서 복수해 줄 수 있다는 것이, 든든했다.

조는 엄마가 떠나고 난 후의 5일을 잊을 수 없다. 주인집 여자는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에 조를 가두고 굶겼다. 첫째 날 조는 오기로 참았다. 어둠을 이기려고 숫자를 셌다. 엄마가 오겠지. 둘째 날은 나가기만 하면 주인집 식구들을 다 죽여야지, 하는 마음으로 참았다. 엄마가 올 거야. 셋째 날 허기에 쓰러졌다. 엄마가 구해 줄 거야. 자신의 오줌을 받아 마셨다. 넷째 날부터 오지 않는 엄마가 미웠다. 살려 달라고 잘못했다고 문에 대고 빌었다. 다섯째 날, 조의 영혼이 조각조각 나뉘었다. 지하실의 어둠이 증오로 이글거리는 조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이 감기는 순간 문이 열렸다. 검은 실루엣이 빛 속에 서 있었다.

홍의 비명이 고층 건물 사이에 공명처럼 울렸다. 조는 그 순간의 홍을 찍었다. 자식의 옷깃을 잡으려는 모습이 아파트 건너에서 볼 때는 미는 것처럼 보였다. 조는 그 사진을 홍의 SNS 게시판에 사진과 함께 올렸다.

공주님의 비정한 모정.

조는 교회에 다니면서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 잊을 수 있었고 잊었다고 생각했다. 조가 잠가 둔 지하실을 홍이 열지 않았다면. 홍의 절규 속에서, 가느다란 실에 매달린 홍의 세계가 하나씩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는 듣기 싫은(혹은 듣고 싶은) 엄마의 목소리 같아서 귀를 막았다.

홍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삶을 통째로 도둑맞은 조가 그랬던 것처럼

제8회 월간토마토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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