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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2호] 제8회 월간토마토문학상_알 속에 들어앉은 사람들
박은성 작가는 진도 사람이다. 고등학교까지 진도에서 다녔다. 다리가 놓였지만 그녀는 그곳을 ‘섬’이라고 했다. 소설을 쓰려는 마음 하나로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까지 왔다고 한다. 그리고 먼 길을 거쳐 지금도 계속 소설을 쓰고 있다. 하나를 위한 마음. 소설 하나만 생각하고 진도에서 집을 떠나, 두 개의 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했으며, 여전히 글을 읽고 쓰는 삶을 산다. 밤 11시부터 새벽 3시까지. 그 시간에 가장 작업이 잘되어, 매일 같은 시간에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잘 써질 때도 있고, 아무것도 못 쓸 때도 많다. 하지만 한결같이 그 시간은 지킨다. 그리고 아침 7시 반에 일어나 두 아이를 챙겨 학교에 보낸다.
소설이 있기 전에 소설가적인 삶이 있다는 걸,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한 번 더 깨닫는다.
글 쓰는 시간이 밤 11시부터 새벽 3시까지예요. 그때 집중할 수 있고 영감이 찾아와요. 그러고 아침에 일어나면 좀 멍해요. 그때 전화를 주셨어요. 최종심에 올랐다고 했을 때는 오후라서 반응을 적극적으로 했고요. 정말 기뻤거든요.
2014년에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되고 2015년까지 작품 발표를 하다가, 2016년 장편 준비를 하기 시작했어요. 지면 얻기가 너무 힘들어서 저 자신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죠. 그런데 여기서 소식이 오니까 굉장히 마음이 놓이면서 그래도 내 글을 알아주는 곳이 있구나 했어요. 그런 안도감이 얼마나 큰지 몰라요. 등단 작가이지만, 늘 불안감에 시달려요. 그래서 이번 상이 너무너무 감사해요.
너무 피곤한 날은 넘어가기도 하죠. 작품은 뭔가 느낌이 올 때가 있어요. 거기에 꽂히면, 그걸 생각 하면서 밤에 써요. 아침에 잘 써지는 사람이 있고 밤에 잘 써지는 사람이 있어요. 그때 나오는 문장은 질이 달라요. 아침 7시 반에 일어나 아이들 챙기고, 오후에는 일을 하죠.
처음에 명지전문대를 들어갔고요, 2005년에 서울예대를 들어갔어요. 결혼하고 신혼 때 입학했는데 학교 다니는 동안 두 아이를 낳고 2009년에야 졸업을 할 수 있었어요. 서울예대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학교 내에서 경쟁이 치열해요. 열심히 하는 걸 거기서 배웠죠. 거기 학생들은 입학한 순간부터 잠을 안 자더라고요. 그 당시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가 많았고요. 이렇게 부지런히 해야 하는구나를 거기서 배웠어요. 그 치열함이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 합평 때 들은 말을 생각하면 20년이 지났는데도 가슴이 찢어지네요.(웃음)
실제로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배달부가 배달을 왔는데 지갑이 없어진 거예요. 찾다가 가게에 전화를 했더니, 사장님이 이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는 카드를 정지했어요. 그런데 밤에 사장님이 쫓아오셨어요. 큰소리를 막 치시는데 무서웠어요. 보통 지갑을 냉장고에 많이 넣는다고 가 보라고 해서 냉장고에 갔다 왔더니 사장님이 신발장에서 지갑을 꺼내는 거예요. 그래서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했죠.
그전에는 배달하시는 분들이 얼굴 가리고 다니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없었는데, 그 일 있고는 얼굴을 가리고 계신 분들을 보면 뭔가 모르는 공포가 느껴졌어요. 자기에게 모욕을 준 일로 누군가 내게 위해를 가해도, 누가 가해자인지 모를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훔친다. 흠집을 낸다. 이런 거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죠. 초고는 그런 상황만 있었는데 차츰 심화되었죠. 남의 인생을 의도하지 않게 망가뜨렸을 때 그 사람은 어떤 복수를 할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등단 이후 SNS를 하는데 그 속에서는 그런 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요. 이 사람 하나가 다른 사람 하나를 공격하는 건 일도 아니에요. 팔로워가 많은 사람이 누군가를 공격한다, 그러면 팔로워들이 거기에 무조건 따라요.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폭력들을 행하고 있다는 거, 그런 것들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홍’ 같은 사람, ‘조’ 같은 사람은 도시 어딘가에 있어요. 아파트에도 홍들이 있어요. 자기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게 현대사회죠. 배달원의 얼굴을 인식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존재를 모르는 거고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존재를 인식하지 않아요. 그런 생각을 점점 확장을 시킨 거죠.
단편소설은 한 번에 써서 완성되는 게 없어요. 고치는 과정에서 자기 생각이나 자신의 소설관 같은 게 들어가며 80매지만 80매가 아닌 인생을 다루는 거죠.
제가 다닌 고등학교가 환경이 어려운 친구들이 들어가는 곳이었어요. 글 쓰는 걸 좋아했지만 작가가 되리라 생각 못했죠. 신경숙의 《외딴방》을 읽고 작가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어떤 선생님이 제게 일기 쓰기를 제안했고 그때부터 매일 일기를 썼어요. 도시 올라와서 재수를 하면서 힘든 상황에서도 작가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놓지 않았어요. 20대 초반에 신경숙 작가의 사인을 받고 정말 좋아했죠.
힘든 상황에도 그 생각만 했어요. 그게 제 생각을 끌어왔어요. 신경숙 작가가 다시 글을 썼으면 좋겠어요. 표절 문제가 있었지만 그걸 극복할 수 있는 것도 글이라고 생각해요.
여기 내려오면서 마음을 다지면서 왔어요. 두 번째 등단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 등단했을 때는 3일 동안 웃으면서 방방 뛰어다녔죠. 다시 진중함을 찾는 데 3년이 걸렸어요.
월간토마토 건물 앞에 와서 정말 좋은 거예요. 건물이 너무 좋고요. 작은 지방 월간지라고 했는데, ‘오, 이 건물이 다 토마토야. 엄청 크고 이쁘다’ 하고 감탄했어요. 오늘 온다고 나름 신경 썼는데 너무 과하지 않나 걱정도 했고요. 사람들이 쳐다보고. 꼭 혼자 결혼식 가는 사람처럼 말이죠.(웃음)
알아요. 엄마가 글을 쓰는 걸 알죠. 요즘 애들은 엄마가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안 좋아해요. 소설집을 아직 낸 게 아니니까, 신춘문예 당선집에 실린 소설을 보여 주면서, ‘여기 봐 엄마 있잖아’ 했어요.(웃음)
입학하고 1년 있다 첫 아이가 생겼고, 2007년에 낳았죠. 2009년에 둘째를 낳았고요. 중간에 휴학했어요. 아이를 친정 엄마가 봐 주었고요. 두 아이를 키우는 4년 동안 글을 못 썼어요. 그러다 2011년에 다시 시작해서 2014년에 등단했죠. 2013년에 지쳐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생활을 다 꾸리면서 글을 쓰는 일이 극한이긴 해요. 몸이 많이 상하죠. 공부 시작해서 글쓰기가 제일 절정에 올랐던 게 2007년이에요. 그때 《문학과지성사》 신인문학상 본심까지 올라갔는데, 거기서 절정이 멈췄어요. 그해에 아이를 낳았으니까요. 거기서 조금만 더했으면 되었을 텐데, 출산과 육아로 멈추게 되었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해서 등단하기까지 또 3년이 걸린 거죠.
월간토마토와 인연을 맺지 않았으면 ‘대전’이란 곳이 제 인식 안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 같아요. 월간토마토로 인해서 대전까지 인식이 넓어졌어요. 월간토마토 하면 대전이 떠오를 거 같아요. 힘든 길을 가시는데, 이렇게 좋은 월간지, 예쁜 월간지가 10년이나 지속될 수 있다는 건 아직은 글을 읽고 이 소도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 아니겠어요. 그 에너지로 20년, 30년 이어졌으면 좋겠고요. 작은 문학상이 점점 커져서 ‘월간토마토문학상’ 하면 대전이 떠오를 수 있게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