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21호] 천지는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우연은 육체, 그리고 시간과 더불어 인간 존재와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조건이다. 우리는 육체라는 조건을 떠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시간에 매인 존재들이다. 육체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늙고, 쪼그라들고, 마침내 흙으로, 재와 먼지로 분해되어 간다. 육체는, 오늘날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들어왔다. 성별도 바꿀 수 있고, 노화를 늦추기 위한 온갖 피트니스 운동이나 미용시술들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완벽하게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연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연의 맹목성과 불가해성은 세계와 자신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완벽하게 벗어나 있다. 우연한 생 혹은 생의 우연적 본성, 이것을 이해하지 않고는 삶을 깊이 헤아릴 수 없다.
얼마전 하바 요시타카라는 일본의 북디렉터가 쓴 《책따위 안 읽어도 좋지만》이라는 책을 읽던 중 한 챕터에서 읽기를 멈추었다. 미국에서 출간된 《파이널 엑시트》라는 책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그 책은 다양하기 짝이 없는 현대인의 죽음 양상을 다룬 책인 모양이다. 나도 가끔 어렴풋이 질문을 던져 보곤 하던 문제였는데 라고씨는 작정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책을 썼다.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 예를 들면 요즘 한국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는 원인, 즉 사인이 몇 가지나 될 것 같은가? 한국과 정확하게 일치하진 않겠지만 미국의 경우 사인이 대략 3천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그 책에 따르면 1700년 무렵에는 사인이 고작 100여 가지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3세기 사이에 사인이 서른 배가 넘게 증가한 것이다.
사인이 서른 배 늘어났다는 건 사회 구조와 문명, 그리고 오락거리를 포함한 인간과 삶을 둘러싼 잠재적 위협거리가 적어도 서른 배 이상 증가했다는 얘기다. 하긴 잠깐만 생각해 봐도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오늘날 자동차나 오토바이, 비행기 사고나 현대에 생겨난 온갖 종류의 스포츠 활동이 죽음의 원인이 된다. 심지어 이 책에서 말하듯 “아이스크림, 키 높이 신발, 딸꾹질, 다마고치, 미팅 사이트, 재채기, 결혼식, 볼링, 미인 콘테스트, 라텍스 알레르기처럼 언뜻 아무런 맥락도 없는 이것들이 전부 사람이 죽는 원인이 된다.” 하긴 성형천국인 한국에선 성형수술 하다가 사망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일어나지 않는가!
그런데 그 책에서 특히 흥미를 끈 사인은 골프장에서 벼락을 맞아 죽는 사건들이다. 미국 골프장에서는 매년 평균 여섯 명이 골프 경기를 관전하던 중에 벼락에 맞아 사망한다. 최근 5년 사이에 라운딩 중에 사망한 사람이 자그마치 3,120명이나 된다는 사실엔 정말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미국은 골프가 대중화되어 있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골프장을 찾는 탓에 골프장의 드넓은 그린 위에서 벼락에 맞을 확률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82년엔 한 남자가 자신의 샷에 화가 난 나머지 클럽을 집어 던졌는데 그게 하필이면 나무에 명중해서 두동강 났고, 그 동강난 클럽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남자의 목 정맥을 절단시켜 남자를 죽이고 말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국에선 이런 사건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바로 얼마 전에 나는 한 지인에게서 비슷한, 그러나 좀 슬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읽다가 멈춘 것도 바로 그 이야기가 불현듯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 지방 대도시에서 유명한 고기집을 경영하는 한 중년 부부가 있었다. 그 잘나가는 고기집을 동분서주하며 책임지는 것은 거의 부인 몫이었고, 남편은 사실상 한량처럼 빈둥거리기만 했다 한다. 남자로선 팔자가 늘어진 셈이었고, 부인으로선 온갖 스트레스와 과로에 시달리면서 가게에 매인 채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내며 그저 가게가 잘 되는 걸로 위안을 삼으며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가게를 쉬는 어느 날, 부인은 모처럼 골프장에 나갔고 하필이면 그 날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폭우는 아니었던 탓에 우산을 쓰고 라운딩을 했던 모양인데, 무정한 벼락이 나무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닌 하필이면 그 부인의 우산을 향해 내리꽂혔다. 즉사.
벼락은 자신이 쓰러뜨릴 대상을 도덕적 숙고와 판단 끝에 선택하지 않는다. 그냥 아무것에나, 아무나에게 죽음의 백색광선을 선사한다. 물론 골프장에서 벼락을 맞는 일은 특히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 드넓은 그린 위를 누빌 때 일어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때문에 굳이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 위험한 그린 위를 돌아다닌 그녀의 부주의와 무신경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뭔가 찜찜함이 남는다. 행복도 불행도, 재난과 사고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사고를 신의 뜻으로 돌리기 좋아하는 목사님들은 이 사건조차도 신의 뜻이며, 이승의 고생을 줄여주고 좀 더 빨리 천국으로 데려가려는 오묘하고 깊은 신의 뜻으로 해석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만일 그 부인이 아닌 남편이 사건의 희생자였다면, 부인을 개고생시킨 죄로 벌받은 것이라고 할 터이고) 그러나 그런 ‘해석’ 은 모든 사건사고에 어떤 합리적인 인과관계나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붙이려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습관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믿는 나로서는 그 사건은 그저 ‘불행한 우연’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행운도 오고 불행도 찾아온다. 행운과 불운이 오고가는 것을 우리 인간으로선 예견할 수도 없고 짐작할 수도 없다. 그저 ‘겪는 수밖에’ 없다.
행운도, 불운도, 우리는 그저 겪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자유롭게 제멋대로 진동하며 날아다니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들이 우연히 충돌하듯이 벼락을 감춘 구름들과 골프장 위를 걷는 한 인간 사이처럼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두 사건의 계열이 만나 부딪치는 사건, 즉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런 불가해한 우연이 한 인간의 생을 속수무책으로 끝장낼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아연실색하곤 한다.
우리 실존과 생의 적나라한 진실이 너무나 비도덕적, 아니 반도적적이고 또 무정하고 잔인하다는 진실 앞에서 우리는 무력감과 분노를 느낀다. 인과응보니, 신상필벌이니 하는 인간이 만든 그럴듯한 도덕적 계율은 우주적 진리의 냉혹함 앞에선 굳게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이니, 실존의 유일성이니 하는 거창한 철학적 담론조차도 그 순간엔 한갓 헛소리에 불과했다.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문득 마음 속이 헛헛해졌다. 인정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우연의 맹목성이 느꺼웠던 탓이다. 그리고 그 우연이 한 순간 나 자신의 목숨도 박탈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기에, 내 존재와 내 생이 불가해한 우연의 포로일 뿐이라는 생각에 어떤 참담함도 느껴졌던 탓이다. 아마도 우리 인간은 이런 우연의 맹목성과 거기에 포획되어 있는 인간 운명의 참담함을 견디지 못해 신이며, 운명이며 하는 허구를 지어냈는지도 모른다. 일찍이 노자는 이 잔혹한 진리를 냉철하게 묘사한 바 있다.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天地不仁以萬物爲蒭狗
- 노자 <도덕경> 제3장.
노자의 문장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씁쓸하지만, 노자는 담담하고 초연하다. 오히려 그 진리를 삶의 자양분으로 삼아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무위자연이다. 억지 논리, 억지 이유를 갖다 붙이지 않고 담담하고 용감하게 생과 우연의 맹목성을 받아들이기. 행운이든 불운이든, 오버하여 실력으로 착각하거나 엉뚱한 탓으로 돌리지 않기. 아무 것도 아닌 자아를 부풀려 마치 자신이 우주와 맞먹는 존재인 줄 아는 착각과 과대망상에 빠지지 않기.
생의 진리인 우연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삶에 겸손할 수 있다. 우연은 삶의 불가해함과 신비의 원천이다. 그것은 불행을 내려주기도 하지만 또한 예기치 않은 큰 행복을 선물하기도 한다. 때문에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내일과 또 다른 내일을 기다리는 맛도 있는 것이다. 위대한 노력도 때로는 달콤한 행운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 반면 게으름과 실수, 절망 속에서 고통 받을 때 예기치 않은 거대한 행운이 우리에게 살짝 윙크할 때가 있다. 우연이 지배하는 삶은 이토록 오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