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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1호] 문장의 뒷골목_우리는 커서 재미있었지
나는 커서 눈 밑의 반점
(…)
나는 커서 잠이 깼을 때
나는 커서 죽은 지 6년 된 굴참나무
나는 커서 밑동에서 자라난 독버섯
나는 커서 방문을 열고 나갔지
(…)
나는 커서 눈을 감고 생각했지
나는 커서 까만 털에 붙어사는 이상한 벌레
나는 커서 초가 꽂혀 있는 조그만 케이크
나는 커서 천 번도 넘게 맞춰본 퍼즐
나는 커서 참 재미있었지
나는 커서 알게 되었지
나는 커서 사라진 토끼
(김현서, 〈나는 커서〉 부분, 《나는 커서》, 문학동네, 2016, 30쪽)
구례 화엄사의 신록에 눈이 시었다. 절 마당에 비질 자국이 선명한데, 그 위로 붉은 꽂받침이 떨어져 있다. 꽃잎마저 사라지고, 가느다란 꽃자리가 환했던 시간을 대신 말해 준다. 일주일 사이 갑작스레 푸르러지기 시작한 계절이 아직은 낯설다. 그렇게 쑥쑥 커 가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건 푸른 잎사귀만이 아니다. 삶이 그렇게 경각에 따라 달라지는데 마음만 더디게 제자리라 낭패를 본 일이 어디 한두 번이랴.
시집 《나는 커서》에 실린 김현서의 시들은 시시때때로 그 모습을 바꿔 현현하는 삶의 순간들을, “시시각각 표정을 바꾸는(〈빈 꽃병〉)” 나침반의 바늘 끝처럼 예리하게 포착해 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 한 편은 한 존재가 빠른 속도로 다른 존재로 변해 가는 변신의 기록에 가깝다. 아무리 무거운 것도 가볍게 팔락이며 변신을 시도한다. “나는 내 책에 새긴 검은 문신을 긁어모아/고사리처럼 말려 손잡이에 걸어놓는다(〈타투 아티스트〉)” 무거운 문장조차, ‘검은 문신’이 되었다가 가볍게 말린 ‘고사리’로 돌변한다. 이 사소한 변주가 생활의 무거움을 가볍게 한다. “어둠 속에서 거미들이 텀블링을(〈어느 새〉)” 하는가 하면, “어질어질한 4월의 바람을/차곡차곡(〈일요일〉)” 개키기도 하고, “알맞게 구워진 당신의 웃음(〈바닥에 깔린 스테이크〉)”을 참 맛있게 썰어 먹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한 편의 동화에 가깝다.
시 〈나는 커서〉도 그런 동화적 생기가 가득하다. 성장은 변신하는 일. 점점 다른 것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연두빛 잎사귀가 피어나는 순간과 같이, 이 시에는 설렘이 가득하다. 나는 커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눈 밑의 반점, 선물 상자, 빨강 머리 소녀, 죽은 굴참나무, 독버섯, 별똥별. 그렇게 하나씩 옷을 벗고, 존재는 방 안을 벗어난다. 방문을 열고 나가, 또 다른 존재가 된다. 그렇게 점점점, 서서히 사라져 간다. “나는 커서 알게 되었지/나는 커서 사라진 토끼.”
화엄사 나무마루 위에서 절을 하며 생각해 본다. 우주의 순리,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내 마음과 몸에 대해서. 우리는 그렇게 하루하루 다르게 커 가는 우주의 일부로, 사라지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어떤 변신이 두려울까. 그러니 우리는 커서 참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