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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1호] 여성주의강좌_그때 그녀가 거기 있었네
여성주의강좌〈젠더와 민주주의〉를 듣다
대전여민회 주최 여성주의강좌 〈젠더와 민주주의〉가 2017년 4월 7일부터 21일까지 매주 금요일 오후 7시 대전 NGO 센터 ‘모 여서 100’에서 열렸다. 모두 세 번에 걸쳐 진행된 이번 강좌는 여성인권에 대한 관심을 대변하듯 매회 강연장이 수강생으로 가득 찼다.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이슈까지 지난 2016년은 각종 페미니즘 관련 도서가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는 등 젠더 문제가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확산되었다.2017년 4월 7일에 열린 1강 〈여성 시민권 획득의 역사〉는 한국 여성 인권 성장의 역사를 찬찬히 따라갔다. 허윤 연세대 젠더 연구소 연구원은 해방 이후 어떻게 우리나라 여성이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간단한 시민권의 정의를 짚었다. 시민권은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등 일련의 의무를 지는 개인과 국가 간의 계약이라 볼 수 있다.
‘여성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논리는 ‘국방의 의무’를 시민권을 부여받기 위한 기본 의무로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경우 광복 이후 미군정과 함께 여성과 남성에게 동시에 시민권이 주어졌다는 특이점이 있다. 미군정과 함께 주어진 시민권은 군인이 될 수 있는 남성의 신체를 중요시한다. 이는 국가의 재건이 곧 나라의 재건이라는 관념과 연결된다. ‘대한의 아들’이라는 단어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한국 최초 여성법관 1호 이태영 변호사의 가족법 개정 운동은 유명하다. 이태영 변호사는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현재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열어 가족법 개정 및 호주제 폐지와 동성동본 금혼령 폐지를 추진했다. 혼외 자녀를 호적에 올릴 때 본처의 동의를 얻게 해야 하며 친권행사에 있어 부모의 친권을 동등하게 고쳐야 한다는 내용들이었다.
1960년대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회원들이 ‘첩 둔 남편 나라 망친다.’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는 사진은 흥미롭다. 국회의원 가운데 첩을 둔 사람이 많았고 이를 반대하며 YWCA가 집회를 열어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고 한다. 한국여성운동사에 있어 ‘축첩자 낙선운동’으로 이어진 이 캠페인은 사회 이슈와 국회의원 선거를 연계한 중요한 사건이다.
1979년 YH무역 여성노조의 신민당사 점거에서부터 1986년 부천 성고문 사건 등 한국 여성주의운동은 노동운동과 함께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다. 첨예한 여성주의의 문제적 이슈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허윤 연구원은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여성의식이 높아졌다고 보았다. 이 사건 이후로 대학 내 스터디가 늘어났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화장실에 붙은 여성주의 스터디 광고이다. 또한 여성주의 잡지가 늘어났으며 여성주의 지식생산, 매체생산이 증가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이 같은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이 실질적인 의식 변화와 행동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게 되는 강연이었다.
광장녀, 그들은 누구인가
지난 4월 21일 여성주의강좌 ‘젠더와 민주주의’ 세 번째 강의가 열렸다.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가 연사로 참여한 이날 강의는 ‘촛불집회 페미니스트의 가능성’이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최근 대한민국에 커다란 바람이 불었다. 촛불 혁명이라고 불린 이 바람은 한국 사회가 변화의 전환점에 왔음을 알렸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났던 광장에서는 대한민국의 사회적 인식이 아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
“촛불집회 현장에서 성폭력과 성추행, 여성혐오 발언과 성차별적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분노한 여성들이 SNS를 통해 과거에 머물러 있는 한국의 여성 인권에 대해 고발하기 시작했죠. 이번 사건을 통해 혹자는 정말 여성혐오, 남녀문제가 대한민국에서 두드러지는 사회 문제인지 의아해합니다. 억압받지 않는 존재는 억압의 무게를 알 수 없는 법이죠.”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광장에 나온 그녀(이하 광장녀)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촛불을 든 여성들은 1차 광장의 정치(시민혁명)에 참여했거나 이를 목도한 386 민주화 세대의 자녀다. 그녀들은 가부장 가족체제의 끝자락에 있었으며, 저출산의 신호탄을 알리는 존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아선호사상이 가장 심했던 시기에 태어난 존재이기도 하다.
광장녀의 어머니들은 민주화 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음에도 사회에서 고립됐다. 여성을 위한 일자리는 극소수였고, 그 일자리도 여성이라는 틀에 맞추어진 커피 타기, 손님 접대, 복사 업무가 전부였다. 이마저도 결혼과 동시에 물러나야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어머니 세대들은 자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 자녀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악마적인 모성애로 길러진 세대가 바로 광장녀들이다.
“열정적인 관심과 격려를 받고 자란 광장녀들은 성장 과정에서 인권에 대해 배우지 않았음에도, 자신이 소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소중한 존재임을 인지하고 자랐습니다. 대학진학률이 높아 대학에서 인권에 대해 고민할 수도 있었죠. 그렇게 광장녀들은 촛불 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했습니다.”
광장녀는 무엇을 했는가
“현재 한국 사회는 어머니 세대가 살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은 OECD 국가에서 여성 인권이 낮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OECD 주요국 중 여성 임원이 가장 적은 나라, 남녀 간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 여성 대학 진학률이 높음에도 여성 노동시장 참여율이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언론에 비친 여성의 성 상품화도 심각한 문제죠.”
광장녀들은 공간적 광장을 넘어 온라인 광장에서도 한국에 만연한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름이 없던 부정의를 인식하고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문제시되지 않았던 사회적 편견을 밝혀냈다. 여성인권에 대한 인식의 창을 다양한 SNS,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넓혔다. 이들은 여성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던 어머니의 민주화 운동을 토양 삼아 새로운 여성 인권 운동을 펼쳐 나가고 있다.
게다가 광장녀들은 문제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2015년 소라넷 폐쇄 운동을 펼친 진선미 의원에게 정치 후원을 하고, 소라넷에서 일어나는 강간모의 등을 비롯한 심각한 성폭력, 성추행 사건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미러링 패러디라는 독특한 방법을 동원해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성차별과 성적인 모욕을 남성이 경험하고 인지할 수 있도록 활동했다(미러링 패러디는 여성이 겪는 사회 차별적 언어를 남성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여자가 너무 드세면 안 되지.’를 ‘남자가 너무 드세면 안 되지.’로 돌려주는 식이다). 낙태죄 폐지를 위해 검은 시위를 주도했고, 암암리에 자행됐던 예술계 성폭력 사건을 밝혀냈다. 성 문제를 넘어 인권신장을 위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세월호 집회에서 촛불을 들었으며, 2015 한일합의 반대와 ‘평화의 소녀상’ 지킴이 운동을 펼친다. 이와 함께 국정교과서 반대 집회에 참여하고 광우병 촛불집회의 주체가 됐다. 본인이 바라는 일을 직접 해내며 인권을 위해 움직였다.
광장녀는 무엇에 분노하나
그렇다면 광장녀들을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한 분노의 대상은 누구일까. 광장녀들은 남근중심주의, 형님문화, (학벌, 지연, 혈연이 뒤엉킨) 선배문화, 이성애중심문화, 인종차별에 기반한 관행에 분노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특권화된 사회 체제와 경제 체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광장녀들은 인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특정 남성, 특정 집단에 대해 공격하는 게 아니라 거대하고 다양한 부정의, 교차적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 공존을 위한 투쟁에 함께하길 바라고 있는 겁니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남녀 공용 화장실에 숨어 있던 가해자는 피해자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살해했다. 여성이 사회에서 수없이 직면하는 생존의 위협이 수면 위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조현병을 가진 가해자가 일으킨 사건으로 단정하며 방향을 돌렸다. “이는 일상에서 불편함과 불안을 느끼지 않았던 기득권 남성들이 보이지 않는 특권을 해체하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젠더에 따른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차별을 없애기 위한 제도적 구조를 끊임없이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광장녀라고 불리는,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딸의 세대가 대한민국을 더 좋은 사회로 만들 거라고 믿습니다.”
지난 2016년 출판계에서 가장 큰 이슈는 ‘여성학’이었다. 알라딘에서 실시한 고객 투표에 따르면 12.5%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2016년 출판계 최고의 이슈로 꼽혔다고 한다. 이는 가장 많은 특표수다. 실제로 ‘여성학/젠더’에 관한 도서 판매량이 전년 대비 세 배 이상, 관련 도서 출간 종수도 38%가량 증가했다. 사회가 광장녀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여성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여성 인권을 위한 운동에서 한 학생 단체가 ‘불의가 법이 될 때 저항이 의무가 된다.’라는 피켓을 들었다. 인권을 위한 광장녀의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