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1호] 중구 용두동 용두시장 거리_시장에 없는 것을 찾아라

길은 시간의 흐름을 실물로 보여 준다. 10여 분 남짓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훑으면 50여 년 된 건물을 만나는가 하면 이제 막 짓기 시작한 원룸의 뼈대를 마주하기도 한다. 널뛰기하듯 시간 사이를 훌쩍 뛰었다 가라앉는 길의 이름이 모두 용두시장이었다.
시장 골목 안 수없이 지나간 시간

오래된 건물은 옛 이름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지하철 서대전네거리역 6번 출구에서 바로 보이는 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건물이 여럿 있다. 그 길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물은 여러 이름이 있었다. 적십자 병원, 혈액원, 대전에서 제일 큰 병원 등 만나는 사람마다 다른 이름으로 빈 건물을 칭하고 있었다. 몇 사람이 이야기를 거친 뒤 적십자 병원으로 합의를 본 후 장 씨가 말을 이었다.


시장노인정 앞에서, 자신을 관리인이라 소개한 장 씨가 자신이 쓴 글씨를 손으로 콕 짚었다

“대전 시내서 여기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장날이면 지금 이 골목 끝부터 저기 끝까지 사람이 꽉 찼다고. 여기 적십자 병원이 있었어. 이 건물은 50년이 넘은 거지. 건물이 없어지면서 사람이 많이 없어졌어.” 지금은 용두시장을 더욱 스산하게 만든 옛 적십자병원 건물이 옛날에는 용두시장을 가장 활기 있게 했다. 주변 골목엔 물건을 가지고 나온 상인 천지였다. 도로가 많이 없던 시절 논산으로 가는 원 도로도 옛 적십자병원이 있는 길 끝자락과 닿아 있었고, 바로 옆으로 여인숙 등 숙박업소도 많았다. 시장이며 숙박업소 모두 잘됐으니 머물다 가는 사람, 장 보러 오는 사람, 지나는 사람, 거주하는 사람 할 것 없이 많던 동네였다. 장 씨는 시장이 있던 동네에 청소하러 왔다가 시장노인정에 자리를 잡았다.

“리어카도 못 다닐 정도로 엄청 컸다고. 그때 나는 장사는 안 했지. 여기 와서 놀기 시작한 게 지금 7년인가 됐어. 이 시장노인정은 원래 빈 건물이었다고. 식당도 하고, 정육점도 하던 집이었는데 빈 채로 있었어. 그걸 우리 노인들이 와서 쓰라고 주인이 내준 거여. 이번 달에는 같이 모은 돈으로 놀러 가기로 했어. 우리는 아주 재미있게 살고 있어.”

옛 적십자 병원 근처엔 오래된 건물이 많았다. 바로 앞 올렸던 기와가 하나씩 떨어져 가는 작은 상가 건물에 시장노인정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나갈 일도 없고, 재개발도 될지 안 될지 모를 건물을 놀리자니 동네 어른들이 쓰려면 쓰시라고 주인이 내어 준 것이다. 장 씨는 빈 상가 건물 내부에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비닐을 쳤다. 시장노인정이라는 정직한 이름도 붙였다. 시장노인정엔 주로 옛날 용두시장에서 장사하며 어울렁더울렁 지내던 노인들이 온다. 자리 펼쳐놓고 앉기만 하면 다른 놀이터가 필요 없을 정도로 쏠쏠하게 시간을 보낸다.

빈 건물 많은 골목, 원래는 여기가 용두시장의 중심이었다. 병원이 빠져나가면서 주변도 차츰 스산해졌다. 물론 그게 이유 전부는 아니었다. 건물은 점점 낡고, 재개발 이야기가 한참이니 고쳐서 쓰려는 사람도 없어 모든 것을 내버려 두었다. 마침 대형마트도, 백화점도 생기기 시작했다.


옛 적십자병원 건물 옆으로 늘어선 오래된 건물

변화가 당연하게 수용되는 공간

용두시장은 전체 용두동 중 용두1주택재개발, 용두2주택재개발 지역으로 묶인 구역이다. 용두동(龍頭洞)은 용두봉의 모양이 용머리에 해당된다 해 원래 용머리, 용두리로 불렸다. 1895년 회덕군, 1914년 대전군 유천면 용두리가 되었다가 1931년 대전군 대전읍 용두정에 편입되었고, 1949년 대전시 용두동이 되었다. 용두시장은 대전 중구 문화동과 인접한 용두동에 있다. 가까운 아파트로는 대전용두미르아파트와 선화센트럴뷰 아파트가 있다. “지금 아파트 있는 데를 옛날에는 수용소라고 했어. 우리 살기 전에 6·25 때 피난민이 살았대. 방 한 칸씩 있는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 나도 거기 살았는데? 지금은 미르마을아파트 됐지. 센트럴뷰 있는 데도 우리 집이었는데 지금은 아파트 됐어. 거기도 마찬가지로 수용소였지. 전부 다 개발되면서 보상받고 나온 거야.”

용두시장에서 도배집을 운영하는 조애현 씨는 30대부터 장사를 시작해 올해 일흔일곱이 되었다. 40여 년 전 시집와 흑석리에 살 때 이장님이 방송을 한 것이 조애현 씨를 용두시장에 오게 했다. “그때 농사지었는데, 방송으로 여기에 시장이 생기니까 가게 할 사람들 오라고 하는 거야. 처음엔 농사지은 거 팔려고 나와서 자리를 잡았지. 그때는 시장을 막 새로 지을 때였어. 장사하러 오는 사람도 많고, 사가는 사람도 많고. 농사지은 쌀을 다 팔고 나서, 우리 아버님한테 물었어. ‘아버님, 다 팔았는데 뭘 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님이 ‘시장에 없는 것을 찾아라~’ 하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시장을 싹 둘러봤지. 그때만 해도 도배집이 없었어. 그래서 하기 시작했는데, 우리 하는 걸 보면서 도배집이 한두 개 생기더라고. 그래도 지금까지 남은 건 우리 집밖에 없네.”

지금은 출장 도배를 다니는 아들과 함께 도배집을 운영한다. 장사라는 게 한 번 온 손님이라도 한 번 더 오도록 친절하고 속임수 없이 하는 것, 그게 지금껏 가게를 유지한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숱하게 재개발 이야기가 나왔고, 실제로 살던 집이 재개발로 사라졌지만 조애현 씨는 그런 변화에 별로 개의치 않으며 살았다.

“살던 집 개발할 때 보상받는 돈이 많지는 않았지. 째마난 방 한 칸이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시장 전체가 개발된다고 할 때는 여기저기 투자한 사람이 많았어. 그 사람들 전부 돈만 버렸지. 이 주변엔 큰 건물도 꽤 있었지. 우리집 근처로 유내과라고 있었어. 유내과 하던 사람이 흑석리에 요양원을 지었대. 여기서 살던 사람 몇이 거기로 들어갔어. 요양원도 아는 사람 있는 데로 가고 싶다고. 나도 다리 수술을 몇 번 했어. 지금은 그래도 나와서 장사할 만하니까 하는 거지.”


시간이 흘러 서대전초등학교 앞 흙바닥 길은 아스팔트 길이 되었고, 열 몇 개 있던 문구점은 청산문구 하나만 남기고 다 사라졌다

길도 사람도 달라진 풍경 위

40여 년 전 조애현 씨가 장사를 처음 시작하던 때만 해도 용두시장에는 유동인구도, 장사하는 사람도 많았다. 일단 1945년 5월 15일 개교한 서대전초등학교가 있었다. 서대전초등학교 앞길이 아스팔트가 아닌 흙바닥이었을 때에는 문구점도 열 몇 개씩 있었다. 지금은 다 사라지고 청산문구만 남았다.

“아이고, 흙바닥에서 어찌나 몬데기(충청도 사투리, 먼지) 풀풀댔는지 몰라. 내가 여기 온 게 48~49년 되나? 처음엔 지금처럼 상가가 많지도 않았어. 뜨문뜨문 있다가 문구점이 하나둘 더 생기더니 열몇 개가 생긴 거지. 그전에는 이 거리를 명동거리라고 했어. 풍안방적 아가씨들이 바글바글했지. 지금 삼성아파트 자리에 풍안방적이 있었단 말이야. 거기 다니던 아가씨가 문구점 와서 노란 편지봉투를 많이 사갔어. 쓰기 편하고 싸다고. 그때는 편지도 많이 보낼 때였어. 삼성아파트가 1989년에 생겼거든. 공장은 이전에 없어지고, 아스팔트 깐 것도 그쯤이었던 것 같네. 30년인가 됐으니까.”

50년 가까이 문구점을 운영하는 청산문구 사장님은 몬데기 풀풀 거리던 날부터 아스팔트 깔던 날, 전선지중화하던 날까지 모두 청산문구에서 지켜보았다. 코흘리개 아이들부터 공장 다니며 제법 어른 티를 내려고 애쓰던 여공들까지 손님도 다양했다. 청산문구가 있는 골목이 지금은 용두시장에서 가장 많이 변한 길이다. 아무것도 없던 공터에 건물도 많이 들어섰고, 지나는 사람도 하나둘 달라지기 시작했다.

“뭣보다 내가 나이가 많이 먹었지. 여기에서 50년 가까이 있었으니까. 옛날엔 부교재라고 책을 팔아서 좀 남았는데 지금은 안 되는 거야. 다른 걸 하려고 해 봤는데 애들 키우고 뭐 하느라 영 여건이 안 됐지. 지금은 되나 안 되나, 노느니 문 연다고 붙들고 있는 거야.”

붓글씨로 쓴 정직, 노력, 실천이라는 가훈이 문구점 안 작은방에 걸려 있다. 문구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보인다. 집안과 가게를 운영하며 삶에서 지키려고 애쓰던 낱말이다. 그 많던 문구점이 다 사라지는 걸 보면서도, 여러 이유로 동네를 떠나는 사람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는 수많은 이유로 가게를 지켰다. 지켜보았던 변화를 설명하는 말로 천천히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 보았다.

글 사진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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