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1호] 나무로 시간을 다듬는 순간_강민 서각미술가

우연히 주인 없는 공간의 문을 열고, 벽을 따라 빙 둘러선 나무로 된 작품을 보았다. ‘서각’도 ‘서각미술’이라는 것도 생소했다. 벽에 기대어 하나씩 겹친 작품 사이로 한 사람 의 시간이 보였다. 나무를 깎으며 수없이 많은 시간을 함 께 깎았을 사람의 시간이 같이 있었다.
그림 그리며 돈 버는 게 꿈이었던 소년

그림 그리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게 없었다. 여백만 있으면 꼬물꼬물 작은 손으로 무언가를 끄적이기 바빴다. 옥천군 이원면에서 태어나 남의 땅을 한 번도 안 밟고 자랐던 아버지는 돈을 버는 재주보다는 쓰는 재주에 더 타고난 사람이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시집온 어머니 역시 있는 재산을 늘리는 재주는 없는 사람이었다. 둘째 며느리인 어머니가 시부모님을 모시며 겨우겨우 살았다. 어린 강민 씨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에는 학교에 월사금 낼 돈도 부족할 만큼 가난은 서서히 눈앞으로 선명하게 보였다.

“첫째라고 땅은 거의 다 큰아들이 가져갔는데, 우리 아버지가 부모님을 모신 거라.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 많던 재산 자식들 다 물려줬는데, 정작 우리 집에 와서 쫄쫄 굶은 거라. 나는 줄줄이 7남매에 네 번째니 부모님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그림 그리는 것도 혼자서 끄적끄적하며 좋아지기 시작했어.”

그림 그리는 재주는 칭찬보다는 주변의 걱정이 앞섰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그림만 그리니 ‘그림이나 그리는’ 문제아로 꼽혔다. 선생님들은 한 손으로는 그림 그리던 손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얼굴에 손을 올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림을 그렸다. 혼자서 그림 그리는 걸 익혔다. 중학교 3학년엔 월사금 못 내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때 대전으로 갔다.

간판장이로 시작하다

“그림 그리는 거로 돈 벌어야 하는데 뭘 해야 하나. 데생은 자신 있는데 인물화를 그려야겠는 거야. 극장 간판을 생각했지. 중학교 3학년 때 대전에 있는 극장들을 찾아서 일자리를 찾았어. 너무 어려서 안 된다는 말을 듣고는 돈 받지 않을 테니 일만 시켜달라고 했어. 대전에 있는 신도극장, 중앙극장, 시민관같은 데서 간판 일을 배우기 시작했어. 돈이 없으니 부모님은 말릴 수가 없었지.”

옥천에서 대전까지 매일 출퇴근했다. 7시에 옥천에서 출발하는 통근 기차에 표도 끊지 않고 올랐다. 대전역에 내려 표 받는 역무원의 손에 10원짜리 몇 개를 쥐여 주고 나왔다. 푯값보다 싸게 먹혔다. “아침에 기차를 타면 내 나이 또래의 주변 친구들은 다 학교에 가려고 기차를 탄 거야. 속상하기도 했지. 그래도 신념이 있었어. 그림으로 성공할 자신감이 있었어.”

풀칠할 때 쓰는 밀가루를 얻어다 깨끗이 씻은 페인트통에 물을 끓였다. 밀가루를 뚝뚝 끊어 넣고 수제비를 끓여 먹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극장 간판을 바꿔야 할 때면 리어카에 큰 간판 몇 개를 싣고 걸었다. 매일 커다란 붓을 빨며, 3년을 배웠다. “3년이 지나니까 대전에는 더 배울 게 없는 거라. 마침 형님이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어. 부산을 보니까 대전 간판은 간판도 아닌 거라. 남포동 국제극장에 들어가서 1년을 더 배웠어.” 부산에서 1년 더 배우니 이제 내 일을 하고 싶었다. 극장 일을 그만두었다. 부산 모라동에 ‘그린다’라는 상호를 내걸고 상업미술을 시작했다.

“인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는 학교마다 현황판이나 알림, 안내문 같은 간판을 전부 직접 그렸단 말이야. 그림 그리는 건 자신 있으니까 그걸 돈벌이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지. 그러다 영장이 나왔어. 중학교 졸업도 못 했으니까 방위로 지내다가 다시 마산으로 내려왔지.”

진짜 평생 해야 할 걸 찾다

마산에서 다시 ‘그린다’라는 간판을 걸고 일을 시작했다. 실력 좋다는 소문이 나서 돈도 제법 벌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내 작업, 내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김해에서 유명한 서각 작가의 작업실을 지나가게 되었다.

“나는 미대를 못 나왔기 때문에 그림으로 성공한다는 생각은 못 했어.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프로필이 있어야 그림값이 나오니까. 나는 작가는 아니었던 거야. 그런데 서각 작품을 보고 느꼈어. 나무라는 재료도 일단 익숙한 재료였고, 이걸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딱 든 거야.”

서각 역시 혼자서 연구를 시작했다. 하다 보니 재미있었다. 나무에 글씨를 쓰려니 글씨도 잘 써야 했고, 그림도 잘 그려야 했고, 나무 칼로 섬세하게 글씨를 세기고 파고 세심하게 깎아야 했다. 할수록, 돈 버는 일보다는 이 일을 업으로 삼고 싶었다.

“한 15년 전부터는 이제 죽 이 일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상업미술은 간판을 내렸어요. 돈도 많이 벌고, 열심히 했던 일이니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그래도 이걸로는 최고가 될 수 있겠다, 나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전업 작가로 하려다 보니 돈이 많이 들었다. 나무라는 재료 자체가 비싸고, 작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돈 벌어 사 두었던 집도 사라지고, 무거운 나무를 들고 나르며 몇 날 며칠이고 앉아 있다 보니 건강도 안 좋아지고, 남은 것이라고는 작품밖에 없었다.

“한참 돈 벌 때는 안 그랬는데, 작업만 하다 얼마 안 있으니까 고향이나 고향 근처에 다시 가고 싶더라고. 6년 전에 선화동에 2층 작업장을 얻어서 이사를 왔어. 용두동으로 온 건 4년인가, 5년 됐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는 것

돈을 많이 벌 때는 1980년대 대우 르망살롱을 끌고 다녔다. 반도패션 옷이 아니면 입지 않았다. 그런데 돈이라는 게 조금만 지나면 속절없이 손을 떠났다. 행복과는 무관했다. “황금 침대에 누워서 자면 뭐해. 자고 일어나는 건 똑같은데. 밥 먹고 싸기만 하려면 뭐하러 살어. 나는 이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온 사람이라는 소명이 있었어.” 최고가 된다. 태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빌딩이 없어도 집이 없어도 하고 싶은 것 하니 괜찮다. 다만 지금껏 만든 작품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다.

“일단 재료를 먼저 구해야 해. 괜찮은 나무를 사서 비 안 맞는 곳에 5~6년 정도 두어야 작업할 수 있는 나무가 되는 거라. 바싹 마르면 건조되고 딱딱해지거든. 그래야 나중에 틀어지거나 갈라지지 않아. 나무를 두고 구상을 시작해. 다듬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새겨. 완성되면 색을 칠해. 색이 완성되면 다시 사포질하고, 기름을 발라. 색이 변하면 안 되거든. 오랜 시간이 걸려서 작품 하나가 완성되지. 1년에 한 번 정도는 꼭 전시해. 전시하면 작품을 산다는 사람이 있어도 망설여져. 한 번 완성하면 절대 똑같은 작품을 만들 수가 없거든.” 지난 시간 동안 그리고, 쓰고, 깎아서 만든 작품이 강민 작가의 작업실을 빙 둘러싸고 있다. 옥천이나 대전, 그게 안 되면 외국에라도 공간만 마련해 준다면 작품을 기증하고 싶다. 지자체에서 공간을 마련해 주면 작품을 모두 기증하고 상설 전시로 운영하는 미술관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즐거울 ‘락’이라는 글씨를 많이 썼어. 인생을 살아 보니 모두 즐겁게 살기 위해 하는 거더라고. 사랑도 즐겁기 위해서 하는 거고, 먹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게 즐겁기 위해서 하는 일이야. 무엇보다 꿈을 놓지 않는 거, 나한텐 그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어

글 사진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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