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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1호] 벨리손 마을에서의 하루_달콤한 공생 파나이 섬 공정여행
필리핀의 청량한 바다를 만날 수 있는 파나이 섬. 위로는 길게 펼쳐진 화이트비치의 보라카이가 있고 아래로는 5월이면 온 섬에서 망고를 맛볼 수 있는 망고축제가 열리는 기마라스 섬이 있다. 아래위로 여행지를 끼고 있는 파나이 섬이지만 나는 공감만세 공정여행자들과 함께 파나이 섬의 작은 시골마을, 벨리손으로 향한다.
안티케 공정무역 센터(Antique Fair Trade Center-이하 AFTC)라는 마스코바도 설탕공장 때문이다. 마스코바도 설탕은 필리핀 전통방식으로 만든 비정제 원당이다. 화학적 정제처리를 하지 않아 사탕수수 속 미네랄이 그대로 들어 있다. 마스코바도의 어원이 스페인어로 ‘근육’에서 시작되었을 만큼 수확부터 생산까지 고단한 과정을 거쳐 만드는 마스코바도 설탕. 힘들여 만들어도 위생과 품질을 이유로 근처 시장에서 싼값에 팔린다.
이런 배경 아래 아이쿱생협에서 2011년 조합원 및 공동기금으로 1억 7천만 원을 들여 필리핀 안티케 지역에 AFTC 마스코바도 설탕공장을 지었다. AFTC도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곳에서 만든 마스코바도 설탕은 현재 한국의 아이쿱매장에 공정무역으로 들여와 판매된다. 이 공장을 방문하러 아이쿱 생산자회와 함께 이곳에 왔다. 아이쿱 생산자회 또한 한국에서 건강한 먹거리를 기르는 농부들이다.
한국 농부들과 필리핀 농부들의 만남이라니. 설렌다. 이번 여행 참가자 중 한 분은 2011년 AFTC 준공식 당시 이곳을 방문했었다. 그때 만난 사람들이 여전히 밝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는데 시작부터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이 인다.
사탕수수 수확부터 마스코바도 설탕이 만들어지기까지 전 과정을 체험해 보고, AFTC 조합원들과 함께 어울리고 교류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주요 일정이다. AFTC 공장 옆에 회의실 겸 방문자 숙소용으로 지은 커뮤니티센터에 짐을 풀고 잠시 휴식 후 AFTC 조합원 마리오 씨가 여행자들에게 AFTC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차례 AFTC 조합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 마스코바도 설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공장을 둘러본 후 본격적인 체험을 시작했다.
현직 농부들답게 수건을 머리에 두른 매무새가 예사롭지 않다. 낫질은 문제없다며 자신만만해한다. 이게 웬걸, 한 자루씩 건네받은 농기구는 낫이 아니라 앞이 뭉툭하고 기다란 칼이다. 다소 살벌한(?) 장비에 흠칫 놀랐지만 마리오 씨가 시범을 보이니 금세 몇 그루씩 사탕수숫대를 베기 시작한다. 하지만 땡볕에서 일한 지 5분 만에 땀으로 티셔츠가 얼룩덜룩해진다. 갈증이 날 때 즈음 마리오씨가 사탕수수 껍질을 스윽스윽 베더니 여행자들에게 한 마디씩 나눠 준다. 꼭꼭 씹어 달큰한 사탕수수즙을 맛보고 나니 다시 얼굴에 생기가 돈다.
수숫대 수확을 마무리하고 사탕수수를 공장 앞으로 나른다. 그다음 착즙기로 즙을 짜 공장 안으로 보내 솥에 눋지 않게 끓인다. 사탕수수 섬유질이며 딸려온 껍질 같은 불순물을 걷어 내며 졸인다. 이것을 편평한 판에 옮겨 담아 건조시키면서 삽으로 치대면 마스코바도 설탕이 완성된다. 이 과정을 모두가 체험하고 나서 AFTC 조합장, 조합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잠시지만 함께 일하고 나니 어느새 친근감이 생겨 한결 편하게 대화를 나눈다.
“자녀는 몇 명인가요?”, “6남매입니다.”, “당신에게 작은 소망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내 아이들의 아이들까지 함께 마을에서 풍요롭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사탕수수 외에 다른 농작물도 구경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내일 아침에 우리 집에 오세요.”, “AFTC 조합원이 되려면 어떻게 하나요?”, “조합원 등록비 50페소를 내고 정식 활동을 시작합니다.”
한화로 1,500원도 안 되는 돈으로 조합원이 된다는 말에 여행자들은 적잖이 놀란다. 이곳 벨리손은 AFTC를 여행하는 한국인 외에는 관광객은 전혀 만날 수 없다. 여행자 숙소는 AFTC 커뮤니티센터가 유일하다. 식재료는 대부분 인근 마을에서 사다 먹거나 직접 길러 먹고 공산품은 사서 쓴다. 질 좋은 쌀 1kg가 40페소 초반대로 거래되니 50페소는 쌀 1kg를 사고도 남는 돈이다. 이 마을에서 50페소는 이런 가치라고 여행자들에게 설명을 하니 다들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빠진다.
저녁식사 후 함께 커피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 함께 마당으로 나와 별을 구경한다. 깊은 밤 한적한 시골 풍경에 젖어 한 사람씩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자기 순서에 노래를 마친 후 다음 노래를 듣고 싶은 사람을 지목하고 앉는다. 여행자들과 AFTC 조합원들, 우리를 데려다준 대절 차량 기사 아저씨들까지 한데 어우러져 놀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튿날 아침 마을 한가운데 열리는 재래시장을 둘러보고 AFTC 조합장님댁으로 향했다. 조합장님댁 마당 한쪽에는 마스코바도 설탕을 만들던 재래식 솥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조합장님은 마당에 키우는 코코넛 나무에서 코코넛을 몇 개 따 코코넛 주스를 마시라며 우리에게 건넨다. 여행자들은 관광지에서 카트에 쌓인 코코넛 뚜껑을 따 빨대를 꽂아 주는 것만 보다가 눈앞에서 나무에 올라 코코넛을 따 주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고마워하기도 한다. 배불러 더는 못 마실 만큼 코코넛 주스를 주셨다. 감사히 코코넛 주스를 마신 후 텃밭을 둘러본다. 여행자들도 현업 농부들이라 필리핀 농사에 대해 궁금한 점이 참 많다. 토양과 작물을 유심히 보며 사진도 찍는다. 이장님 댁 방문과 마을 둘러보기를 마지막으로 벨리손 마을을 떠났다. 이것이 벨리손 마을, 안티케공정무역센터에서의 하루였다. 누가 보면 별스럽지 않고, 볼거리도 즐길 거리도 없는 시골 동네에서의 하루였지만 여행자들은 남은 일정 내내 AFTC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마도 시골마을 사람들의 따스함을 느끼며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쓰는가 하는 소비의 방식에 따라 현지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조금이나마 알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