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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5호] 일상의덧
스물아홉
글 성수진
“스물아홉에 관해서 얘기를 해 봐요. 원래 그 나이가 그래요. 쉬운 나이는 아니지.”
사무실 내 앞자리에 앉은 출판 담당 혜정언니는 종종, 무언가에 조언을 해 준다. 손이 야무진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뭘 하고 있으면 괜스레 와서 ‘도와줄까요?’ 하는 식이다.
“쉬운 나이는 아니지.”
언니도 스물아홉 때 그랬다며 이야기한다. 서른세 살인 언니는 딱 봐도, 나보다 ‘수월한’ 삶을 살고 있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언니는 지금이 더 쉬워요?
“아니 지금은 더 어렵지. 내가 봤을 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 나이 든 사람이 살기 힘든 세상이야. 젊을 땐 그나마 젊어서 살지. 그 몰라요? 여성의 노동 구조가 20대에 집중돼 있고, 30대부터는 일할 수 있는 게 엄청나게 줄어들어요.”
제일 힘든 게 뭐예요?
“살찌는 거.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 살쪘다는 거. 우리 신랑 막 되게 집요하게 놀려요. 내가 싫어하는 거 알면서. 개짜증 나 진짜.”
얼마 전, 친구 결혼식에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이 모였다. 새내기로 입학한 해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10년이나 지났다니. 시간이 빠르게 흐른 것 같기도 하고, 돌아보면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 대학교 친구들은 동기, 선후배들의 결혼식에 빠짐없이 참석해 종종 얼굴을 봐 왔나 보다. 대학생 시절부터 나는, 친구들과 잘 지내면서도 많은 사람과 두루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졸업하고는 몇 친구들을 빼면 동기들, 선후배들을 볼 일이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 옛날 어느 날처럼 우르르 몰려 한 카페로 향했다. 도중에, 원룸 건물 1층 어느 간판에 빨래 하나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웬 팬티가 저기 떨어져 있냐며 웃다가 곧, 수건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내 얘기에 동기 한 명이 웃었다. “성수진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
그 친구 말에 다른 친구들이 거들었다. “얘 엄청 변했어.”
내가 뭐가 변했는데. 옛날엔 팬티 얘기하다 지금은 안 하는 거? 그리고 옛날에도 팬티 얘기는 안 했거든?
말로 다 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단다. 일단, 너무 어른스러워졌다는 게 친구들이 내게 갖는 불만이었다. 예전처럼 엉뚱한 소리도 안 하고 눈빛이며 웃음소리며 어른스러워졌다는 거다.
나는 이제야 또래 친구들과 비슷하게 성숙해졌거나 혹은 실재하는 세상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고 소설 속에서 살던 나는 언제 진짜 세상에 나왔을까.
“수진이가 예전에 바다 보여 준다고 데리고 갔잖아. 무슨 바다냐고 따라갔더니 운동장으로 가더라고. 스탠드 위에 올라가더니 밖에 바다가 보인다는 거야.”
바다는커녕 작은 물줄기조차 없던 곳. 기찻길과 그 옆에 옹기종기 붙은 건물들이 빽빽한 곳. 그런 곳을 보고 어떻게 바다를 상상했을지. 대화는 10년 전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갔다.
누구는 사랑 고백을 하려고 장기자랑에 나가 부상으로 받은 선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었다가 단번에 거절당했고, 누구는 MT 가서 술을 마시고 좋아하는 선배가 보는 앞에서 토를 했다. 선배들에게 인사 잘 안 한다는 이유로 남학생들이 여학생들 대신 혼나기도 했고, 선배와 싸운 동기 한 명은 쫓겨나다시피 학교를 떠났다. 운동회나 행사 때 뒤치다꺼리 하는 애들은 정해져 있었고 예뻐서 사랑받는 몇 동기들은 일은 하지 않고 자리에 즐겁게 앉아 먹기만 했다.
한참을, 그때가 그립다며 이야기하다가 ‘왜 그때 우린 그렇게 바보 같았을까?’ 하며 후회했다. 재밌게 놀았는데 뭔가 찝찝함이 남은 대학 시절이었다.
마침 다음 날도 후배의 결혼식이 있던 터라 결혼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누구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했으며, 누구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다. 얼마 전, 부모님께 만나는 사람 이야기를 꺼낸 친구도 있었다. 예상대로 부모님은 그 사람의 조건을 듣고 좋지 않다는 내색을 했고 친구 역시 화가 났다고 했다.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기가 그렇게 힘이 든다고 말이다. 서른 살 언저리에 있는 우리 중 누군가는 오롯이 세상에 혼자 서 있기도 했고 아직 어딘가에 기대어 있기도 했다. 대학생 때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했던 친구는, 졸업하고도 몇 년을 학자금을 갚아 가며 공부하느라 힘들어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게 자신이 세상에 독립하는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이야기 주제는 ‘독립’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언제 이런 고민을 하게 됐을까?”
누구는 뱃속에 아이가 있다고 했고 누구는 아기를 데리고 나타났다. 생각해 보면, 스물일곱 언저리 무렵, 결혼이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관해 고민했던 것 같다.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만 궤도를 이탈해 기어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혜정언니가, 옆자리인 나의 스물아홉을 어찌 보는지는 모르겠다. “원래 그 나이가 그래요.”라는 말을 할 만큼, 지금 내게 이 시기가 고민스러운 날들처럼 보이는 걸까. 어려서부터 늘 생각이 많고 지나치게 고민과 걱정이 많았다.
서른세 살, 하고 싶은 게 많은 언니가 어리고 답답한 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다. 언니는 나이가 들면 점점 더 힘들다고 했지만 ‘살찌는 게’ 가장 힘들 정도면, 그게 뭐가 힘든 건가 묻고 싶기도 하고.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점점 그런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다. 10년 전에 싫어했던 사람을 다시 보는 내 마음 한편이 짠해졌다. 내가 미워했던 어떤 부분도, 미워하지 않았을 수 있던 것이었다. 거기서 거기. 나는 무엇이 달랐던가.
지금의 내가 10년 전의 나를 돌아본다. 궤도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으며 유일한 한 사람이 되고 싶어 발버둥 칠수록 시야는 좁아져만 갔었다. 자의와 타의가 뒤엉키고 온갖 우연이 맞물려 궤도를 이탈했다. 그러면서 무언가는 의지와 상관없이 잃어버렸고 나도 모르게 얻어지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나만의 궤적을 만들어 갔다고, 10년 후 내가 회상하길 바란다. 무엇보다 편안한 내가 되기를 바란다.
“쉬운 나이는 아니지.”
언니도 스물아홉 때 그랬다며 이야기한다. 서른세 살인 언니는 딱 봐도, 나보다 ‘수월한’ 삶을 살고 있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언니는 지금이 더 쉬워요?
“아니 지금은 더 어렵지. 내가 봤을 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 나이 든 사람이 살기 힘든 세상이야. 젊을 땐 그나마 젊어서 살지. 그 몰라요? 여성의 노동 구조가 20대에 집중돼 있고, 30대부터는 일할 수 있는 게 엄청나게 줄어들어요.”
제일 힘든 게 뭐예요?
“살찌는 거.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 살쪘다는 거. 우리 신랑 막 되게 집요하게 놀려요. 내가 싫어하는 거 알면서. 개짜증 나 진짜.”
얼마 전, 친구 결혼식에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이 모였다. 새내기로 입학한 해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10년이나 지났다니. 시간이 빠르게 흐른 것 같기도 하고, 돌아보면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 대학교 친구들은 동기, 선후배들의 결혼식에 빠짐없이 참석해 종종 얼굴을 봐 왔나 보다. 대학생 시절부터 나는, 친구들과 잘 지내면서도 많은 사람과 두루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졸업하고는 몇 친구들을 빼면 동기들, 선후배들을 볼 일이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 옛날 어느 날처럼 우르르 몰려 한 카페로 향했다. 도중에, 원룸 건물 1층 어느 간판에 빨래 하나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웬 팬티가 저기 떨어져 있냐며 웃다가 곧, 수건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내 얘기에 동기 한 명이 웃었다. “성수진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
그 친구 말에 다른 친구들이 거들었다. “얘 엄청 변했어.”
내가 뭐가 변했는데. 옛날엔 팬티 얘기하다 지금은 안 하는 거? 그리고 옛날에도 팬티 얘기는 안 했거든?
말로 다 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단다. 일단, 너무 어른스러워졌다는 게 친구들이 내게 갖는 불만이었다. 예전처럼 엉뚱한 소리도 안 하고 눈빛이며 웃음소리며 어른스러워졌다는 거다.
나는 이제야 또래 친구들과 비슷하게 성숙해졌거나 혹은 실재하는 세상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고 소설 속에서 살던 나는 언제 진짜 세상에 나왔을까.
“수진이가 예전에 바다 보여 준다고 데리고 갔잖아. 무슨 바다냐고 따라갔더니 운동장으로 가더라고. 스탠드 위에 올라가더니 밖에 바다가 보인다는 거야.”
바다는커녕 작은 물줄기조차 없던 곳. 기찻길과 그 옆에 옹기종기 붙은 건물들이 빽빽한 곳. 그런 곳을 보고 어떻게 바다를 상상했을지. 대화는 10년 전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갔다.
누구는 사랑 고백을 하려고 장기자랑에 나가 부상으로 받은 선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었다가 단번에 거절당했고, 누구는 MT 가서 술을 마시고 좋아하는 선배가 보는 앞에서 토를 했다. 선배들에게 인사 잘 안 한다는 이유로 남학생들이 여학생들 대신 혼나기도 했고, 선배와 싸운 동기 한 명은 쫓겨나다시피 학교를 떠났다. 운동회나 행사 때 뒤치다꺼리 하는 애들은 정해져 있었고 예뻐서 사랑받는 몇 동기들은 일은 하지 않고 자리에 즐겁게 앉아 먹기만 했다.
한참을, 그때가 그립다며 이야기하다가 ‘왜 그때 우린 그렇게 바보 같았을까?’ 하며 후회했다. 재밌게 놀았는데 뭔가 찝찝함이 남은 대학 시절이었다.
마침 다음 날도 후배의 결혼식이 있던 터라 결혼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누구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했으며, 누구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다. 얼마 전, 부모님께 만나는 사람 이야기를 꺼낸 친구도 있었다. 예상대로 부모님은 그 사람의 조건을 듣고 좋지 않다는 내색을 했고 친구 역시 화가 났다고 했다.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기가 그렇게 힘이 든다고 말이다. 서른 살 언저리에 있는 우리 중 누군가는 오롯이 세상에 혼자 서 있기도 했고 아직 어딘가에 기대어 있기도 했다. 대학생 때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했던 친구는, 졸업하고도 몇 년을 학자금을 갚아 가며 공부하느라 힘들어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게 자신이 세상에 독립하는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이야기 주제는 ‘독립’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언제 이런 고민을 하게 됐을까?”
누구는 뱃속에 아이가 있다고 했고 누구는 아기를 데리고 나타났다. 생각해 보면, 스물일곱 언저리 무렵, 결혼이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관해 고민했던 것 같다.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만 궤도를 이탈해 기어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혜정언니가, 옆자리인 나의 스물아홉을 어찌 보는지는 모르겠다. “원래 그 나이가 그래요.”라는 말을 할 만큼, 지금 내게 이 시기가 고민스러운 날들처럼 보이는 걸까. 어려서부터 늘 생각이 많고 지나치게 고민과 걱정이 많았다.
서른세 살, 하고 싶은 게 많은 언니가 어리고 답답한 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다. 언니는 나이가 들면 점점 더 힘들다고 했지만 ‘살찌는 게’ 가장 힘들 정도면, 그게 뭐가 힘든 건가 묻고 싶기도 하고.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점점 그런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다. 10년 전에 싫어했던 사람을 다시 보는 내 마음 한편이 짠해졌다. 내가 미워했던 어떤 부분도, 미워하지 않았을 수 있던 것이었다. 거기서 거기. 나는 무엇이 달랐던가.
지금의 내가 10년 전의 나를 돌아본다. 궤도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으며 유일한 한 사람이 되고 싶어 발버둥 칠수록 시야는 좁아져만 갔었다. 자의와 타의가 뒤엉키고 온갖 우연이 맞물려 궤도를 이탈했다. 그러면서 무언가는 의지와 상관없이 잃어버렸고 나도 모르게 얻어지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나만의 궤적을 만들어 갔다고, 10년 후 내가 회상하길 바란다. 무엇보다 편안한 내가 되기를 바란다.
무엇이 그들을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가
-소녀들을 지켜주었어야 할 정보는 일제시대에도 없었고 1965년에도 없었다.
글 이혜정
지난 12월 19일(토) 저녁 8시, 영화 <귀향> 후원자 시사회에 다녀왔다. 가는 길은 어두웠다. 싸늘한 겨울바람을 뚫고 목척교를 지났다. 대전아카데미극장이 어딘지 알지 못해 그 주변을 여러 번 돈 이후에야 입구를 찾았다. 상영관은 제법 컸고 사람들이 꽉 채우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니 마침 감독과 배우들이 영화 시작 전 관객들 앞에 서서 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영화는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여겼던 것들을 개인적 차원의 경험으로 섬세하게 풀어낸다. 구체적으로 재현된 영화 속 현실은, 한 사람의 인생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는 폭력이라는 것의 실체와 맞닥뜨리게 만든다.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키고, 인물들의 감정을 세밀하게 따라가는 영화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담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폭력에 희생되었으나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운, 할머니들의 소녀 시절이 살아 있기도 하다. 소녀 시절의 아름다움, 그들의 꽃다움을 바라보는 일은 그들이 끌려간 후의 일을 확인하는 것보다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하다. 그들은 그렇게 나비와 같이 꿈꾸는 존재들이었다. 피와 어둠, 전쟁의 참화 가운데서도 그들은 절대로 훼손되지 않는 존엄함으로 빛난다. 그것은 분명히 존재했고 아직도 살아 있다. 그들은 열네 살, 열여섯 우리의 소녀들이었다.
영화는 집단적 무의식을 반영하고, 그것을 확인하게 하는 매체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보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일을 무의식 저쪽에 묶어 두고 망각해 왔다는 걸 깨달았다. 뉴스에서 떠들어 대는 이슈, 어쩌면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 정도로 여기며 스쳐 지나온 게 아닐까.
이 영화는 아주 어렵게 만들어졌다. 52,525명의 후원자 명단이 엔딩 크레디트에 올라갈 때, 우리 손으로 이 영화를 올리게 되었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씁쓸한 감정이 더 강했다. 우국충정 영화들이 관객몰이를 하며 성행하는 반대쪽에 영화 <귀향>이 있다. 작품성도 뛰어나고 그 의미에 있어 진작에 만들고 상영했어야 할 영화 <귀향>이 이토록 어려운 길을 걸어 우리를 찾아온 것은 단순한 돈의 문제는 아니다. 그 뒤에 정치가 있고, 그들의 문제를 외면하려는 거대한 보이지 않는 힘이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외면하는 건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 여전히 일본은 진정성 있는 사과는 커녕 자신들의 만행을 부정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한편으론 섣부른 협상을 하자고 한다. 영화 장면 중에 동사무소에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접수를 하러 가는 대목이 있다. 이 사회는 피해 할머니를 부끄럽게끔, 자신을 숨기게끔 만들었다.
지금도 여전하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맺으며 일본이 빠져나갈 빌미를 만든 것도 정부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1965년 당시의 박정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피해자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협상’을 타결한다. 그 내용에는 위안부 언급은 전혀 없고 고노 담화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회적 ‘사과’만이 있다. 외무장관에게 대독사과를 하게 하고, 그것 역시 ‘사죄’가 아닌 ‘사과’라는 표현을 쓰며 불법성과 강제성은 인정하지 않는다. ‘책임을 통감한다’고 하면서 정작 그 성격을 규정 지을 수 있는 불법성, 성 노예라는 내용은 쏙 빠져 있다. 사과한다고 하면서 정작 무엇에 관한 사과인지 명시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부는 앞으로 상대국을 비판하지 않겠다는 조건, 평화비 이전 협의 조건을 덥석 받아들였다.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국민 상대로 뻥을 치더니. 위안부 할머니들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막하는데, 국민들한테 뻥치는 게 대수이겠냐마는.
누구 마음대로? 누구 좋으라고?
이 소식을 듣고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오늘 우리는 완전히 배제당하고 소외당했다. 우리를 이용한 것 같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할머니들은 이제 늙고 병들었다. 치매가 찾아오기도 했다. 이런 분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 정부가 하는 짓이다.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외치고 싶다. 당신들이 나서서 그러지 않아도 그분들은 충분히 힘들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소녀들의 휴식 시간, 얼굴에 피멍이 든 소녀들이 억새가 피어난 물가에 둘러앉아 쉰다. 햇볕이 그들을 부드럽게 감싼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일어나 부르는 ‘가시리’. 그 목소리가 부드럽고 처연하다. 멍들고 힘든 소녀들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존재했었다.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비극적인 이야기의 가상 인물들이 아니고 분명히 살아 있었고 존재했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 여전히 이 자리에. 일본은 픽션이라 우긴다. 그 엄연한 사실을.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화면 위쪽에 피해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이 나오는데, 그 그림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이 소녀가 강제적으로 끌려가는 장면이다. 그 그림은 가장 내밀한 기억, 그들의 경험을 여실하게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강제적으로 소녀들을 끌고 간 그들의 공권력을 싹 지워 버린다. 한국 정부의 동의하에. 아주 공식적으로. 주체가 빠진 문장이다.
이 영화를 보며 알게 된다. 그들이 빼앗아 간 게 무엇인지. 그건, 인생 그 자체였다. 폭력의 그 어리석음, 무자비함,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화를 꼭 보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 정부가 하는 끔찍한 짓, 죽은 소녀들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드는 짓거리를 보며 모두가 나서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더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정부의 끔찍한 만행은 일본보다 더 하다. 정부를 믿어서는 안 된다. 결국 생각하게 된다. 일제식민지 시대의 시작은, 무력하고 어리석은 위정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 정신 차리자.
영화는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여겼던 것들을 개인적 차원의 경험으로 섬세하게 풀어낸다. 구체적으로 재현된 영화 속 현실은, 한 사람의 인생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는 폭력이라는 것의 실체와 맞닥뜨리게 만든다.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키고, 인물들의 감정을 세밀하게 따라가는 영화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담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폭력에 희생되었으나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운, 할머니들의 소녀 시절이 살아 있기도 하다. 소녀 시절의 아름다움, 그들의 꽃다움을 바라보는 일은 그들이 끌려간 후의 일을 확인하는 것보다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하다. 그들은 그렇게 나비와 같이 꿈꾸는 존재들이었다. 피와 어둠, 전쟁의 참화 가운데서도 그들은 절대로 훼손되지 않는 존엄함으로 빛난다. 그것은 분명히 존재했고 아직도 살아 있다. 그들은 열네 살, 열여섯 우리의 소녀들이었다.
영화는 집단적 무의식을 반영하고, 그것을 확인하게 하는 매체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보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일을 무의식 저쪽에 묶어 두고 망각해 왔다는 걸 깨달았다. 뉴스에서 떠들어 대는 이슈, 어쩌면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 정도로 여기며 스쳐 지나온 게 아닐까.
이 영화는 아주 어렵게 만들어졌다. 52,525명의 후원자 명단이 엔딩 크레디트에 올라갈 때, 우리 손으로 이 영화를 올리게 되었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씁쓸한 감정이 더 강했다. 우국충정 영화들이 관객몰이를 하며 성행하는 반대쪽에 영화 <귀향>이 있다. 작품성도 뛰어나고 그 의미에 있어 진작에 만들고 상영했어야 할 영화 <귀향>이 이토록 어려운 길을 걸어 우리를 찾아온 것은 단순한 돈의 문제는 아니다. 그 뒤에 정치가 있고, 그들의 문제를 외면하려는 거대한 보이지 않는 힘이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외면하는 건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 여전히 일본은 진정성 있는 사과는 커녕 자신들의 만행을 부정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한편으론 섣부른 협상을 하자고 한다. 영화 장면 중에 동사무소에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접수를 하러 가는 대목이 있다. 이 사회는 피해 할머니를 부끄럽게끔, 자신을 숨기게끔 만들었다.
지금도 여전하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맺으며 일본이 빠져나갈 빌미를 만든 것도 정부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1965년 당시의 박정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피해자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협상’을 타결한다. 그 내용에는 위안부 언급은 전혀 없고 고노 담화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회적 ‘사과’만이 있다. 외무장관에게 대독사과를 하게 하고, 그것 역시 ‘사죄’가 아닌 ‘사과’라는 표현을 쓰며 불법성과 강제성은 인정하지 않는다. ‘책임을 통감한다’고 하면서 정작 그 성격을 규정 지을 수 있는 불법성, 성 노예라는 내용은 쏙 빠져 있다. 사과한다고 하면서 정작 무엇에 관한 사과인지 명시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부는 앞으로 상대국을 비판하지 않겠다는 조건, 평화비 이전 협의 조건을 덥석 받아들였다.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국민 상대로 뻥을 치더니. 위안부 할머니들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막하는데, 국민들한테 뻥치는 게 대수이겠냐마는.
누구 마음대로? 누구 좋으라고?
이 소식을 듣고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오늘 우리는 완전히 배제당하고 소외당했다. 우리를 이용한 것 같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할머니들은 이제 늙고 병들었다. 치매가 찾아오기도 했다. 이런 분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 정부가 하는 짓이다.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외치고 싶다. 당신들이 나서서 그러지 않아도 그분들은 충분히 힘들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소녀들의 휴식 시간, 얼굴에 피멍이 든 소녀들이 억새가 피어난 물가에 둘러앉아 쉰다. 햇볕이 그들을 부드럽게 감싼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일어나 부르는 ‘가시리’. 그 목소리가 부드럽고 처연하다. 멍들고 힘든 소녀들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존재했었다.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비극적인 이야기의 가상 인물들이 아니고 분명히 살아 있었고 존재했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 여전히 이 자리에. 일본은 픽션이라 우긴다. 그 엄연한 사실을.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화면 위쪽에 피해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이 나오는데, 그 그림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이 소녀가 강제적으로 끌려가는 장면이다. 그 그림은 가장 내밀한 기억, 그들의 경험을 여실하게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강제적으로 소녀들을 끌고 간 그들의 공권력을 싹 지워 버린다. 한국 정부의 동의하에. 아주 공식적으로. 주체가 빠진 문장이다.
이 영화를 보며 알게 된다. 그들이 빼앗아 간 게 무엇인지. 그건, 인생 그 자체였다. 폭력의 그 어리석음, 무자비함,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화를 꼭 보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 정부가 하는 끔찍한 짓, 죽은 소녀들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드는 짓거리를 보며 모두가 나서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더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정부의 끔찍한 만행은 일본보다 더 하다. 정부를 믿어서는 안 된다. 결국 생각하게 된다. 일제식민지 시대의 시작은, 무력하고 어리석은 위정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 정신 차리자.
당신은 저것이 아름답나요?
<핀란드 디자인 산책>
글 송주홍
사전에서 ‘도시재생’이라는 말을 찾아봤다. ‘기존 도시에 새로운 기능을 도입하고 창출함으로써 쇠퇴한 도시를 새롭게 경제적·사회적·물리적으로 부흥시키는 도시사업을 의미함’이라고 나온다. 찬찬히 들여다봤다. 두 가지 의문스러운 전제를 발견했다. 우선, ‘기존 도시는 쇠퇴했다’는 전제다. 정말로 그런가. 집이 좀 오래되고, 그래서 골목이 좀 어스름하고 유동인구가 적으면 쇠퇴한 건가. 오히려 그런 집과 골목이 정감 가고 좋던데. 철없는 소리라고 하면 할 말 없다.
두 번째는 기존 도시를 ‘부흥시켜야 할 대상’으로 못 박아 놨다는 점이다. 그냥 좀 그대로 놔 두면 안 되나. 모든 것이 깔끔하고 깨끗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이것도 잘 모르겠다.
이런 두 가지 전제가 도시재생이라는 단어 뒤에 숨은 폭력성인지도 모른다. 모든 도시, 모든 행정이 이 두 가지 전제를 깔고 논의한다. 그러니 모든 논의가 ‘어떻게 재생할까?’부터 시작한다. 사실 ‘어떻게 재생할까?’에 앞서, 재생을 할지 말지, ‘왜 재생해야 하는지’부터 논의해야 하는 건데 말이다.
대흥동에 출퇴근한 지 4년 차다. 겨우 4년인데 참 많이 변했다. 도로도 새로 깔고, 나무도 새로 심었다. 골목에도 이제 단독주택은 거의 없다. 모두 부수고 빌라를 세웠다. 모든 도로와 골목이 똑같다. 4년 전에도 이미 찾기 어려웠던 대흥동만의 냄새가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 그냥 어느 도시의 어느 동네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다. ‘문화예술의 거리’라는 푯말이 괜히 민망하다. 도대체 어디에서 문화예술을 느껴야 하는 건지. 비단 대흥동만의 문제는 아닐 거다.
살며 처음 이민을 상상했다. <핀란드 디자인 산책>이라는 책을 읽은 직후다. 책 한 권 읽었다고 해서 그 나라의 문화나 정서를 얼마나 이해할까 싶으면서도 그랬다. 핀란드에서 살면 행복할 거 같았다. 도시마다 골목길 걷는 재미도 있을 것 같고, 불필요한 조형물 때문에 눈살 찌푸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핀란드 디자인 산책>은 핀란드의 일상 속 디자인을 소개한다. 그 디자인 속에 녹아 있는 핀란드인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도시디자인을 소개하는 부분이었다. 핀란드인들은 도시계획을 세울 때 무엇을 채워 넣을지 고민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떻게 비울지를 고민한다. 자연 그 자체에 이미 인간이 손댈 수 없는 디자인 그 이상의 질서와 평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존 질서와 자연 생태계에 대한 존중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으능정이에 갔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었다. 스카이로드는 꺼져 있었다. 사실 그래서 뜨악했다. 스카이로드 영상이 꺼진 으능정이는 미국영화 속 할렘 같았다. 해도 지지 않았는데 영 어둑어둑한 것이 으스스하고 처연했다. 이것이 시민 세금 160억 원의 결과라니. <핀란드 디자인 산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디자인한 공간에서 진정으로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저 흉측한 스카이로드를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제작한 모든 이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저것이 아름답나요?
별스러울 건 없지만 말이에요
글 이수연
그날이 오기 몇 주 전부터, 엄마는 그 결혼식장엔 꼭 함께 가야 한다고 얼마나 많이 말했는지 모른다. 코흘리개 시절 같은 골목에 살던 친구의 결혼식이었다. 일곱 살 이전에만 한동네에 살았던 친구였다. 함께 곱씹을 만한 추억은 ‘네가 다섯 살 무렵에 이렇지 않았니’와 같은 것들뿐인 그런 친구였다. 그 친구뿐만 아니라 그 시절 함께 놀던 친구가 나까지 네 명이었다. 다 같은 나이라 엄마들도 제법 친하게 지냈다. 얼마 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는데 한 집에서 음식 한 번을 하면 쌍문동 이웃들 저녁 메뉴가 모두 같은 것을 보며 “우리도 저랬었나?”라고 엄마에게 묻자 잠시 생각에 잠긴 엄마가 “그랬지~”라며 말꼬리를 길게 뺐다.
여덟 살 이후론 사는 게 바쁘고 새로운 친구도 사귀어야 하고, 비슷한 동네였지만 곳곳에 이사 다니며 뿔뿔이 흩어진 우리는 서로 어떻게 사는지, 엄마들을 통해서 가끔 전해 듣는 정도의 사이만 되었다. 그래도 꽤 오래 같은 동네에 살며 정을 나눴고, 속 사정을 긴밀하게 나누었던 엄마들은 아직도 연락하며 서로를 챙기는 모양이었다.
“누구는 이번에 의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갔다더라.”
2015년 넷 중 A의 결혼식에 다녀왔고, B는 몇 년을 준비하던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B는 스무 살 이후로도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나 이야기 나누곤 했다. 만나면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시험 준비하며 만나던 남자 친구 이야기, 공부하며 드는 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 등 주로 그 당시의 이야기였다. 우리가 아무런 연락 없이 지냈던 때의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어릴 때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그 후에도 엄마는 가끔 “이제 공부 그만한다더라.” 혹은 “또 공부한다더라.”라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우리는 우연히 만나지 않으면 연락까지 해서 만나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몇 개월 만에 다시 엄마의 입에서 그 이름을 들었다. 다음 날 누군가 뱃속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게 이런 걸까요?”
내가 가고 싶은 곳도 아니었는데, 내가 그 친구와 만나던 때 하고 싶었던 게 지금은 뭐였는지, 그게 실체가 있었던 거였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친구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시험을 준비했고, 결국 합격했단다. 합격 소식을 들은 다음날 온종일 배가 뒤틀려서, 나는 괜히 그 친구와 엮어 배 아픔을 웃음 거리로 만들었다.
넷 중 하나는 결혼이라는 시작점을 찍었고, 누군가는 미래를 만드는 시작점을 찍었다. 발에 맞지 않는 뾰족구두를 억지로 끌고 나와 함께 놀던, 걔들이 서운하게 했다고 대문 앞에 앉아 펑펑 울었던, 빨간색 루즈 자국을 입에 묻히고 우는 내 모습을 보고 웃던 막내 이모가 미워서 더 많이 울었던, 별스러운 기억은 없지만 분명 어딘가 쌓여 있을 어린 시절 골목길 친구들이 변화를 시작했단다. 2016년이 괜히 별스럽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