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16호] 겨울에 가장 어울리는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 만나기

어느새 겨울이 되었다. 겨울이 되면 내가 꺼내 읽는 책이 있다. 바로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이다. 겨울이 되면 누구나 자신의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상념에 잠기게 마련이다. 이럴 때, 인간의 고독한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페소아의 책은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에 딱 어울리는 텍스트이다.

그리고 페소아는 얼마 전에 나온 나의 새 책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 라는 책 제목에 올린 작가이기도 하다. 책이 나온 후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 중에선 아직 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그런데 페소아가 누구예요?” 하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페소아는 내 책에서 <내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의 정체는 무엇일까?>라는 꼭지에 다룬 작가다. 과연 페르난두 페소아는 누구인가?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작가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사실 몇 년 되지 않는다. 나도 솔직히 풍문으로만 듣던 그 작가의 대표작 《불안의 서》를 접한 것은 지난 2012년 까치 출판사에서 《불안의 책》이란 제목으로 전체 완역이 아닌 부분 발췌본 형식으로 나왔을 때가 처음이었다. 한국에선 그동안 《양치는 목동》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단 한 권의 시집뿐이었고, 그나마도 오래전에 절판되어 구할 수도 없었다. 그 책 이후 갑자기 출판계에 페소아 열풍이 불어서 문학계나 문학 독자들 사이에서 페소아라는 이름이 많이 거론되었고, 2015년 마침내 문학동네에서 포르투갈어에서 직접 번역한 완역본 《불안의 책》이 나오게 되었다.

굳이 한국과 비유하자면 오늘날 포르투갈에서 한국의 근대 작가 이상 정도 되는 위치에 있는 작가다. 아마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포르투갈 작가이기도 할 것이다. 바로 그가 유작으로 남긴 작품 《불안의 책(Livro do Desassossego)》 때문이다. 이젠 이 책은 세계적으로 워낙 유명해 노벨 연구소가 2002년 100대 세계문학으로 선정하기도 했고, 영국 가디언지에서는 역대 세계 최고의 소설 100권에 포함하기도 할 정도가 되었다. 내가 《카프카의 서재》라는 책에서 소개했고, 또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랑을 받았던 아름다운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도 사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책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포르투갈에서도 페소아는 말 그대로 국민 작가가 된 것 같다. 요즘 포르투갈로도 여행을 많이 가시는데, 수도 리스본 시내 쉬아두 거리에 꼭 가 보시기 바란다. 그 쉬아두chiado 거리는 여행객들이 반드시 들르게 되는 거리다. 리스본 여행을 다녀온 한국인들이 블로그나 카페에 올린 사진들을 보면 쉬아두 거리의 유명한 카페 아 브라질레이라(A Brasileira) 앞에 앉아 있는 청동상 옆자리에서 찍은 사진들은 빠지지 않고 올라온다.

그 청동상 모델이 바로 페르난두 페소아(Fernan do Pessoa, 1888~1935)다. 그는 리스본을 너무나 사랑했고, 《불안의 책》에서도 끊임없이 리스본 거리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그리고 작가는 그 브라질레이라 카페 단골손님이기도 했다. 그 카페는 리스본의 예술가들이 자주 모여 토론하고 쉬던 카페였으니까.

얼마 전에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비미학》 이란 책을 읽는데 마침 페르난두 페소아를 분석하고 있었다. <페소아와 동시대인 되기, 라는 하나의 철학적 과업>이라는 실로 거창한 제목의 평문이었다. 이 평문에서 알랭 바디우는 페소아가 반세기나 지난 후에 재발견된 시간적 “격차”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 격차 문제는 “이 세기의 중요한 시인 중 한 명에 관한 문제이며, 특히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그의 시를 생각하려 할 때 그러하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 10년간의 철학을 포함한 금세기의 철학은 페소아의 시적 작업을 자신의 조건으로 삼을 능력과 방법이 있었는가?”라는 매우 놀라운 질문을 던진다. 그에 따르면 페소아는 ‘현대성’ 즉 모더니티 문제에 관해 시대를 크게 앞서간 작가였으며, 철학계는 그의 작업을 따라잡고 사유할 능력이 없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페소아에게 정신적으로 사로잡히는 까닭은 그의 시의 현대성 속에는 철학이 다 파헤치지 못한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는 페소아의 시 작업이 예술을 그동안 규정해 온 플라톤주의와 반플라톤주의를 뛰어넘는 제3의 지대를 열어 보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이명을 사용한 작업은 “하나의 문학 세계 전체, 하나의 문학적 짜임을 전개했으며, 금세기 사유의 모든 대립과 문제들이 거기에 기록”된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만큼 철학자 알랭 바디우에게는 페르난두 페소아가 20세기를 뛰어넘어 새로운 철학적 예술적 지평을 개척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는 듯하다. 페소아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바디우의 이 평문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란다.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에서는 바디우처럼 어렵고 난해한 철학적 분석을 행하진 않았다. ​그보다는 페소아가 현대라는 시대를 사는 개인이라면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내면의 끝없는 불안, 고독,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을 깊이 탐구한 작가로, 그의 글을 읽으면 절로 공감하게 되는 아름다운 글을 쓰는 작가로 보고 있다.

“나는 살아 있는 무대이며, 다양한 배우들이 다른 역할을 연기하면서 그 위를 지나간다.”

이 문장처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멋진 시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다. 나는 이 책에서 페소아를 소개함으로써 국내에서 페소아를 알고 읽게 되는 분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도 갖고 있다. ​그리고 페소아를 만나고, 그를 조금 더 잘 이해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결국, 제목에 페소아를 올리는 걸 동의한 것도 그런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 2시라는 고독하고 고즈넉한 시간에 조용히 만날 만한 작가가 누가 또 있을까? 마초남 헤밍웨이? 파티남 스콧 피츠제럴드? 첩보원으로 활동했던 활력남 서머싯 몸? ​어쩌면 버지니아 울프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평생을 고독하게, 연애도 제대로 하지 않고 오직 사색과 글쓰기로 분투하며 실존의 내면을 파고들었던 페르난두 페소아야말로 적격이 아닐까 싶다. 가령 이런 문장을 만나면 누구나 영혼이 흔들리지 않을까? “내 영혼의 깊은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힘들이 갈등하고 있었다. 이때 나의 존재는 전쟁터였으며, 나는 알 수 없는 충돌 때문에 몸을 떨었다. 잠을 깨는 순간 내 인생 전체에 대한 물리적인 구역질이 올라왔다. 살아야 한다는 공포감이 나와 함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든 것이 공허한 듯하여 나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실감했다. 거대한 불안이 나의 사소한 몸짓까지도 얼어붙게 했다. 나는 광기가 아니라 바로 이 사소한 몸짓 때문에 미칠까 봐 두려웠다. 나의 육신은 억눌린 외침이었다. 나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흐느껴 우는 것처럼 들렸다.”

불면으로 잠을 뒤척이는 밤, 까닭 없는 고독과 외로움으로 마음이 축축해지는 그런 겨울날의 밤, 이런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페소아를 만나 대화를 나누면 깊은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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