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4호]일상의 덧



 
 
 

밀림이 깨운 어느날-『비숲』
-글 성수진



누군가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뭐냐고 물어보면 마크 롤랜즈의 『철학자와 늑대』를 말하곤 한다.
몇 해 전 읽은 이 책을 떠올리면 지금도 그 뜨뜻한 울림이 전해져 온다. 늑대 ‘브래닌’과 함께 살며 인간을 성찰하고 인생을 고민하는 마크 롤랜즈를, 한편으로는 동경했던 것 같다.
동물은 여러 콘텐츠에 주제로, 소재로 등장한다. 나는 그 동물들을 좋아한다. 인격이 부여된 캐릭터들을 여러 번 곱씹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인간이 해석한 한 개체들을 궁금해한다. 
얼마 전 우리나라 최초의 영장류 학자인 김산하 박사가 쓴 『비숲』을 읽었다.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인터뷰를 듣고 한번 읽어 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서점에서 만났다.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었다. 김산하 박사는 인도네시아의 밀림 구눙할리문쌀락 국립공원에서 긴팔원숭이를 연구하며 느꼈던 여러 단상을 엮어 『비숲』이란 이름의 책으로 냈다. 

비가 내리면 몇 초 만에 홀딱 젖으며 멀리서 함성이 들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정지하는 경험. 인도네시아 밀림에 내리는 비는 그렇다고 한다.
식물들이 서로 햇볕 경쟁을 하느라 숲의 지붕이 잎과 가지로 촘촘히 덮인 곳, 그 촘촘함 사이 좁은 틈새로 빛의 조각들이 들어 오는 곳. 김산하 박사가 대신 전해 주는 밀림의 모습이다.
이 밀림에서 김산하 박사와 연구팀은 긴팔원숭이를 연구했다. 원숭이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묵인해 줄 때까지 연구팀은 원숭이를 따라 다녔다.
하늘로 뻗은 나무 위로 유연하게 다니는 원숭이와 달리, 울퉁불퉁한 땅을 밟으며 이들을 추적하는 과정은, 내가 직접 연구팀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된다.
내가 전혀 몰랐던 한 세계, 지구의 허파라고 하는 곳의 묘사는, 어느 다큐멘터리 영상이나 사진을 보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미있다. 김산하 박사의 시각,
때로는 연구자로서의 냉철한 관찰로, 때로는 어린아이의 것과 같은 호기심으로 묘사되는 그 대자연은 위대하기 그지없었다. 긴팔원숭이 그리고 연구팀과의 여러 에피소드도 몇 편의 시트콤을 보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김산하 박사에 감정을 이입해 20편의 이야기를 따라 읽다 보면 책장을 금방 덮게 된다. 그렇지만 그 밀림의 세계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밀림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잠이 든 날의 아침, 휴대전화 알람이 울릴 때 액정에 뜨는 두 글자에 잠에서 깼다.
‘밀림’. 잠결에도 어이가 없어서 그 액정 속 광경을 스크린샷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알람’이라고 쓰여 있었다.


 

 

누가아줌마를 초조하게 만드는가
-<길버트 그레이프>와 집 

-글 이혜정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를 처음 본 건 중학생, 아니면 고등학생 때인 것 같다. 길버트(조니 뎁)는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 지적장애인 어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산다.
그들이 사는 집은 아버지가 지은 것이다. 아버지는 지하에서 목을 매 죽었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500파운드가 나가는 거구가 된다. 마을의 작은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는 길버트는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어니를 돌보며 열심히 살아간다. 일상의 무게에 짓눌린 길버트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그는 자신이 집을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행용 트레일러를 타고 여행 중인 베키를 만나면서 길버트는 조금씩 변화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집을 불태우는 장면이다. 500파운드가 넘는 어머니가 2층 침실에서 갑자기 숨을 거두어서, 밖으로 옮기려면 기중기를 동원해야 할지도 모른다.
가족들은 어머니를 비웃음거리, 구경거리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집을 어머니의 시신과 함께 통째로 태우기로 결정한다.
텅 빈 들판에서 나무로 만든 집은 활활 불타오른다. 바닥에는 끌고 나온 가구와 살림들이 늘어져 있다.
길버트와 그의 가족들은 그 불꽃을 홀린 듯이 바라본다. 집이 불타면서,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던 슬픔과 무기력도 사라진다.
청소년 시기에, 나는 자주 탈출을 꿈꾸곤 했다. 현실과 학교, 집으로부터의 탈출. 특별히 불행할 일도 없었는데 언제나 나를 사로잡았던 건 ‘여기’가 아닌 ‘거기’였다.    
집은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은신처이다. 집은 신체가 쉴 곳을 제공하며, 그 안에서 우리는 먹고 자고 애정의 보호를 받는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경제활동을 하고 다양한 교류를 하지만, 평온한 집이야말로 평생을 돌아다니며 살아야 하는 동물인 인간에게 꼭 필요한 휴식 공간이자 로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은 가끔 족쇄가 된다. 집이 단순한 거처가 아닌, 존재의 이유가 될 때 사람은 사육되는 것이 아닐까.
고여 있되 흐르고, 흐르되 고여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닌 법이다. ‘아파트’로 대변되는 자산으로서의 집,
자신의 자녀가 사회적으로 더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 단위로서의 가정. 그런 것만이 중심에 놓인다면 집은 존재를 가두는 곳이 될 수도 있다.

결혼을 하면서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때가 많아졌다. 이 사회나, 남의 탓만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집’이라는 보편적, 사회적,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무엇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위안을 주는 삶의 거처로서의 집,
그리고 세상의 또 다른 연대와 다양한 삶의 가능성과 교류하는 장으로 출발하기 위한 공간. 그런 집을 꿈꾸어 본다. 거기에 개인적인 노력과 책임이 따르는 건 당연하겠지. 
아, 길버트, 길버트. 길버트 그레이프는 왜 초조한 걸까. 이 영화의 원작인 『누가 길버트 그레이프를 초조하게 하는가』를 꼭 읽어 보리라.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아줌마는 초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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