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16호]세월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변동은 그렇게 조금씩 늙어간다

변동에 산다. 1년 전, 단독주택의 꿈을 안고 부동산을 찾았다. 아저씨는 “대전에서 단독주택은 변동에 제일 많으니까 그쪽으로 가 봐.”라고 했다. 그렇게 변동 주민이 됐다. 오랜만에 동네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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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상 변동은 월평공원과 유등천 사이에 길게 뻗어 있다. 남쪽으로 도마동, 북쪽으로 가장동, 내동과 경계한다. 변동(邊洞)이라는 지명은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 유등천 변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갓골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사실 내동중학교가 있는 서쪽 끝 동네까지 모두 변동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함이 있다. 자연마을 단위로 보자면 변동네거리 기준으로 동쪽, 유등천 변에 기댄 두 블록 정도를 하나의 마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두 블록을 중심으로 둘러보았다. 

변동에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한 건 1980년대 초부터다. 당시만 해도 신흥단독주택지역이었다. 37년 전, 변동으로 이사 왔다는 오연규(84) 할아버지는 당시 풍경을 생생히 기억했다. 

“내가 이사 왔을 때 이 동네에 집이 딱 세 채였어. 내가 네 번째로 이사 왔던 거여. 자네, 김용태라고 알어? 공화당 시절에 국회의원 했던 사람. 지금 변동네거리 자리에 그 사람 집이 으리으리하게 있었어. 빨간 벽돌집이었어. 부지가 넓어서 단층이긴 했어도 멀리서 보면 멋있었어. 그 집이랑 유등천 쪽으로 단독주택 두 채 더 있었고. 그게 다였어. 그 전까지는 이 동네가 전부 밭이었어. 시에서 신흥단독주택지역으로 지정하고 구획 정리하면서 집이 하나둘 늘기 시작한 거지.”

불과 10여 년 만에 변동은 단독주택으로 가득 찼다. 땅값이 싼 덕분이었다. 시내로 나가자면 무조건 도마네거리까지는 걸어야 했다. 그곳에서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유등천을 건너는 태평교가 생기고, 도산로가 생겨 버스가 변동까지 들어온 건 한참 후의 일이다. 교통편이 불편하니 땅값이 쌀 수밖에 없었다. 공무원이나 오연규 할아버지처럼 은행에 다녔던 사람들 정도가 겨우 집을 짓고 살았다. 대개는 값싼 1층 쪽방이나 2층에 세 들어 살았다. 

“원도심 기준으로 봐도 그렇고, 신도심 기준으로 봐도 그렇고 여기는 변두리잖어.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변두리 동네였어.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도 대부분 품팔이 노동자나 장사꾼이었어. 드물게 공무원 조금 있었고. 밥 굶을 정도는 아니었어도 다들 겨우겨우 먹고 살았지. 그러니까 교통이 불편해도 이 동네로 모여든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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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0대에 평생 모은 돈으로 집을 사서 이사 왔던 주민들이 이제는 다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다. 그 시절 동네 골목골목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결혼해서 이제는 어쩌다 한번 손주들을 데리고 온다. 골목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어진 건 아주 오래전이다. 
그 세월만큼이나 변동을 가득 채운 주택도 많이 낡았다. 대부분은 20~30년씩 나이를 먹은 주택이다. 자꾸 고치고 손을 봐도 겨울이면 바람이 차다. 빈 주택이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당시 이사 왔던 사람들이 이제 70~80 노인들인데 보일러는 자꾸 고장 나지. 바람은 차지. 노인들이 오래된 주택에서 살 수가 있나. 자식들도 다 출가했겠다, 낡은 집 버리고 아파트로 들어가는 거여.”

오연규 할아버지도 얼마 전, 30년 넘게 살던 주택을 팔고, 바로 앞 빌라로 이사했다. 할아버지가 살던 주택은 빌라 주인이 매입했다. 할아버지가 살던 주택 뒷집도 빌라 주인이 매입했다. 옆집과 대각선집도 매입할 예정이란다. 모두 헐고 조만간 새로운 빌라를 짓는단다. 할아버지는 그때까지만 살던 집을 창고로 쓰기로 했다. 

마당에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까치밥까지 모두 내주고 가지만 앙상했다. 할아버지가 집 지을 때 심은 나무다. 허리춤만 하던 묘목이 언제 금방 자라 아이들 간식 역할을 톡톡히 했었다. 오연규 할아버지는 감나무를 쓰다듬으며 “어쩔 수 없어. 산 사람은 또 살아야지. 어쩌겄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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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로 나왔다. 변동네거리에서 태평교를 잇는 변동로는 변동의 중심거리다. 10여 년 전까지 태평교 쪽으로는 ‘파라다이스’라는 큰 뷔페가 있었고, 변동네거리 쪽으로는 변동종합시장이 시끌벅적했다. 그 사이로 음식점과 술집에 사람이 가득했다. 나름 번화한 거리였다. 모두 지난 이야기지만 말이다. 

파라다이스 뷔페는 대전에서 엑스포가 열리던 1993년 개업했다. ‘대전에서 뷔페 하면 파라다이스’ 하던 시절이 있었다. 돌잔치든 회갑잔치든 동문회든 행사 장소 1순위였다. 파라다이스를 운영했던 박찬평(59) 씨는 그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평일이건 주말이건 사람이 북적북적했죠. 장사가 안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들어오면서예요. 세월 따라 자연의 순리였어요. 더 좋은 뷔페가 생겼으니까요. 뷔페라는 게 단골 장사가 아니기 때문에 맛과 서비스보다는 시설이거든요. 돌잔치든 회갑잔치든 누군가에겐 평생에 한 번뿐인 행사잖아요. 돈이 조금 더 들더라도 이왕이면 좋은 뷔페에서 하고 싶은 거죠.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2005년쯤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죠.”

파라다이스가 문을 닫을 때쯤 변동종합시장도 하락세를 걷기 시작했다. 시장이 생긴 건 35년 전쯤이다. 변동에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당시 돈 많던 투자자가 2층짜리 주상복합건물 8채를 ㅁ모양으로 다닥다닥 지어 시장을 조성했다고 한다. 한 건물당 가게 네 곳이 입점했다. 적어도 32곳 이상이 시장에 있었던 거다. 2층은 상인들 주거공간으로 활용했다. 한때는 건물 안쪽으로 노점상이 줄줄이 들어섰을 만큼 장사가 잘됐다. 1987년부터 시장에서 정육점을 했다는 유태근(60) 사장은 그래도 그때는 먹고 살만했다고 말한다. 

“그래도 그때는 가게 운영해서 한 가족 먹고 살았으니까요. 돈도 조금 벌었고요. 일단 사람이 북적북적하니까 흥이 났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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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변동시장 안에 가게는 10곳 남짓이다. 2층에는 겨우 6가구가 산다. 시장인데도 적막하다. 시장 안쪽으로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긴다. 가게가 하나둘 문을 닫다 보니 장사는 더 안된다. 

“시장이라는 게 구색을 갖춰야 하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제사상을 차리려고 해도 과일, 채소, 정육점, 건어물, 생선 다 있어야 하는데 여기는 건어물도 없고, 생선도 없고, 슈퍼도 없으니까 사람들이 점점 더 안 찾는 거죠. 변동시장이 좀 활성화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북적거렸던 변동시장이 쇠락한 건 교통편이 좋아지면서다. 태평교가 생기고 도산로가 뚫리면서 주민들의 생활범위가 확장됐다. 교통편이 불편해서 땅값이 쌌고, 그래서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그 기반에 시장이 생겨났다. 그랬던 시장이 좋아진 교통편 때문에 쇠락하게 됐단다. 어쩐지 아이러니하다. 세월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변동은 그렇게 조금씩 늙어간다. 이 동네에 처음 터를 잡고 살아온 어르신들과 함께 말이다. 

부동산 아저씨 말마따나 변동엔 주택이 많다. 높은 건물이라고 해 봐야 유등천 변에 붙은 한 동짜리 아파트가 전부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골목에서건 탁 트인 하늘이 보인다. 구구절절한 사연과 무관하게 그날의 변동 하늘은 참으로 맑았다. 그런 동네다. 변동은. 

                 


글 사진 송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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