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16호] 별빛과 전구사이의 송년가

낙엽이 지고 허망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바로 빈 나뭇가지에 성탄 장식용 전구가 화려함을 자랑한다. 올해도 예외 없이 도시의 가로수는 낮에 보면 죄수처럼 온몸에 전선을 감고 서 있다. 그 덕분에 봄이 오기 전까지 도시의 밤은 쉴새없이 깜빡이는 휘황한 전구 불빛 속에서 연말을 맞고 새해를 맞는다. 물론 그 불빛을 보며 즐거워하며 도시의 삶을 행복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겨울의 본질은 휴식이고 텅 빈 여백 같은 것이다. 겨울을 제대로 느끼려면 캄캄하고 조용한 곳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성탄 전구를 피해 조용한 시골마을로 가 본다. 그곳에는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밝은 별이 빛난다. 휘황하지 않아 더 빛나는 겨울밤의 별빛이 오롯하니 좋다.

초겨울 저녁, 해가 진 뒤 서쪽하늘에 나타나는 개밥바라기별 금성은 밤의 오프닝이다. 그리고 언제나 빠지지 않는 카시오페아 북두칠성, 겨울하늘의 웅장한 오리온 자리와 눈이 시릴 만치 밝은 시리우스, 북극성, 은하수들은 밤하늘의 전설과 이야기를 끝없이 풀어내 준다. 그러다 마침내 금성은 밤사이 하늘을 다시 돌아 새벽 동쪽하늘에 다시 떠서 밤을 마무리하는 클로징 역할도 맡고 있다.

우리가 보는 별은 사실 우리가 바라보는 그대로의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육안으로 바라보는 별은 이미 존재가 사라져버린 것도 있을 수 있다고 하니 별을 본다고 하는 것은 그저 빛이 이제야 지구에 도달했을 뿐이기 때문에 사실 허상을 보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빛을 본다는 측면에서 별보기는 추억 보기와 다름 없다는 생각도 종종 하게 된다. 실제 내가 바라보는 별은 반짝반짝 아름다움의 결정체 같지만 정작 그 별의 실체는 그리 아름답지도 않고, 오히려 달 표면의 분화구나 시커먼 흙처럼 암울한 상태일 수도 있다. 단지 멀리서 보기 때문에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스라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별보기처럼 세상도 기억도 멀리 놓고 볼 때 아름다울까? 그룹 비지스의 그 유명한 노래 <5월 1일(First Of May)>을 살펴보면 싱그러운 녹색이 샘솟는 5월을 노래하고 있지 않다.

                                          

“내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트리는 내 키보다 컸지. 우리의 소꿉장난은 사랑으로 변하게 되었어. 그런데 그 시절은 왜 가 버리고 말았는지. 누가 가지고 가 버렸는지. 이제 우리는 자라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내려다보게 되었지. 옛날을 얘기하지 말아. 우리의 사랑은 결코 죽지 않을 거야.”

비지스의 는 생동하는 5월의 노래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나가 버린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그리는 노래다. 지나간 시간을 아스라한 별을 보듯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노래다. 지나가 버리면 기억은 면사포를 쓰고 연지곤지를 찍고 치장을 하는지도 모른다. 아픈 추억도, 지워버리고 싶던 날들도, 조명을 잘 비춰 찍은 사진이나 아름다운 그림처럼 멀리 바라보면 달라지는 것 같다.

올해 여름 2016년의 더위처럼 짜증나고 힘든 것이 있었을까? 얼굴에 로션만 발라도 바르는 즉시 줄줄줄 흘러내리고, 찬물 샤워를 하자마자 수건으로 닦으며 땀범벅이 되던 기분 나빴던 기억, 아스팔트에 한 걸음만 떼어도 녹은 아스팔트에 신발이 달라붙을 지경이고, 고무장갑을 쓰고 나서 벗어 놓으면 두 짝이 녹아서 들러붙고, 땅이 펄펄 끓어댈 기세로 땡볕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여름도 눈이 펄펄 날리는 한겨울에 떠올려보면, 그 기억도 어느새 다시 연지곤지 찍고 치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새 힘들었던 여름은 벌써 시원한 팥빙수, 지중해빛 파란 바다, 숲속의 서늘하던 바람 같은 그리운 풍경만 남아 새롭게 채색되어 있을지 모른다.

아픈 기억도 쓰라렸던 시간들도 멀리 보는 별빛처럼 채색되는 것은 다행이다. 떠올리기 두렵지 않게 되니까…. 하지만 우리는 시대의 아픔, 지독한 가난, 독재의 지독하던 시절도 잊어버린 나머지 미화까지 시켜 놓았다. 많은 사람이 이제 와서 말했다. 그래도 그때는 밥 먹여 줘서 좋았다고…그때를 돌아보면서 어른들은, 그때가 좋았다고 한다. 그렇게 좋았던 기억만 남기고 어두운 기억은 어디다 버린 것일까? 사는 게 너무 징글징글 고달파서 술 마시고 넋두리 한 번 했다 붙잡혀 가서 고문 당하고 인생이 구겨져서 처박혔던 많은 사람을 잊었다. 독재에 항거해 외치다가 몸이 만신창이 되고 원치 않게 세상을 등져야 했던 이들을 잊어 버렸다. 아스라한 별빛처럼 멀리 놓고 미화시켜 버린 수많은 억울한 이야기가 무수한 별처럼 많다. 어쩌면 그래서 다시 이 세상의 겨울이 온 것은 아닌지, 암흑이 온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올해는 어느 때보다 빛이 많았다. 광화문을 채운 백만의 촛불들, 그리고, 전국을 밝힌 수많은 촛불의 행렬이 있었다. 어둠에 잠겨버린 시대를 밝힐 새로운 불빛에 의지해 다시 어두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한다. 세상에는 지켜내야 할 진정한 아름다움의 존재가치도 있는 것이지만 기억의 오류를 바로잡으며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내 기억 속을 자주 점검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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