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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5호] 길에 믇는다_여행자 이예나
동생 일기장을 훔쳐보던 심정으로 이 사람의 SNS 계정을 봤다. 하얗던 얼굴이 새까맣게 타서 거뭇거뭇해질 때까지,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하고 시골 마을부터 도시로 경계를 넘나드는 것까지, 외국의 수많은 관광지에서 각기 다른 색의 한복을 입고 서서 찍은 사진까지. 가만히 앉아 손가락 두 개를 위로 올리며, 이 사람의 지나간 시간을 봤다. 거기엔 길을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 거기에서 불쑥 올라온 생각, 여행하는 이유와 마음에 품은 이야기들이 간헐적으로 올라왔다. ‘지속 가능한 노는 삶을 추구한다’는 난해한 이 문장을 삶에 어떻게 실천할지 본인도 모른다.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표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길에서 계속 묻는다. 사람에게도 부는 바람에도 답은 없지만 길은 어디에도 있었다.
나는 회색 인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생각만 해도 앞이 캄캄했다. 대학에 입학하고는 남보다 빨리 취업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혼자 도서관 칸막이에 콕 박혀서 책과 씨름하는 게 대학 생활의 주된 일과였다. 입학하고 한 번의 휴학 없이 죽 대학에 다녔다. 4학년 여름,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계절이었다.
“저 대학 때 별명이 회색 인간이었어요. 세상사 걱정은 혼자 다 해서 얼굴이 회색빛이라고 친구들이 그렇게 불렀어요. 학교 다니는 내내 도서관에서 죽치고 있었던 건, 먹고사는 걱정 때문이었어요. 그걸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그렇게 대학 내내 도서관에 있었고, 4학년 여름방학에도 도서관에 있었어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는데 패잔병 같았어요. 문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해외에 나가고 싶었는데, 명분이 있어야 했어요. 정부 해외인턴 프로그램을 신청했는데 합격했어요. 최대 18개월 정도 일할 수 있는데, 18개월 전부 채웠어요. 외국에서 일하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나중에 취업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당연히 있었다. 그렇게 오래 꽉 채워서 있을 줄도 몰랐다. 겁쟁이에 소심했던 나는 늘 있던 곳을 벗어나니 진짜 나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가 한꺼번에 기억이 돌아온 것처럼 혼란스럽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저랑 같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많은 친구가 한국에 먼저 돌아갔어요. 친구들과 연락하는데 마치 그때의 일을 꿈처럼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시 한국에 가면 나도 미국에서의 일이 일장춘몽이 되어 버릴 것 같았어요. 미국에서 찾은 나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려면 무언가 강한 기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나를 지키고 싶었다
18개월의 인턴생활을 끝내고, 배낭여행을 시작했다. 7개월, 7개국, 70개 마을 프로젝트라는 이름이었다. 외국인 친구와 대화 중 한복을 입고 떠나야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7개월은 15개월이 되었고, 7개국은 8개국이 되었다. 마을은 몇 군데나 갔는지 세어 보지 않았다. 배낭을 메고 한복을 입고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산에 오르기도 하고, 패러글라이딩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탔다. 도둑을 맞아서 거리에 푹 주저앉아 몇 시간을 멍하게 한나절을 보내고, 하루 벌어 사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얻기도 했다. 우연과 인연, 운과 노력이 만나서 1년 넘도록 무사히 여행할 수 있었다.
“위험한 때도 많았어요. 그런데 좋았던 일, 도움받았던 일이 훨씬 많았어요. 한 친구가 그렇게까지 여행을 하는데 이렇게 멀쩡한 걸 보면, 네가 사람을 잘 믿어서 그런 것 같다고. 너무 믿으니까 나쁜 마음을 먹을 수 없겠더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외국에서 사귄 친구 중에는 소매치기 무리도 있었다. 자기들 영역에 들어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종일 떠드니 이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훔친 돈으로 빵을 사 주고, 외부로부터 지켜 주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에게 받으면서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생각했다. 종이에 할 수 있는 일을 몇 개씩 적어서 실천하곤 했다. 거리에서 쓰레기를 줍고, 사람들을 보면 인사하고, 한국 음식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한국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매일 길에서 받은 수많은 것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길을 걸었다.
나는 어디에서도 나다웠으면 했다
“제가 느끼는 이 자유가 한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런 의심은 저 자신도 했어요. 내가 있는 곳이 남미였기에 그랬다면, 그건 환경이 바뀐 거지, 내가 바뀐 게 아니잖아요. 지속 가능한 노는 삶을 사는 거, 그게 지금 제 바람이에요. 한국에 돌아왔을 때, 1년짜리 비자를 받았다는 생각으로 왔어요. 한국에서도 충분히 같은 방식으로 여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를 아는 사람 대부분 저를 말렸어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외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요.”
경기도 성남 근처
여행을 막 시작했을 때 신안 여교사 사건이 일어났고, 혼자 등산하던 주부가 성폭행 후 살인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강남역 여대생 살인 사건도 터졌다. 주변 사람들은 섬에 가지 말라고 했고, 산에 가지 말라고 했고, 화장실에 함부로 가지 말라고 했다.
“다 그냥 갔어요.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아무도 너를 차에 태워 주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길에서 히치하이크를 할 때마다 성공했어요. 저를 태워 주신 분 대부분 ‘아무도 너를 안 태워 줄 것 같아서’ 태워 줬다고 이야기했어요.”
양평 광탄유원지
한국에서의 100일간 무전여행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부모님을 모시고 중국에도 다녀오고, 대전에 있는 집에 머문 지 3주 정도 됐다. 그렇게 한 번씩 여행을 쉰다고 느낄 때마다 두려움이 온다. 남과 다른 삶을 사는 건 수영을 배우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물속에서 살아남을 정도까지 수영을 배울 수 있었던 건, 수백 번 죽을 뻔한 고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물에 빠지면 죽는 이유 중 하나가 허우적대기 때문이거든요. 허우적대다가 물을 먹고, 구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기운이 빠져서 죽는 거예요. 현실을 마주 볼 때마다 물에서 허우적대는 것 같아요. 이러다가 굶어 죽지는 않을까,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건 아닐까. 지금 물속에서 물을 먹고 있는 거예요. 이제는 물속에서 빠져 죽지는 않을 정도는 되었는데, 아직도 물속이라는 게 두려울 때가 있어요.”
나는 내가 믿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많이 만나는 건 ‘나’였다. 철퍼덕 바닥에 누워 새까만 하늘을 보다가도 나를 생각하고, 거리를 걸으면서도 저 멀리까지 펼친 풍경을 보면서도, 나를 생각했다. 그게 곧 진리인 것처럼 자만하기도 했다.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내가 경험해서 얻은 것들이기에 전부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생각만으로는 절대, 제가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고, 행동이 꾸준함으로 가서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될 때까지 노력할 거예요. 그래야 지속 가능한 노는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페루 천연염전 살리네라스
여행하면서 많은 친구를 만났다. 그중에서는 비슷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사람을 ‘희피’라는 이름으로 모아 함께하면 더 좋을 것 같다. 혼자 꾸는 꿈은 단순한 꿈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언젠가 다시 다른 꿈을 꿀 수도 있다. 한복 따위는 지겹다고 던져 버릴 수도 있다. 내가 한 말에 갇혀서 강박에 시달리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나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오늘 길을 걸으며 바람을 맞을 때 행복했던 것처럼. 훗날 잘 놀았다고 웃으며 떠날 수 있도록. 나중을 위해 지금을 땅에 묻으며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며 행동할 뿐이다.
글 사진 이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