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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4호]다우트:존패트릭 샌리 2008
#1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에는 언뜻 관계에서 얻은 고단함이 엿보인다. 그다음 문장에 따라 의미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한다는 의미로 귀결된다면, 자신도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아 쓸쓸해진다. 이해하고 이해받으려다 보면 의심과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오해는 쌓아 두면 얼음처럼 단단해져, 그것이 곧 그 사람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것을 돌려놓기란 지난하고 험난한 과정이 요구된다. 하지만 애초에 상대를 의심하고 오해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해서라거나, 엄연한 진실보다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더 믿어 오해를 선택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숱하게 그런 유의 선택을 경험하고 괴로워해 왔다. 오해한 자는 자신의 서툰 확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에게 문제점을 찾아 공격하고, 자존심과 손익의 문제로 변질시켜 더욱 오해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본질과 무관한 양상으로 번지고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우리의 일상에서 간혹 벌어지는 측은한 경우이다. 영화 <다우트>는 1964년 뉴욕의 천주교구라는 제한적이고 보수적인 시공간을 설정하여,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 측은한 경우를 다루고 있다.
#2
얼마 전 사제복을 입은 강동원이 멋있다는 소문에 <검은 사제들>을 본 관객으로서, 같은 옷을 입은 <다우트>의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훨씬 중후하고 멋있다는 생각이다.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홍조 띤 얼굴과 큰 덩치로 담배와 포도주를 흡입하는 신부의 모습을 일면 탐욕스럽게 보이게 하기 위해, 감독은 꼭 그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메릴 스트립의 퀭한 눈과 스산한 표정은, 그 기운을 눌러 정갈한 수녀복 안에 칼날같이 숨겨 두었다. 내용은 이렇다. 예배와 교육을 함께하는 한 천주교구의 원장 수녀는, 자신보다 상급자인 신부의 평소 행실을 보며 그의 성적 취향을 의심한다. 그러던 중 한 평교사 수녀가 학교의 유일한 흑인 남학생 도널드에게서 술 냄새를 맡았다는 사실을 원장에게 보고한다. 뒤이어 도널드가 있던 사제관에서 신부가 걸어 나왔다는 사실도 말이다. 삼자대면한 신부는 도널드가 포도주를 마시는 실수를 했고, 그 일로 학교 내 일자리를 뺏기는 것을 눈감아 주기 위해 비밀로 했다고 해명한다. 그럼에도 원장 수녀는 그와 도널드의 부적절한 관계를 확신하고 추궁한다. 결국 그녀는 그의 성적 취향에 대한 단서를 발견하고 파면시키고자 주교에게 보고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다. 신부는 스스로 교구를 떠나고 이후 대주교의 진급명령으로 다른 성당의 주임신부로 발령받는다. 원장 수녀는 그가 떠난 것을 두고 과오를 시인한 것이라 스스로 위안하지만, 문득 자신의 확신에 의심이 든다며 평교사 수녀 앞에서 오열하고 만다. 이 영화는 불명확한 근거로 누군가를 의심하고, 그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 상대를 공격하고,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끝내 인간을 오해하고야 마는 자신의 비정한 모습에 스스로 무너지는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3
영화를 본 관객은 아마도 원장 수녀의 모습에 반감을 느끼고 신부의 억울한 표정에 감정 이입 할 것이다. 그는 정말 답답해 보인다. 이 표정에는 가능과 행위 사이의 무고함이 있다. 마치 그가 ‘한 남자’인 것과, 그래서 성범죄를 저지르는 행위를 ‘했을 것이다.’라는 추측에서 오는 무고함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원장 수녀의 의심은 모두 맞았다. 흑인 학생 도널드는 동성애를 가지고 있었고, 원장 수녀의 추궁에 ‘모든 걸 말할 수는 없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다.’는 신부의 언급으로 보아 그 역시 동성애자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그들의 성 정체성이 아니다. 흑인 아이를 비호하는 그의 엄마, 비올라 데이비스의 입장이 그렇다. 설사 아이가 신부를 동성으로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게 태어난 아이의 잘못도 아닐뿐더러, 아이에게 잘해 준다는 이유로 부적절한 행위를 확신해 자신의 아이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부가 말한 ‘말할 수 없는 것’에 정말 행위도 포함된다면, 그는 그것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떠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가 진급을 하든떠돌이가 되든, 원장 수녀의 입장에서는 싸움에서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 부정하며 이야기를 끝낸다. 누군가에 대한 의심이 근거 없는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의심은 해결되지 않은 근거를 이끌고 방향을 바꿔 확신하고 있는 주체를 추궁하곤 한다. 그리고 자신의 확신이 상대에게 주었던 상처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받게 된다. 결국 그녀는 확신에 찬 자신 역시 의심받는 고통에서 지켜 내기 위해 몰려드는 인간적인 감정을 외면했고, 더 이상 자신이 알던 자신이 아닌 게 되어 버렸다고 느꼈을 것이다. 수녀인 그녀는 이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표현한다. 결국 의심과 오해가 폭력이 되는 과정을 조작하며, 그 결과 자신이 망가졌다는 것을 목도하는 순간 오열하게 된다. 관객도 이 순간 그녀의 뜬금없는 눈물에 함께 울컥하게 되는데, 이는 영화 내내 그녀의 행동을 보며 확신했던, 그녀라는 사람에 대한 오해가 뒤집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내내 자기 확신을 거두지 못한 이유,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린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이는 극 중 신부가 타 먹는 과한 설탕의 개수에 대한 반응과, 공연에 필요한 캐럴을 고르며 트렌디한 음악을 거부하는 것에서 표현된다. 그녀는 불안정하고 불명확하며, 부덕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죄를 지어 수녀가 되었다고 고백했던, 그래서 어떤 방식과 태도를 응축해 온 자신이, 다시 무엇에 영향을 받아 흔들리고 변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돌아보면 그녀는 신부와 싸우며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마치 악마를 퇴치하려는 듯 신부를 향해 십자가를 들이밀기도 한다. 강해 보이지만, 그녀가 구축한 신념의 유약함은 쉽게 들켜 바스러진다. 결국 그녀는 두려움을 피해 쌓아 온 것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로 인해 무너지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4
어떤 신념이건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것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공(空)으로 돌아갈 무의미한 것이라도 말이다. 또한, 시간을 두고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과 어긋나 힘을 쓰게 된다. 어떤 이유로 그 태도나 신념을 고칠 용기나 기회를 갖지 못해 버티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긴 관계의 상처도 자기연민으로 치환해 보상받으려 하기 쉽다. 끈끈한 자기연민은, 지켜온 신념을 둘러싸 무엇에도 파괴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견고하게 다진다. 거기에 시간이 흘러 자신이 무엇을 위해 버티고 있는 것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은 곧 그 사람이 되어 되돌아갈 지점을 영영 잊기도 한다. 원장 수녀 역시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오며 겪은 상처를 버텨 내기 위해, 자기만의 논리와 규칙을 정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유일한 재산인 사람일 수도 있다. 신부를 의심한 것이 단순히 의심에서 그치지 않았던 이유는, 그렇게 살아온 자신은 틀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틀린다는 것은,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일지언정 적극적으로 오해하고 전투적으로 공격한다. 진실과 무관한, 오직 자신을 위한 싸움인 것이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나도 이제 잘 모르겠어. 내 믿음에 의심이 들어.’라는 문장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을 때, 관객은 그녀가 어렵게 걷어 낸 자기연민과 불편하고 거대한 신념의 크기만큼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게 된다. 관객은 그녀가 스스로에게 처음, 진심을 보이려는 용감한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5
비올라 데이비스와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 없다. 데이비스는 얼마 전 에이미 시상식에서 흑인 여배우로는 첫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다우트>로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머물러야 했지만, 그녀는 104분짜리 영화에 정확히 12분 등장으로 소름 끼치는 연기를 보여 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콧물을 흘리며 자신의 아들을 비호하는 장면을 두고, 진정한 신 스틸러라는 찬사를 보냈다. 내년 개봉하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도 등장한다니 기대해 볼 일이다. 작년 2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약물중독으로 사망했을 때, 주변 배우들의 SNS는 그의 흑백사진으로 도배됐었다. 1993년 작 <여인의 향기>에서 뚱뚱한 몸과 긴 머리로 캠퍼스를 뛰어다니던 모습에서 근래 <마스터>의 기괴한 캐릭터까지, 그는 배우와 감독들이 가장 사랑하는 배우였다. 현재 상영 중인 <헝거게임:더 파이널>이 유작이지만, 그의 마지막 연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영화는 콰르텟의 제2 바이올린 역을 맡은 <마지막 4중주>이다.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부스스한 그의 얼굴을 바라봐 주었으면 한다.
#FIN
살아가다 보면 도저히 이해 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함께 어떤 일을 할 때, 이 이상 소통이 안 될 순 없다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안 맞는 사람과 꼭 맞출 필요는 없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편리하게 오해해 버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오해는 사실이 아니고, 진심이라는 것도 확실한 상대라고 판단될 때 선물처럼 주는 것이 아니다. 관계가 시작되면, 상대는 이야기가 필요하거나, 시간이 필요하거나, 기회가 필요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내가 원하는 것도 같을 것이다. 그것만이라도 진심으로 주고받아야 한다. 결국 상대에게 주어서 바닥에 버려지는 것은 내 진심이 아니라, 상대의 편협함뿐이다. 날카로운 판단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에는 언뜻 관계에서 얻은 고단함이 엿보인다. 그다음 문장에 따라 의미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한다는 의미로 귀결된다면, 자신도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아 쓸쓸해진다. 이해하고 이해받으려다 보면 의심과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오해는 쌓아 두면 얼음처럼 단단해져, 그것이 곧 그 사람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것을 돌려놓기란 지난하고 험난한 과정이 요구된다. 하지만 애초에 상대를 의심하고 오해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해서라거나, 엄연한 진실보다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더 믿어 오해를 선택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숱하게 그런 유의 선택을 경험하고 괴로워해 왔다. 오해한 자는 자신의 서툰 확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에게 문제점을 찾아 공격하고, 자존심과 손익의 문제로 변질시켜 더욱 오해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본질과 무관한 양상으로 번지고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우리의 일상에서 간혹 벌어지는 측은한 경우이다. 영화 <다우트>는 1964년 뉴욕의 천주교구라는 제한적이고 보수적인 시공간을 설정하여,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 측은한 경우를 다루고 있다.
#2
얼마 전 사제복을 입은 강동원이 멋있다는 소문에 <검은 사제들>을 본 관객으로서, 같은 옷을 입은 <다우트>의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훨씬 중후하고 멋있다는 생각이다.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홍조 띤 얼굴과 큰 덩치로 담배와 포도주를 흡입하는 신부의 모습을 일면 탐욕스럽게 보이게 하기 위해, 감독은 꼭 그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메릴 스트립의 퀭한 눈과 스산한 표정은, 그 기운을 눌러 정갈한 수녀복 안에 칼날같이 숨겨 두었다. 내용은 이렇다. 예배와 교육을 함께하는 한 천주교구의 원장 수녀는, 자신보다 상급자인 신부의 평소 행실을 보며 그의 성적 취향을 의심한다. 그러던 중 한 평교사 수녀가 학교의 유일한 흑인 남학생 도널드에게서 술 냄새를 맡았다는 사실을 원장에게 보고한다. 뒤이어 도널드가 있던 사제관에서 신부가 걸어 나왔다는 사실도 말이다. 삼자대면한 신부는 도널드가 포도주를 마시는 실수를 했고, 그 일로 학교 내 일자리를 뺏기는 것을 눈감아 주기 위해 비밀로 했다고 해명한다. 그럼에도 원장 수녀는 그와 도널드의 부적절한 관계를 확신하고 추궁한다. 결국 그녀는 그의 성적 취향에 대한 단서를 발견하고 파면시키고자 주교에게 보고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다. 신부는 스스로 교구를 떠나고 이후 대주교의 진급명령으로 다른 성당의 주임신부로 발령받는다. 원장 수녀는 그가 떠난 것을 두고 과오를 시인한 것이라 스스로 위안하지만, 문득 자신의 확신에 의심이 든다며 평교사 수녀 앞에서 오열하고 만다. 이 영화는 불명확한 근거로 누군가를 의심하고, 그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 상대를 공격하고,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끝내 인간을 오해하고야 마는 자신의 비정한 모습에 스스로 무너지는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3
영화를 본 관객은 아마도 원장 수녀의 모습에 반감을 느끼고 신부의 억울한 표정에 감정 이입 할 것이다. 그는 정말 답답해 보인다. 이 표정에는 가능과 행위 사이의 무고함이 있다. 마치 그가 ‘한 남자’인 것과, 그래서 성범죄를 저지르는 행위를 ‘했을 것이다.’라는 추측에서 오는 무고함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원장 수녀의 의심은 모두 맞았다. 흑인 학생 도널드는 동성애를 가지고 있었고, 원장 수녀의 추궁에 ‘모든 걸 말할 수는 없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다.’는 신부의 언급으로 보아 그 역시 동성애자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그들의 성 정체성이 아니다. 흑인 아이를 비호하는 그의 엄마, 비올라 데이비스의 입장이 그렇다. 설사 아이가 신부를 동성으로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게 태어난 아이의 잘못도 아닐뿐더러, 아이에게 잘해 준다는 이유로 부적절한 행위를 확신해 자신의 아이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부가 말한 ‘말할 수 없는 것’에 정말 행위도 포함된다면, 그는 그것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떠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가 진급을 하든떠돌이가 되든, 원장 수녀의 입장에서는 싸움에서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 부정하며 이야기를 끝낸다. 누군가에 대한 의심이 근거 없는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의심은 해결되지 않은 근거를 이끌고 방향을 바꿔 확신하고 있는 주체를 추궁하곤 한다. 그리고 자신의 확신이 상대에게 주었던 상처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받게 된다. 결국 그녀는 확신에 찬 자신 역시 의심받는 고통에서 지켜 내기 위해 몰려드는 인간적인 감정을 외면했고, 더 이상 자신이 알던 자신이 아닌 게 되어 버렸다고 느꼈을 것이다. 수녀인 그녀는 이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표현한다. 결국 의심과 오해가 폭력이 되는 과정을 조작하며, 그 결과 자신이 망가졌다는 것을 목도하는 순간 오열하게 된다. 관객도 이 순간 그녀의 뜬금없는 눈물에 함께 울컥하게 되는데, 이는 영화 내내 그녀의 행동을 보며 확신했던, 그녀라는 사람에 대한 오해가 뒤집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내내 자기 확신을 거두지 못한 이유,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린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이는 극 중 신부가 타 먹는 과한 설탕의 개수에 대한 반응과, 공연에 필요한 캐럴을 고르며 트렌디한 음악을 거부하는 것에서 표현된다. 그녀는 불안정하고 불명확하며, 부덕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죄를 지어 수녀가 되었다고 고백했던, 그래서 어떤 방식과 태도를 응축해 온 자신이, 다시 무엇에 영향을 받아 흔들리고 변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돌아보면 그녀는 신부와 싸우며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마치 악마를 퇴치하려는 듯 신부를 향해 십자가를 들이밀기도 한다. 강해 보이지만, 그녀가 구축한 신념의 유약함은 쉽게 들켜 바스러진다. 결국 그녀는 두려움을 피해 쌓아 온 것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로 인해 무너지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4
어떤 신념이건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것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공(空)으로 돌아갈 무의미한 것이라도 말이다. 또한, 시간을 두고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과 어긋나 힘을 쓰게 된다. 어떤 이유로 그 태도나 신념을 고칠 용기나 기회를 갖지 못해 버티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긴 관계의 상처도 자기연민으로 치환해 보상받으려 하기 쉽다. 끈끈한 자기연민은, 지켜온 신념을 둘러싸 무엇에도 파괴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견고하게 다진다. 거기에 시간이 흘러 자신이 무엇을 위해 버티고 있는 것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은 곧 그 사람이 되어 되돌아갈 지점을 영영 잊기도 한다. 원장 수녀 역시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오며 겪은 상처를 버텨 내기 위해, 자기만의 논리와 규칙을 정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유일한 재산인 사람일 수도 있다. 신부를 의심한 것이 단순히 의심에서 그치지 않았던 이유는, 그렇게 살아온 자신은 틀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틀린다는 것은,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일지언정 적극적으로 오해하고 전투적으로 공격한다. 진실과 무관한, 오직 자신을 위한 싸움인 것이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나도 이제 잘 모르겠어. 내 믿음에 의심이 들어.’라는 문장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을 때, 관객은 그녀가 어렵게 걷어 낸 자기연민과 불편하고 거대한 신념의 크기만큼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게 된다. 관객은 그녀가 스스로에게 처음, 진심을 보이려는 용감한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5
비올라 데이비스와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 없다. 데이비스는 얼마 전 에이미 시상식에서 흑인 여배우로는 첫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다우트>로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머물러야 했지만, 그녀는 104분짜리 영화에 정확히 12분 등장으로 소름 끼치는 연기를 보여 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콧물을 흘리며 자신의 아들을 비호하는 장면을 두고, 진정한 신 스틸러라는 찬사를 보냈다. 내년 개봉하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도 등장한다니 기대해 볼 일이다. 작년 2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약물중독으로 사망했을 때, 주변 배우들의 SNS는 그의 흑백사진으로 도배됐었다. 1993년 작 <여인의 향기>에서 뚱뚱한 몸과 긴 머리로 캠퍼스를 뛰어다니던 모습에서 근래 <마스터>의 기괴한 캐릭터까지, 그는 배우와 감독들이 가장 사랑하는 배우였다. 현재 상영 중인 <헝거게임:더 파이널>이 유작이지만, 그의 마지막 연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영화는 콰르텟의 제2 바이올린 역을 맡은 <마지막 4중주>이다.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부스스한 그의 얼굴을 바라봐 주었으면 한다.
#FIN
살아가다 보면 도저히 이해 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함께 어떤 일을 할 때, 이 이상 소통이 안 될 순 없다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안 맞는 사람과 꼭 맞출 필요는 없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편리하게 오해해 버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오해는 사실이 아니고, 진심이라는 것도 확실한 상대라고 판단될 때 선물처럼 주는 것이 아니다. 관계가 시작되면, 상대는 이야기가 필요하거나, 시간이 필요하거나, 기회가 필요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내가 원하는 것도 같을 것이다. 그것만이라도 진심으로 주고받아야 한다. 결국 상대에게 주어서 바닥에 버려지는 것은 내 진심이 아니라, 상대의 편협함뿐이다. 날카로운 판단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글 영화감독 이경원 (oldwhal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