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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7호] 공주 석장리박물관 이걸재 관장
인간만이 세상 모든 것에 잣대를 들이민다. 그것을 숭배하거나 천대하는 것 또한 인간이 세운 가치에 의해 분류된다. 때로는 자신이 판단하기에 가치 없다고 느끼는 일은 야멸차게 외면하고, 지금 중요한 것만을 최고인 줄 알며 살아가기도 한다. 또한, 대부분 세상이 정해놓은 가치에 흔들리며 산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내세우는 가치에 눈길이 갔다. 이 사람이 기록한 <공주의 소리>에는 “흙에 붙어 있는 소리의 가치”라는 표현이 있다. ‘흙에 붙어 있는 소리’란 삶에서 우러난 우리 전통 소리이며, 누구를 위한 소리도 아닌 자신의 삶을 위해 우리 선조가 지어 부른 노래를 뜻한다. 그 안에는 흙에서 나고 자란 보통 사람을 보는 따듯한 시선도 담겼다.
놀이판에서 소리를 주고받으며 놀 때 가장 난처한 것은 순간적으로 받을 소리가 떠오르지 않을 때라고 한다. 알고 있는 노래는 얼마든지 있는 사람이 자기 순서에서 소리를 받아야 하는데 쉽게 떠오르는 가사가 없으면 막막해진다는 얘기였는데,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노인은 “어티기 하기는 어티기 햐. 그냥 져서 부르는 기지.”하고 쉽게 대답했다. 그 말을 쉽게 알아듣지 못한 내가 “지어 부르는 게 노래냐?”고 했더니 그분은 다시 “그람 그게 염불여?”하고 반문하셨다. (중략) “노래는 츰이 누구던지 지어 부른 겨.” 그렇다. 노래는 처음에 누군가 창작한 곡들이고 그것이 좋으면 세월을 뛰어넘으며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이 분명하고 확실한 진리를, 누군가 만들어 유행시킨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익숙해 있던 내가 어설퍼하고 촌스럽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공주의 소리> 채록· 정리 이걸재
찢어지게 가난했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독서로 모든 것을 배웠다. 책을 읽으며, 사상을 깨우쳤고 의식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이십대 후반, 독학으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무원은 안정적인 것만은 확실한 직업이었다. 그래도 그는 안정이라는 낱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낮에는 공무원, 밤에는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공주시청에서 노조활동도 하고, 대통령 잘못할 때에는 대통령 그만두라는 글도 많이 썼다. 그 글 때문에 겪은 사건도 시대별로 다르다. 전두환 전 대통령 때에는 안가로 끌려갔고, 김영삼 전 대통령 때에는 전화 한 통이 오더라. 세월이 변했다고 느꼈던 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 때였다. 지지했던 대통령이었지만, 연평도 사건 때 장례식장에 가지 않기에 “당신도 자격 없다.”라는 내용의 글을 신문사에 기고했다. 그때는 전화 한 통 오지 않더라. 뽐내려고 했던 일이 아니다. 늘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고 싶었다.
나 자신이 얼마나 못나고, 한심한 사람인지 들여다볼 계기가 있었다. 서른넷 이전에는 인간애라는 것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인간애라는 것은 천성적인 것도 있지만, 스스로 못났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부터 생기는 것이더라. 나는 두 번째 경우였다. 내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서른넷에 내가 얼마나 못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깨닫고,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때부터 남이 귀한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제야 노인이 보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경로당은 보물창고였다.
처음엔 소설 쓰려고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시절에는 정말 많은 책을 읽었다. 책으로 모든 공부를 깨우칠 정도였으니까. 서른여섯부터는 손에서 책을 놓았다. 책보다 더 귀중한 것을 노인들에게 배울 수 있었다. 책에서 배운 것은 하나 있다. ‘잘난 놈들과 놀지 마라.’라는 것이다.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인물, 기록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생각해봐라. 우리가 이순신은 알지만, 이순신 밑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의 이름은 누구 하나 기억하는가. 역사는 영웅 하나만 기록하고 남기지만, 숱한 목숨이 함께 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인들은 그것을 삶으로 알고 있더라. 뭐 하나 허투루 보는 것이 없었다.
기록을 위해 공주 시내에 있는 경로당 칠백여 개를 모두 다녔다. 몇 번씩 다닌 곳도 있다. 채록하면서 가장 고마웠던 점이 수명연장으로 채록할 시간이 는 것이다. 아깝게 놓친 경우도 많다. ‘한 달만 일찍 오지 그랬어.’라는 소리 들으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지금 세상은 변화가 너무 빠르다. 어제가 옛날인 시대다. 의식주가 변하면서 의식주에 깃든 문화가 모두 사라졌다. 그런 문화가 우리 민족 정신의 그릇이기도 했다. 그것을 기록하고, 연구하고, 올바른 가치로 정립하기도 전에 사라졌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문화 쪽으로 공주가 투자하는 것이 적지 않다. 인구비례로 보면 월등하다. 청소년 댄스페스티벌 같은 것도 다른 곳보다 10년쯤 일찍 했다. 아이돌 가수 중 유명한 애 있지 않나. JYJ 김재중도 댄스페스티벌 출신이다. 처음에 댄스페스티벌 하자고 했을 때는 반대가 어마어마했다. 지금은 다르다. 물론 이전에 기반을 닦아 놓은 분도 많다. 지산 유석근, 나태주 시인, 오해균 명장, 우공 이일권 등 다 각자 영역에서 열심히 활동한다. 정부 돈 없이도 올곧게 가는 분들이고. 자랑하고 싶을 만큼 노력한다. 그런데 이분들이나 나나 젊지 않다. 그런 면에서 대전이 부럽다. 젊은 사람이 많다. 여기가 보름달이라고 한다면, 대전은 초승달이다. 초승달은 이제 크는 일만 남았고, 보름달은 줄어드는 일만 남았다. 호주는 이민 온 사람이 다른 나라 예술을 하면 예술로 인정하지 않는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민족은 우리 고유문화로 자리 잡아야 한다. 그것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양심적인 사람의 ‘진짜 예술’이다. 그것을 밀어 넣는데 좋은 여건을 가진 곳이 대전이라고 생각한다. 대전은 새롭게 시작할 가능성이 충분한 도시다. 너무 관 주도로 가는 것은 문화예술인을 반 사기꾼으로 만든다. 보조금에 익숙해지면, 게을러진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자기부정에서 시작한다.
“공주에서 소리를 즐겨하는 노인들이 독특하게 사용하는 말로<억지창>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노래를 잘하려고 자기 목으로 낼 수 없는 소리를 억지로 흉내 내거나 흉내 내려고 애쓰는 사람을 질책하여 하는 말이다. (중략) 노인들이 소리를 가르치면서도 “그르키하믄 안되여.”라는 말보다는 “그냥 편하게 햐.”하는 말을 자주 쓰고 “상청은 한나절 흥이구 구성진 소리는 평생을 논다.”는 말을 듣고 공주 소리제를 대표할 만한 말이라고 감탄한 일도 있다.” <공주의 소리> 채록,
정리 이걸재
지난 2012년 여름, 대흥동립만세 무대에서 이걸재 관장의 무대를 본 적이 있다. 이걸재 관장은 걸쭉하고, 찰진 목소리로 보는 사람을 조금씩 무대로 끌어들이는 소리꾼이었다. 공주 석장리박물관 관장실보다는 그 앞에 펼친 금강이, 금강 보다는 소리를 펼치는 무대가 더 어울리는 예술인이었다.
더 열심히 예술해야지. 공주 민속 분야는 지금도 사람이 많지 않다. 중요한 일인데, 사람들이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청소년이 좀 더 쉽게 아리랑을 접하고, 우리 소리를 친숙하게 느끼도록 하고 싶다. 우리 고유문화인데, 학교마다 아리랑 동아리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기타나 댄스 동아리는 다 있는데, 아리랑 동아리 하나가 없다. 먼저 외국에서 시작하고 싶다. 외국 동포들이 아리랑 부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그것을 청소년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외국에 있는 한국인 학교에 청소년 동아리를 만들고, 해외 청소년 아리랑 페스티벌을 여는 것이 꿈이다. 매년 쏟아지는 가요 중 전통민요 한두 곡은 새로운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민요를 작곡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예술인들에게는 기본적인 판을 넓게 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너무 좁게만 보니까 급하고, 지역을 극복하기가 힘들다. 청년들 만나면 본인이 얼마나 못난 존재인지를 빨리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은 다 핵가족이어서 다들 자기가 제일인 줄 알면서 산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기고, 세상이 만든 가치에 따라가면서도 자기 생각인 양 착각하기도 한다. 너무 빨라서 그렇다. 생각할 시간도 서로 이해할 시간도 부족하다. 세상 사람들이 빨리 가는 것을 두려워했으면 좋겠다. 앞서서 빠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만 자랑하는 세상이 되어간다. 너무 서두르니 늘 고만고만한 것으로 싸운다. 천천히 가는 법을 배웠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