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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7호] 대전대학교 지산도서관 김봉수 경비원
“아니. 나 같은 사람이 무슨 헐 말이 있다고 이르케 찾아왔댜. 일단 일루 와봐.”
운영하던 건설회사가 주저앉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수차례 했다. 마음을 다잡고, 대전대학교 경비원으로 취직했다. 18년 동안 도서관 입구 옆 책상을 지켰다. 도서관 입구가 봉수씨 책상 바로 옆이지만, 봉수 씨와 눈 맞추며 인사하려면 조금 돌아서 가야 한다. 그래서인지 인사하는 학생이 많지 않다. “내가 여기 있으면서 인사 잘하는 학생치고 출세하지 못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라고 말한다. 뭐든 열심히 하고, 못 만지는 기계가 없는 요즘 학생들이지만, 그런 면이 조금 부족하다.
“여기에 있다고, 깐보고 무시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 실제로도 많이 겪었어. 자존심이 많이 상했지. 나도 한때는 잘나가던 사람이었는데. 그래도 보람된 일이 하나 있었지.”
십여 년 전 졸업한 학생 하나가 지금도 봉수 씨를 찾아온다. 매일같이 봉수 씨 앞까지 와 인사하던 여학생이었다. ‘가정교육 잘 받은 친구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크리스마스였다. 이 학생이 열두 시 넘도록 집에 가지 않고 도서관에 있는 것이다. 불 꺼진 도서관 1층 입구에서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벌벌 떠는 것을 봉수 씨가 데리고 들어왔다. 느낌이 싸했다. 어떤 사정이냐고 넌지시 물었다. 사업을 크게 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주저앉았다. 다른 친구와 둘이 반씩 월세를 부담하며 자취를 했는데, 몇 달째 방세를 내지 못했다. 함께 살던 친구가 방에서 나가라고 했다. 자존심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음 졸이며 도서관에 있었다. 봉수 씨는 마음이 짠했다. 그때부터 두 달간 봉수 씨 집에서 재웠다. 두 달 후 졸업이었던 학생은 졸업 후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처음엔 조금 서운했다. 그런데 이후 아이 둘을 데리고 봉수 씨를 찾아왔다. 당시 정신없었던 것을 설명하며, 지금까지 봉수 씨를 찾는다.
여학생을 보며, 봉수 씨는 자신의 삶을 보았던 것 같다. 봉수 씨 역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김봉수 씨는 예순여섯이다. 봉수 씨가 살았던 때는 ‘어느 집을 막론하고 잘 사는 집이 없었던’ 시절이다. 그런데 봉수 씨네는 달랐다. 봉수 씨 아버지는 일본 유학파였다. 와세다 대학을 나와 대전에서 정미소를 운영해 큰돈을 벌었다.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해달라는 것은 뭐든 해줬다. 두 형은 서울에서 합동 영화사를 차렸다. 봉수 씨는 어린 시절부터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다. 집에는 첼로, 피아노를 비롯해 색소폰도 있었다. 색소폰은 아버지가 직접 일본에서 야마하라는 브랜드로 사다 주었다. 보통으로만 돈이 있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정식으로 음악을 배웠다. 한국전쟁 후 미처 돌아가지 못한 일본 사람이 악기를 가르쳐줬다. “타다시였나.”라며 봉수 씨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다 봉수 씨가 중학교 다닐 무렵부터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5.16 쿠테타 이후 나라가 뒤숭숭해지면서 아버지는 ‘쌀장사’를 접었다. 그때 인동에 살았는데, 이후 다른 사업을 하긴 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봉수 씨도 가계에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마침 형님들의 영화사도 시원치 않았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봉수 씨는 ‘음악’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때 나이 열일곱이었다.
지금 서대전공원이 당시 미군 부대였다. 거기서부터 시작해 열아홉에는 용산 미군 부대에서 연주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버는 하루 일당이 형님들 수입보다 괜찮았다. 팁까지 합하면 하룻밤에 공무원 월급을 받기도 했다. 패티킴, 현미 등 지금도 이름만 대면 쟁쟁한 가수들과 함께 무대에 섰다. 돈을 벌어 대학까지 다녔다. 이후에도 힘들 때마다 음악으로 치유하고, 버텼다. 요즘은 음악이론서를 만들어보려고 준비 중이다. 수첩에 하나씩 메모하며, 기록할 것을 정한다.
“이 말을 꼭 하고 싶네. 건강해지려면 음악 해야 해. 기사 제목은 섹소폰 부는 아저씨라고 하면 되겄네.”
기사 제목까지 정해준 친절한 봉수 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