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87호] 엄마의 목소리 박연화 씨

4월 16일 이후, 엄마는 잠을 자지 못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음식을 만들다가도, 아이를 보다가도 눈물을 뚝뚝 흘리곤 했다. 우울증과 불면증이 한꺼번에 왔다. 슬픔은 쉬 가시지 않았다.
엄마가 울기 시작했다

박연화 씨는 주부다. 초등학교 3학년 첫째부터 네 살 막내까지, 사이사이 낀 아이만 넷이다. 매일 사 남매와 씨름하느라 바쁜 나날이었다. 아토피가 심한 큰 아이 때문에 도시 근처 시골로 이사를 왔다. 좋은 먹거리를 고민하고, 경쟁이 심하지 않은 작은 학교에 보내며, 내 아이를 잘 키워야겠다고 다짐하는 평범하고, 평범한 엄마였다. 그런데 4월 16일부터 엄마의 삶이 변했다.

잘만 키우면 내 아이만은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금지옥엽 키운 내 아이도 한순간 어떤 사건에 휘말리면 허무한 죽음을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아이만 잘 키운다고 되는 일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밀려오는 무력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5월 5일 어린이날이 지나고, 5월 8일이 왔다.

“어버이날이 가까워지니까 정말 마음이 무겁더라고요. 아는 엄마가 카톡으로 침묵시위를 제안했어요. 그 엄마도 카페에서 본 것을 제게 보내준 거죠. 그동안 촛불집회나 시위현장에 나가보질 못했어요. 아이 때문이라는 핑계를 댄 거죠…. 제가 주로 활동하는 육아 카페가 있거든요. 거기에서도 보니까 엄마들이 가만히 있지 말자는 분위기더라고요. 망설이다가 5월 8일에 처음 나갔어요.”

  

  

엄마의 작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5월 8일, 정부대전청사 통계청 앞에 모인 엄마는 200여 명이었다. 모인 엄마 대부분이 시위, 집회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집회 신고를 한 엄마도 생전 처음이었다. 사실 좀 욱한 것도 있었다. 답답하고, 가만히 있으면 큰일 나겠다는 마음이 엄마들을 움직였다. 미리 상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누구는 피켓을 만들어 와 나누어줬고, 누구는 리본을 만들어 왔다. 뒤에 합류하는 사람을 위해 뒤를 지키는 엄마, 아이와 함께 온 엄마를 위해 안전을 확인하는 엄마 등 엄마들은 하나씩 해야 할 일을 찾아 하기 시작했다. 무사히 통계청에서 시청까지 걷는 집회를 마무리했다.

“처음에는 두려워했던 엄마들이 함께 모인다는 것에 용기를 얻었어요. 다들 자발적으로 나왔으니까 서로 할 수 있는 걸 찾아서 한거죠.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들 사건 이후로 너무 아팠던 거예요. 모이니까 어떤 부분에서는 치유가 됐죠. 잠도 못 자고, 매일 울기만 했다는 분이 대부분이었어요. 눈앞에서 생명을 잃은 거예요. 분명 배가 기울어져 있는 것부터 보았고, 전원구조라는 뉴스를 봤는데 두 달이 넘도록 못 찾은 사람이 있는 거죠. 앉아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애가 타고, 마음이 찢어졌죠. 방관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움직여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온라인 활동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더라고요. 밖으로 나오니까 그걸 더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안심하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이후 5월 31일 4차 집회까지 참여했다. 연화 씨는 집회에서 마이크를 들고 엄마들의 목소리를 시민에게 알리는 일도 했다.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 드는 일 역시 처음이었다.
“이런 인터뷰하는 것도 떨리지만, 엄마들의 활동을 알리고, 참여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해서 나오게 됐어요.”
엄마 중에는 이 사건으로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사람도 많다. 언론, 불신, 시위, 밀양 송전탑, 원전 고리, 규제 완화 등 평소라면 꺼낼 일도 없던 낱말이 엄마들 사이에 일상어처럼 쓰이고 있었다. ‘내 아이’만 잘 키워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세월호 문제도 끝난 게 아니잖아요. 길게 보고, 엄마들이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해서 지속하려고 해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난 후에 촛불을 드는 게 아니라 일어나기 전에 막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바람이에요.”


글 사진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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