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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8호] Culture & Life
Illustrator 김민희
Illustrator 원나영
글 엄은솔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마음산책, 2014
해마다 4월이면 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빗나가는 일기예보 속에서 새로 장만한 봄옷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으며 생각한다. 지금이 정말 봄일까, 꽃이 피기는 할까, 꽃이 피기도 전에 봄이 다 끝나버리는 건 아닐까. 이제 막 스무 살이 되던 해에도 그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에도, 또 1년이 지나고 다시 몇 해가 흐른 뒤에도 그런 생각들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래도 언제나처럼 꽃은 피었다.
소설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은 ‘청춘’이라는 말이 아직 지금만큼은 상업적으로 여겨지지 않았을 때 처음 읽었다. 피는 꽃만이 좋았던 시절, 꽃잎들이 지는 걸 굳이 지켜보지 않았다던 작가는 새롭게 출간한 <청춘의 문장들+>의 첫머리에서 말한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에게는 떨어지는 꽃잎 앞에서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아직 지는 꽃보다는 피는 꽃이 좋아서, 작가가 그랬듯 나보다 세상을 앞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책을 읽으며 10년 뒤의 봄을 가늠만 해볼 뿐이다. 언젠가 내게도 피어날 꽃잎보다 떨어지는 꽃잎을 걱정할 날이 올까 상상하면서. 때론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있어 버겁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때론 그 짧은 봄조차 무겁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꽃이 피어날 내년 4월을 기대하면서.
글 송주홍
윤기형, <고양이 춤>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운다. 태어난 지 11개월 된 암컷이다. 이름은 댕이다. 작년 10월쯤 우리 집에 왔으니 함께한지도 벌써 10개월이다. 고백하자면, 댕이를 키우기 전까진 고양이를 참으로 싫어했다. 근데 키우다보니 하는 짓이 귀엽다. 자연스럽게 애정이 생겼다. 고양이 관련 책도 사보게 되고, 다큐멘터리 같은 것도 찾아보게 된다.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고양이 춤>도 그렇게 보게 됐다.
<고양이 춤>은 스스로 “시 쓰지 않는 시인, 여행하지 않는 여행가.”라고 소개하는 이용한과 CF감독 윤기형이 공동 제작했다. 영화는 이용한이 찍은 고양이 사진과 내레이션, 윤기형이 찍은 고양이 영상과 내레이션을 교차해 보여준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영화에는 깜냥이, 희봉이, 예삐, 잠보, 코봉이 등 길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영화 내용은 특별하지 않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된 길고양이들의 일상을 담담히 담는다. 주로 놀고, 먹고, 자고, 짝짓기하고, 새끼 낳고, 그 새끼를 보살피는 내용이다. 간간이 캣맘이나 고양이를 죽이려는 사람들 이야기도 나오지만, 무엇이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라고 강요하진 않는다. 마지막에서야 하고 싶었던 말을 툭 던지고 영화를 끝낸다.
“녀석들은 길 위에서 태어나 길 위에서 사랑하고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한다.(중략) 길 위에 사람이 산다. 그리고 고양이가 산다.”
글 정종대
정재은, <말하는 건축가>
건축가 정기용은 대장암 말기판정을 받고 하루가 다르게 몸이 수척해진다. 죽음을 앞둔 정기용은 다양한 장소를 오가며 자신의 건축을 끊임없이 말한다. 그는 넉넉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한다. 소박하더라도 사람들이 진정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가며 삶을 섬세하게 조직하고 공간에 진정성을 담아내려 한다. 그래서 그의 건축물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다.
무주 건물들을 답사하던 도중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을 아무런 이야기 없이 바꿔버린 것을 보고 분노한다. 그의 분노는 고민 없이 밀어붙이는 정부기관의 현 실태와 심사숙고하며 건축물을 설계한 건축가를 소외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창작자에 대한 불손한 태도는 비단 건축 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는 보는 사람에게 삶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산다는 게 뭔지, 왜 사는지, 세상이 뭔지, 나는 누군지, 어떻게 살았는지, 가족은 뭔지, 친구는 뭔지, 건축은 뭔지, 도시는 뭔지, 근원적인 문제들을 다시 곱씹어보고 생각하게 한다.
영화가 끝날 무렵 “건축가는 개발업자의 하수인이 아니라 문화생산자이며, 건축과 공간을 통해 시대를 걱정하고 시대의 모순을 지적하는 사람”이라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는 삶의 방식이며, 관심과 애정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이들의 진정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글 박한슬
김지운, 『김지운의 숏컷』, 마음산책, 2008
막바지 여름휴가를 광주 집에서 할 일 없이 뒹굴 거리며 보내고 있었다. 어지간히 심심했나 보다. 알라딘 서점에 갔다. 거기서 <김지운의 숏컷>을 발견했다.
영화를 좋아한다. 아직 왜 좋아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생각 거리를 계속 던져주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와 상황을 그리고 앞으로도, 경험하지 못할 것들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또 우리가 느끼는 수많은 감정의 근원을 끝도 없이 파헤친다. 조금 과감하게 혹은 극단적으로. 끝까지 파헤칠 능력도 없거니와 그 끝을 마주할 용기도 없는 나에게 영화는 편리하고 재밌는 존재다.
영화 속 세계는 허구다. 하지만 완벽하다. 한 치도 의심할 리 없는. 그 누구도 영화를 보며 ‘에이~ 가짜야 가짜.’라고 말하지 않는다. 영화니까 조금 억지스러운 설정도 잠깐의 의심으로 끝내고 만다.
완벽한 가짜세계를 만드는 사람.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사실 이 책을 보기 전까지 김지운이 감독인 줄도 몰랐다.
책을 읽는 내내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 사람 제정신은 아닌것 같다. 이 책 한 권으로 김지운 감독의 작품을 이해했다거나, 혹은 작품성을 알 수 있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감독의 작품을 다시 보고 싶은 욕구는 충분히 일 것이다.
글 성수진
주세페 토르나토레 <베스트 오퍼>
다른 사람과 살결이 닿는 것을 피하려 장갑을 끼며 흰 머리칼을 내보이지 않고 늘 염색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버질 올드만. 이 설정 자체만으로 어쩐지 짠한 주인공은 미술 경매사이자 감정인이다. 여성을 대하기 어려워하는 버질의 취미는 여성이 등장하는 명화를 모으는 것이다. 탐나는 그림을 친구와 미리 짜고 친구에게 유리한 낙찰가로 몰아주는 방식으로 그림을 모아왔다. 비밀스러운 방에 모아둔 그림들을 보는 것이 버질의 행복이다. 어느 날, 클레어라는 여성에게 감정 의뢰를 받고 버질의 삶이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광장 공포증과 대인기피증을 앓는 클레어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버질은 클레어에게 자신의 방을 보여 준다. 그림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포옹하는 둘의 모습은 진짜였을까, 가짜였을까. 넋 놓고 보더라도 집중할 수밖에 없는 흡입력 있는 줄거리는 ‘반전’ 때문에 이 정도밖에 소개하지 못하겠다.
이 영화는 사랑이 무엇인지, 예술은 무엇인지,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가짜에 가까웠겠지만, 꼭 가짜라고는 할 수 없는 영화 속 둘의 사랑이 잠시나마 아름다웠고, 위조품에도 진품의 면모가 있다는 말은 그 사랑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클레어의 아름다움, 영화에 등장하는 명화들, 영화의 주 배경이 되는 신비로운 고저택, 영화 전반에 흐르는 현악기 선율…. 영화를 보는 내내 눈과 귀를 사로잡혔고, 보고 나서 며칠 동안은 비슷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언제부터였을까. 조금은 진짜였을까. 어디까지였을까. 누구까지였을까. 사랑은 어떤 감정일까. 아름다운 것은 뭘까. 예술이란 무엇일까. 진짜와 가짜를 구분 짓는 건 무엇일까. 나는? 내가 하는 무언가는?
글 황다운
Color Me Rad 5K에 참가했다. 5km 단일 마라톤 대회인 이 행사는 달리는 게 주목적이 아니다. 즐기는 것이 목적. 참가자들은 인체에 무해한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천연 색 가루를 지급받는다. 마라톤 도중에 그 가루를 뿌리면서 달리는 것이다. 중간중간에 위치한 ‘폭탄 구간’에서는, 스태프들이 달리는 참가자에게 색 폭탄(Color Bomb)을 퍼붓기도 한다. 색 가루를 도드라지게 표현해주는 흰옷과 눈 보호를 위한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달린다.
우리가 보통 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달리는 것이다. 지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또 힘든 삶의 무게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그러나 이 마라톤은 무엇인가를 ‘위해’ 달리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위해 달리다 보니 삶에 대한 열정도 다시 불러일으켰다.
달리며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흑백텔레비전에서 HDTV로 바뀐 것 같이 생기가 돈다. ‘흑백텔레비전’ 생활에서 ‘HDTV’ 생활을 위해 오늘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