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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8호] 김운하와 함께하는 책거리
고전 작품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정의하는 일은 위험하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만리장성과 책들, 342p
최근에 누군가가 “고전부터 먼저 읽는게 좋을까요?” 하고 물어왔다. 그러면서 “고전은 지루하고 재미없던데….”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그 분이 은근히 고전독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은 없습니다. 고전 목록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으십시요. ”
언젠가 나는 고전 독서 문제를 숙고하면서 지나온 내 독서 편력을 곰곰이 돌이켜 본 적이 있다. 그러다 불현듯 ‘고전을 읽기 위해 고전을 찾아 읽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적잖은 당혹감에 빠졌다. 그렇다면 내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저 ‘고전’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책들이 거의 소위 ‘고전’ 에 속하는 책들이 아니던가?
내 서재에 ‘고전 독서’에 관한 책은 오직 단 한 권, 이탈로 칼비노가 쓴『왜 고전을 읽는가』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책을 산 이유는 책의 저자가 내가 무척 사랑하는 문학작품들 가운데 하나인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작가이기 때문이고, 또 훌륭한 작가가 쓴 비평적 에세이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꼭지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책에 관한 책’ 장르를 즐겨 읽는 것은 독서쾌락주의자인 내가 가진 못말리는 취향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칼비노의 책에서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글을 다시 찾아 읽어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언가를 정의할 때 본질에 따른 정의와 속성에 따른 정의를 구분한 바 있다. 거기에서 칼비노는 속성에 따른 정의를 추구하고 있는데, 고전의 속성들에 해당하는 부수적인 성질의 목록을 자그마치 13가지나 열거하고 있었다!
“고전이란 그것을 읽고 좋아하게 된 독자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하는 책이다.”
“고전이란 특별한 영향을 미치는 책들이다.”
“고전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해 주는 책이다.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
“고전이란 현실을 다루는 모든 글을 배경 소음(잡음)으로 물러나게 만드는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이 이 소음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13가지 모두를 다 언급할 순 없다. 칼비노가 열거하고 있는 고전의 정의를 구성하는 성질들은 사실 굳이 13가지가 아니라 130가지라도 더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고전이란 누구나 다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다.”라는 성질 같은 것도.
칼비노도 이를 의식했는지 자신이 ‘고전’이란 단어를 예스러운 것이거나 어떠한 양식, 혹은 그것이 지닌 권위에 따라 구별하지 않으며, 자신의 기준은 “문화적 연속체 속에서 고유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는 작품, 옛날 책이든 현시대의 책이든 상관없이, 바로 그 작품이 우리에게 미치는 반향의 효과뿐이다.”라고 쓰고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뭉스런 담화인가? 차라리『나의 고전 읽기』라는 책을 쓴 배병삼 선생의 말처럼 “나의 정강이를 쳐서 무릎 꿇게 하는 책만이 고전이다.”라는 정의가 차라리 더 옹골차 보인다. 안타깝게도 나의 칼비노는 지극히 타당한 말들을 열거하는 가운데 가뜩이나 혼란스런 고전 개념에 또 하나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만 같다. 칼비노는 고전을 이루는 근본적인 두 속성인 규범성(가치)과 역사성(시간) 가운데 역사성을 제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고전으로 채운 서가를 만드는 것 뿐이다.”라는 타당하지만 참신하지는 않은 결론밖에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고전은 어쨌거나 안 읽는 것보단 읽는 편이 낫다는 P.S 와 함께. (이 아름다운 책에서 유일하게 나를 실망시킨 글이 하필이면 이 텍스트라니!)
나는 여기서 고전(古典 Classic)이란 단어가 고대 로마시대 함대(clasis)를 사서 기부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많았던 최상층 재벌급 부자들(classicus)과 관련이 있다는 시시콜콜한 어원사나 그 개념을 둘러싼 복잡하게 얽힌 논쟁의 거미줄을 일일이 풀어보일 생각은 없다. 다만 그 많은 입장 속에서도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표준적인’ 견해는 존재한다. 고전에 해당하는 책이 어떤 것이냐고 할 때, 우리 국립국어원이 제공하는 정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고전은 옛날 법식, 또는 오랜 시대를 거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가치를 인정받아 전범을 이룬 작품을 말한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똑똑한 네이버 지식인에게 물어보아도 더 특별히 다른 견해는 없는 듯하다.
모든 것을 풍화시키는 무자비한 시간을 견뎌냄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책을 고전(古典)이라고 부르자는데 손을 번쩍 들어 반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문제는 책 자체는 입이 없고, 누군가 추천을 하거나 결정해 주어야 하는데, 그 선정 기준은 여전히 모호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북풍한설을 견뎌야 당대를 벗어나 고전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것일까?
지난 2005년 서울대에서 선정한 대학생들을 위한 권장도서 고전 100선을 보면 그 책들의 연대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부터 20세기 중후반까지 두루 걸쳐 있음을 본다. 또 하버드 대학 총장이 19세기까지를 기준으로 20세기 내내 하버드 대학 고전 교육 교재로 썼던 책들을 소개한 『하버드 인문학 서재』의 목록에 올라있는 약 200여 권의 책 제목을 일별하니 입이 쩍 벌어졌다. ‘2년 동안의 선원 생활’,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날 이야기’, ‘산욕열의 전염성’, ‘외과수술의 소독법에 대하여’ 등등. 나는 이런 책이 21세기 대한민국 독자들이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출판사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며, 또한 20세기 내내 그 책들로 고전공부를 한 하버드 대학생들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드리는 바이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서 나는 나이 일흔에 이미 시력까지 잃은 보르헤스가 작심하고 「고전에 관하여」 라는 짧은 에세이로 고전에 시비를 걸고자 했던 마음이 절로 이해가 갔다. 한국어판으로『만리장성과 책들』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책에 실린 그 에세이에서 보르헤스는 고전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고전은 한 국가나 몇몇 국가, 또는 오랜 세월이 마치 그 책속에 담긴 것은 하나 같이 사려 깊고, 운명적이며, 우주처럼 심오하고 무한한 해석이 가능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읽기로 결정한 그런 책이다.”
문제는 “읽기로 결정한”이란 대목이다. 보르헤스는 “언제든지 그런 선호는 얼마든지 미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하버드 대학에서는 『2년 동안의 선원 생활』이나 『산욕열의 전염성』 같은 책이 고전이 될만한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20세기 대한민국의 어떤 대학에서도 그 책들이 고전 대접을 받았다는 소식은 들은 바 없다.
보르헤스는 한때는 아름다움이 소수 작가의 특권이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아름다움이 모두의 것이며 우연히 뒤적이던 책 어느 페이지나 길거리에서 나누는 대화 속에도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면서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글을 마친다.
“고전은 무슨 대단한 장점을 지닌 책이 아니다. 그것은 각 세대의 사람들이 온갖 이유 때문에 넘치는 열의와 알 수 없는 공경심을 가지고 읽게 되는 그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