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88호] 대전 · 충남문인탐방

이문구 소설가
‘문학’으로 순수와 진보를 포용하다

이문구 작가가 태어난 충남 보령 관촌으로 떠난다.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추억과 아픈 상처가 공존하고, 생사를 오가며 오로지 살기 위해 ‘문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해준 그곳. 그곳엔 아직도 그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와 인연이 깊은 안학수 아동문학가의 도움으로 관촌마을 입구에 세워진 관촌마을비와 그의 생가, 그리고 유년시절 그가 노닐고 훗날 그의 유해가 뿌려진 부엉재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청라저수지가 바라다 보이는 그의 집필실도 둘러보았다. 이문구 작가의 ‘멘토’라 할 수 있는 매월당 김시습의 부조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 무량사도 가보았다. 공을 많이 들인 역사소설 『매월당 김시습』을 들고 김시습을 찾아갔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명천(鳴川) 이문구(李文求)는 1941년 4월 12일(음 3월 16일) 충남 보령시 대천군 대천리 387번지 갈머리(冠村)에서 5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관촌은 30호 정도 사는 작은 마을이었고, 그의 집은 부엉재 아래 초가와 두 채의 함석지붕으로 이루어진 15칸짜리 ㄷ자 모양이었다. 그는 유년시절 이곳에서 한학을 한 할아버지와 사법대서사인 아버지, 그리고 자상한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조부는 총기가 뛰어난 이문구에게 『천자문』, 『동몽선습』 등을 훈육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교우’에 대해 강조하였다. 조부는 “어진 사람은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어진 일을 돕는다.”라는 말을 당부하였다. 이는 훗날 그를 “붓을 굽혀 체제에 영합하는 정책작가(政策作家)”의 길로 가지 않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이문구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남로당 보령군 위원장이었던 아버지는 예비검속되어 후퇴 철수하던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고, 육사 2기로 들어갔다가 위장병을 얻어 집에서 요양하던 둘째 형도 다른 사람들과 오랏줄에 묶여 숨졌으며, 셋째 형마저 부친과의 연루 혐의로 대천바다에 산 채로 수장(水葬)되었다. 조부 또한 풍비박산된 난리 속에서 고적감을 이기지 못해 운명하였다.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충격적인 사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문구 작가는 전교 수석으로 중학교에 입학한다. 3대 1이라는,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치열했던 입시 경쟁에서 전교 1위를 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이처럼 입시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홀로 된, 상처투성이의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 시기 그는 학과 공부보다는 주로 소설을 읽었다. 책을 구할 수 없는 형편에 놓인 그는 당시 친한 친구에게 책을 빌려 보았다. 『구운몽』, 『사씨남정기』, 『심청전』 등의 고전을 읽기도 하였다. ‘책’은 자신을 소외시키지도, 생채기도 주지 않는 유일한 벗이었던 것이다. 이때의 독서 편력은 훗날 작가의 꿈을 실현하는 데 커다란 동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 시기 안타깝게도 유년시절부터 줄곧 사랑과 정을 듬뿍 주시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게 된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깊은 ‘생채기’와 극도의 외로움으로 어머니는 신산고초를 견디다 못해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오래 살아야만 쑥밭이 된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그 가문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또한 그것이 죽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임무라는 말을 남기신 채 어머니는 홀연히 떠난 것이다.

이후 그는 고향을 떠나 상경한다. 어느 직장에도 취직할 수 없었던 그가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장사였다. 좌판을 벌여놓고 건어물이나 마늘 따위를 팔기도 했고 물건을 어깨에 메고 아현동 골목골목을 누비며 떠돌이 행상을 하기도 했다. 공사판을 전전하며 문학에 대한 꿈을 꾸던 시절, 그에게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1961년 봄에 그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면서 김동리를 만난 것이다. 입학실기 시험을 잘 치러 등록금을 반만 내는 을류(乙類) 장학생이 된 그는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조연현, 김구용 등으로부터 문학 강의를 듣게 된다. 이 시기 이문구는 특히 김동리의 총애를 받는다.

  

  

이문구의 고향 전경(관촌마을)\

  

  

고등학교 시절에 이런저런 문학 콩쿠르나 백일장을 휩쓴 자들이 전국 각처에서 모여들어 있는 그 교실의 열기는 대단했다. 그 속에 조세희, 박상륭, 이건청, 하현식, 장효문, 그리고 필자가 들어 있었으니까. 어쨌든 도마 위에 올려진 이문구의 소설이 한창 난도질당하고 파김치처럼 짓뭉개진 뒤였다. 선생님께서 안경을 끼더니 종이쪽지에 기록해 놓은 것들을 들여다보고 문장 하나하나를 예로 들어가면서 끝종이 난 이후까지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안경을 벗어서 접고, 원고지와 강의 노트를 덮으면서, 선생은 탁자를 짚고 한동안 얼굴을 잔뜩 힘주어 찌푸린 채 생각을 하다가

“나는 이 학생이 앞으로 우리 한국 문단에 아주 희귀한 스타일리스트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하고 말했다. 시간이 끝난 뒤, 학생들은 끼리끼리 모여 가지고 선생의 편애에 대하여 입방아들을 찧어댔다.

(한승원, 「소설 이문구」)

  

  

훗날 “북에 홍명희, 남에 이문구”라고 찬사를 받을 만큼 이문구가 아름다운 문체를 구사한 작가로 평가받은 것을 보면, 김동리가 이 시기 ‘희귀한 스타일리스트가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단순한 편애를 넘어서서 이문구의 소설가로서의 자질을 일찍이 간파한 데서 비롯하였다고 할 수 있다. 김동리는 학원 출신의 깔끔한 문장보다는 명천의 투박한 문장에 더 매력을 느낀 듯하다. 이후 동리와 명천은 각별한 사제지간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면에서 같은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문학적인 성향이 거의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김동리는 해방 이후 줄곧 순수문학의 길을 걸어왔고, 이문구는 70년대 중반부터 진보문학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의 문학성향에 대해 진심으로 존중하며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1967년 1월 이문구는 당시 명문잡지인 『현대문학』으로 데뷔한다. 김동리의 추천으로 「다갈라 불망비(不忘碑)」와 「백결(百結)」, 그리고 「야훼의 무곡(舞曲)」 등 세 편을 차례로 발표하며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김동리는 추천사에서 “우리나라의 소설도 이제는 문장 맛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으며, 가장 이채로운 스타일리스트를 얻었다.”라고 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72년에 그는 「관촌수필」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일락서산」, 「화무십일」, 「행운유수」 등은 명천의 유년시절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일락서산」은 1950년을 전후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조부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사적인 슬픔을 잘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의 선대와 나를 키워준 고향’ 이라기보다는 ‘부모형제를 잡아먹은 원수와 다름없는 저주의 땅’이라며 관촌을 떠났던 작가가 다시 관촌에 대해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객지에서 13년 동안 지내면서 “마음만은 고향 잃은 설움을 갖고 있지 말아야겠다.”는 그의 생각이 표출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각박한 현재 고향의 모습 이전에 존재했던 기억 속의 아름다운 고향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정말 보고 싶었던 것은 꿋꿋이 4백년을 지켜온 ‘왕소나무’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비록 고향에서 ‘생채기’를 많이 입었더라도 근대 문명에 의해 전통적인 것이 사라지는 것을 그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미 사라진, ‘왕소나무’를 안타깝게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연작소설집 『冠村隨筆』 (1977)

  

  

내가 일곱 살 나 천자문을 떼고 책씻이도 마친 어느 여름날 해 설핀 석양으로 잊지 않고 있지만, 나는 갯가 제방뚝까지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와 온 마을을 쓸어 삼킬 듯이 쳐들어오던 바다 밀물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댕기물떼새와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석양놀에 가뜩 떠있던 눈부신 바다를 구경했던 것이다. 방파제 곁으로 장항선 철로가 끝간 데 없고, 철로와 나란히 자갈마다 뽀얀 신작로는 모퉁이를 돌았는데, 그 왕소나무는 철로와 신작로가 가장 가까이로 다가선, 잡목 한 그루 없이 잔디만 펼쳐진 펑퍼짐한 버덩 위에서 4백여 년이나 버티어 왔던 것이다.

(『관촌수필』

  

  

‘왕소나무’에 대한 그리움이 ‘저주의 땅’이라는 증오의 감정을 넘어서고 있다고 하겠다.

1974년은 이문구가 진보문학에 자리매김하게 되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발족한 해이다. 이 단체는 유신선포와 관련하여 구속된 김지하 시인과 이호철 소설가 등의 석방을 요구하고 표현의 자유와 민중의 자유를 구현시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이는 훗날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다시 ‘한국작가회의’로 바뀌게 된다.

그에게 1976년은 뜻 깊은 해이다. 36세의 나이로 임경애 여사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문구에 대한 그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그녀를 끔찍이 아끼는 그의 순애보적 사랑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절필을 하여 수입이 변변치 않아 혼례를 치르지 못했을 때 선배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뒤늦게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1977년에 그동안 발표했던 「관촌수필」 8편을 모은 『관촌수필』을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한다. 이 해에 그는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행정리 295-4로 주소를 옮긴다. 이곳에서 장남 산복이 태어난다. 그는 발안에서의 생활을 또 다른 연작소설 『우리동네』의 창작 모티브로 잡았다. 연작소설 「우리동네」는 작가가 농촌에서 체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애정과 비판의 시선으로 관찰한 사실들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연작소설 『우리동네』 (1981)

  

  

……내 말이 저기헌 것이, 요새 테레비 한 가지만 여겨보라구. 활동사진이구 굿이구 간에 여편네들이 저기할 게 있다? 자식들이 한 가지나 배울 게 있다? 공해가 벨 게 아닌겨, 사람 사는 디 이롭잖은 건 죄 공해거든. 일 년 열두 달 테레비 모셔봤자 눈깔에 생혈이나 오르지 소용있담? 여편네 밤마다 마실 댕기메 넘의 테레비 앞에 턱살 쳐들구 사는 꼴 안 보자구, 숭년 곡석 돈 사가며 들여놓구 인저는 후회가 막급일세. 신문을 보자면 열통이 터지구, 무슨 들어볼 만한 소식이나 웂으까 하구 워쩌다가 틀어보면 예미―사람이 얼마나 죽구 얼마를 도적질혔다는 얘기뿐이지, 연속극인지 급살인지는 늙은이구 밤쇠이구 몽땅 한가지에 넋놓구 앉은 디서 허구헌 날 놉 아니면 품앗이구, 홀앗이 아니면 생멕이 천지니, 경향간에 공해버텀 평준화 돼가지구설랑.

(『우리동네』)

  

  

농촌의 안방에 침투한 텔레비전, 선풍기, 농약 공해로 자취가 드물어진 곤충, 농촌의 고리채, 부재 지주의 증가, 농민 위에 군림하는 관료, 농협을 악용하는 모리배, 고추에 농약을 마구 뿌리는 악덕 농민, 이리저리 수탈당하는 농민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이같이 의뭉스러우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는 모습은 「우리 동네」 곳곳에서 목도할 수 있다.

  

  

1989년 1월, 그는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의 폐가를 얻어 내려온다. 문학적 고향인 ‘관촌’ 가까이 낙향한 것이다. 그가 어느 글에서 쓴 것처럼 “오늘은 글밭을 일구고 내일은 텃밭을 매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스승 김동리가 쓰러지자 즉시 서울로 올라가 내리 석 달간 머물며 간병한다. 그는 이처럼 남들의 길흉사를 잘 챙기는 사람이며 특히 남이 어려울 때 가장 먼저 팔을 걷어붙이는 들무새로 문단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 인정이 삭막해지는 ‘지금-이곳’에서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일이 바로 참된 가치임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이는 그가 멘토로 삼은 ‘매월당 사상’과도 맥을 같이한다. 이 시기부터 그는 ‘매월당 김시습’에 대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992년에 『매월당 김시습』을 출간한다. 선비의 덕목인 지성과 기개와 고절을 고루 갖춘 매월당에게서 선비의 현재적인 상을 그려보고자 노력한 흔적이 배태되어 있다.

2000년도에 그는 소설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를 발간한다. 이 소설집으로 제31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 가치가 희미한, 그러나 자기 줏대와 고집은 뚜렷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돈 없고 힘 없는 일 년 살이 들도 숲을 이루는 데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희미한 존재이지만, 자기 주관과 철학이 뚜렷이 있는 이들의 얘기, 이것이 『관촌수필』에서부터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까지 이어온 이문구 소설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2003년 2월 25일, 그는 지병으로 타계한다. 27일에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서 한국문단 사상 처음으로 문인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팬클럽, 소설가협회 등 4대 문학단체 합동 문인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된다.

이문구는 고향, ‘관촌’을 참 아름답게 묘사했다.

  

  

“바다와 간석지 논을 가르는 둑성이도 개펄이나 뷩재 골짜기 못잖게 아이들을 부르던 놀이터였다. 봄에는 어쩌자고 삘기가 그리도 많았을까? 둑성이 안쪽의 논배미와 갈대 욱은 수로는 가을이면 참게와 우렁이 바글거리고, 송사리, 붕어, 망둥이, 기름쟁이, 모래무지 따위 어린 고기들이 물 반, 고기 반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들끓어 아이들을 들뜨게 했다.”

(「남의 하늘에 묻어 살며」)

  

  

‘저주의 땅’이자 ‘징그러운 바닥’이라는 슬픔 너머에 있는 아름다운 고향의 모습을 본 것이다. 이문구는 ‘외롭고 쓸쓸한’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정제된 ‘표준어’가 아닌 걸러지지 않은 ‘충청도 사투리’로 다가갔다. 그러면서도 매월당이 지닌 지성, 기개, 고결을 잃지 않으려 했다. 이러한 점들이 어우러져 이문구의 ‘문학의 집’이 지어진 것이다.


글 사진 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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