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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8호] 대전 서구 용문동
용문동은 사는 곳에서 걸어서 15분쯤 거리다. 찾아간 곳은 용문동 중에서도 탄방동 남선공원 남쪽의 유등천과 접해있는 곳이다. 여러 빌딩이 있고 용문역이 있는 큰 길 건너와는 달리, 이곳은 한적한 주택가다.
아직 해가 내리쬐지 않는 아침, 좁은 골목길엔 차도, 사람도 다니지 않는다. 1층 혹은 2층 주택, 작은 상가, 빌라…. 높지 않은 건물이 골목골목을 채운다. 한적한 골목은 천천히 걷기 좋다.
남선공원 뒤쪽을 지나 용문동으로 가는 길, 남선공원 숲에 백로 떼가 눈길을 끈다. 꾸룩꾸룩 우는 소리와 날갯짓 소리가 꽤 크다. 도심 속 숲에 자리 잡은 백로 떼, 이 생경한 풍경을 지나 큰 길 하나만 건너면 용문동이 시작된다.
용문동은 동쪽으로는 용두동, 서쪽으로는 괴정동, 남쪽으로는 가장동, 북쪽으로는 탄방동과 접한다.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에 따르면, 유등천 건너편에 용두봉(龍頭峰)이 있는데 용문동에서 볼 때, 유등천에 비친 용두봉 모습이 아름다운 무늬를 이룬다고 해 용문동 지명이 유래됐다. 원래는 용문동(龍紋洞)이라 부르다가 후대에 용문동(龍汶洞)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895년에 회덕군 유등천면이었던 곳이 1914년에 대전군 유천면 용두리(龍頭里)가, 1963년에 대전시 용문동(龍汶洞)이 됐다.
용문동에 들어서고 처음 만난 한 할머니는 어느 집 앞 평상에 앉아 있었다. 집은 ‘저짝’인데 누구를 보려고 왔더니 집에 아무도 없어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평상 뒤쪽으로 마당에서 이어져 나온 나뭇가지에 물을 넣은 비닐장갑을 매달아 놓은 모습이 정겹다.
골목을 따라 쭉 걷다 천변도로 쪽으로 방향을 트니 고물상이 보인다. 동 이름을 딴 고물상이다. 10년 전 탄방동에서 고물상을 하다 용문동으로 옮겨 왔다는 손이순 씨가 석류 주스 한 잔을 건넨다.
“고물상은 주택 많은 곳에서는 안 돼. 아무리 깨끗하게 한다고 해도 고물상 하면 이미지가 깨끗하지가 않잖아. 시끄럽기도 하고. 여기는 주택으로 둘러싸여 있지도 않고 고물상 하기 좋지. 요새는 경기가 어려워서 장사가 잘 안 돼. 경기 어려우면 고물상은 더 어려워. 딴 데 장사가 잘 돼야 쓰고 버리니까….”
손이순 씨는 살기에는 용문동보다 탄방동이 낫지만, 고물상 하기에는 탄방동보다 용문동이 낫다고 말한다.
“고물상 할 만한 땅이 없어. 용문동에 적당한 땅이 있어서 온 거지. 처음에는 몰랐는데 계속 사니까 살기 좋아. 생각하기 나름이지.”
손이순 씨 말에 따르면 이곳에는 60대가 많이 산다. 주변에 학교가 없어 초등학생들은 탄방초등학교와 문정초등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걷기에는 제법 먼 거리다. 이곳에 사는 초등학생 아이들은 부모님 차로, 학원 차로 학교에 다닌다.
새로 진 지 얼마 안 된 듯한 원룸 건물들, 시간의 흔적이 배어 있는 빌라, 상가들을 지나 좁은 도로 하나를 건너 쭉 걸으니 놀이터가 나왔다. 놀이터 한쪽 끝에는 노인정이 있다.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가니 할아버지들이 바닥에 앉아 화투 떼기를 하고 있다.
“치매 걸린다고 해서 떼는 거야. 아침에 여기 나와서 놀다가 열두 시에 밥 먹으러 집에 갔다가 다시 또 한 시에 나왔다 다섯 시에 들어가고 그래. 여기가 직장여.”
가장 먼저 말문을 연 이는 올해 여든셋인 임정수 할아버지다. 금산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금산에서 자식들 여우살이 다 시키고 이곳으로 이사 왔다.
“시골 대간해서 왔지. 농사짓기가 대간햐. 논에 모 심고 어쩌구 해서 수확해 먹고 나면 금방 또 농사가 돌아오잖여. 넓은 데 와서 살아보려고 온 거여. 얼마 전에 안식구랑 딸이랑 금산 가서 어죽 먹고 왔는데 금산이 발전이 안 됐더라고. 용문동은 이 정도면 많이 발전한 거지.”
노인정에 나오는 할아버지들 모두 용문동에서 오래 살았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이는 없다. 대전 인근에서, 대전 다른 동에서 인생의 한창 때를 보내고 이제는 이곳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다. 할아버지 몇은 용문동이 전부 밭이었을 때 이사 왔다. 시간이 지나며 밭이 조금씩 사라지고, 초가집, 기와집들도 점점 사라졌다. 그리고 빌라가 생기기 시작했다.
올해 백 살이 된 원종한 할아버지는 20년 전쯤에 공주에서 이사 왔다. 할아버지는 처음 왔을 때 용문동의 모습과 지금 모습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여든하나에 왔어. 아들 따라서 여기로 왔지. 거기보단 여기가 낫지. 여기는 대전 아녀. 크고 조용하고 놀이터가 좋잖여. 이렇게 놀이터 넓은 데 없잖여? 일로 이사 와.”
벽에 걸린 달력에 동그라미 표시해 놓은 날은 노인정 사람들끼리 함께 점심 먹는 날이다. 갈비탕도 먹고 냉면도 먹고 외식하는 날이 7월엔 두 번 있다. 할아버지들은 각자 집으로 가 점심을 먹고 다시 나오지만, 옆방에 모이는 할머니들은 노인정에서 직접 점심을 해 먹는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함께 어울리지는 않는다. “젊을 때나 서로 찾는 거지. 다 늙어서 뭘….” 한 할아버지가 말한다.
할머니들이 모인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할머니들은 낯선 이의 방문에 쉽게 경계를 풀지 않는다. “우리 안 해요.”라며 무언가를 사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약이며, 이불이며 물건을 팔러 이곳에 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노인정 바로 근처, 오래되어 보이는 슈퍼에 들렀다. 음료수라도 하나 사 마실 생각이었는데 막상 들어서고 나니 어디에 냉장고가 있는지 알 수조차 없는, 있는 물건만 있는 구멍가게였다. 가게에 달린 작은 방의 미닫이문을 열고 주인아주머니가 고개를 내민다. 아주머니는 그저 담배 한 갑씩만 팔고 있다고 말한다. 장사는 잘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근처에 제법 큰 슈퍼마켓이 있고 조금 멀리 나가면 대형 마트도 있다.
아주머니는, 동네 얘기라면 근처 양말 가게 할머니한테 물어 보라고 했다. 양말 가게 할머니만큼 이곳에 오래 산 사람이 없다고 했다.
“왜 나 상 주려고?” 열여덟 살 때부터 용문동에 산 양말 가게 할머니는 자신보다 동네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논산에서 용문동에 시집와 68년째 살고 있다. 처음 시집왔을 때는 밭밖에 없던 곳에 이제는 건물이 가득 찼다.
“용문동이 왜 용문동이냐면, 저짝께서 용이 올라갔어. 그래서 용문동이야. 왜정시대에 올라갔으니께 본 사람은 없어. 용 올라가는 건 아무나 못 봐. 나는 강경 미내다리에서 보기는 봤어. 학교서 당번이었는데 주위가 캄캄햐. 캄캄해서 앞이 제대로 안 뵈야. 누가 용 올라간대서 쳐다보니까 하늘이 시커맣더라고. 구름으로 싸여서 안 보이는데 조금 환해질 때 보니까 용 꼬랭이만 보이더라고. 대가리를 보면 용이 하늘로 못 가고 떨어진댜.”
할머니 말에 따르면 밭이었던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토마토, 고추, 사과 등을 재배했다. 밭이 조금씩 없어지면서는 공장이 들어섰다. 직물 공장, 수건 공장, 가스 공장, 미싱 공장 여러 공장이 있어 사는 사람도 많았다.
“여기가 참 살기 좋았지. 왜놈 있을 때는 뭐든지 여기서 우리 손으로 농사지어서 팔았잖아. 살기 좋았는데 차차로 짜브러들더라고. 살기가 복잡해졌지. 시방 어디 주변에도 먹고 살 수는 없어. 어지간히 팔려서는 유지를 못 해. 밥은 그만두고 공과금도 못 내. 늙으니께 사람 보려고 가게 여는 거지 장사하려고가 아니야.”
할머니는 재건축 이야기를 꺼냈다. 2012년, 대전시가 용문동 1·2·3 주택재건축 정비구역 정비계획을 지정·고시한 이후 현재는 용문동 1·2·3구역 주택재건축정비사업조합 설립 후 사업시행인가를 진행 중이다.
“나는 재건축 동의 안 했어. 다른 사람들 다 해줘도 나는 안 했어. 아파트 생기고 시장 생기면 못 살든 안 하겠지. 근데 그것도 돈이 많아야 들어가는 거 아녀.”
다음 날, 다시 용문동을 찾았다. 못 걸어 본 골목을 걸었다. 골목마다 비슷한 모습에 전날 걸었던 곳을 기억해 내기가 어려웠다. 다시 조용한 아침이었다. 천천히 걷다 용문동 1·2·3구역 주택재건축정비사업조합 사무실을 마주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조합원들이 친절히 반긴다. 류완희 조합장은, 재건축은 자신의 집을 헐어 새집을 짓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현재 재산을 감정해서 새로 짓는 아파트 분양가보다 높으면 그만큼 돌려받고 모자라면 보태야 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재개발, 재건축 하면 돈이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재건축은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니고 내 낙후된 집을 깨끗하게 살기 좋게 만드는 건데 사람들이 이해를 잘 못하죠. 우리 계획으로는 앞으로 2년 반 정도는 더 있어야 철거 착공할 거라고 봐요.”
사무실을 나와 다시 천천히 걸었다. 비슷하다고 느껴지던 골목 하나하나가 다시 보였다. 목욕탕 굴뚝이 보이는 골목, 작은 화단을 가꾸어 놓은 빌라, 대문 앞에 잔뜩 놓은 큰 화분들….
양말 가게 할머니는 용문동이 인생 경험하기는 좋은 동네라고 했다. 밭이 사라지고 공장이 생기고 빌라가 생기고…. 이제는 그 자리 일부에 고층 아파트가 생길지 모르는 이곳. 용문동이 어떤 동네였으면 좋겠느냐고 했던 질문에 답하던 할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정치대로 가는 거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되는 거야? 인생은 정치 따라가는 거야. 정치를 잘 하야 인생이 잘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