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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8호] 최진규 포토밭출판사 대표
그에겐 이웃이 있었다.
“제가 고기를 진짜 좋아해요. 예전에는 채소를 거의 안 먹었어요. 근데 여기 와서 식성이 바뀌었어요. 이웃이 텃밭에서 키운 쌈 채소나, 가지, 토마토를 가져다주셔서 채소를 먹기 시작했는데 맛있더라고요. 지금은 거의 채식하고 있어요.”
최진규 대표가 옥천에 온 건 지난 1월이다. 이제 7개월째 옥천생활에 접어들었고 그동안 식성까지 바뀌었다. 그리고 ‘이웃’의 의미 역시 완전히 바뀌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사람들끼리 인사를 잘해요. 처음에 낯설었는데 ‘여긴 인심이 좋구나’ 싶었어요. 물론 이권 다툼은 있겠지만, 사람들 기본 정서는 따뜻한 것 같아요. 옥천에 오기 전에는 ‘이웃’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회사 동료나 아이 유치원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어울리긴 했지만, 거리감을 두었는데 이곳에서는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기도 하고 그 관계가 깊어졌어요. 이런 게 사는 맛이구나 하면서요.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웃이 없으면 어떻게 혼자 살지’ 하는 생각을 해요.”
이웃은 그의 식성만 바꾼 게 아니다. 가치관에도 변화를 줬다. 그가 이제 막 뿌리 내린 지역은 공동체의 중요성을 느끼게 했다.
“꼭 돈을 쌓아놓지 않아도 좋은 관계가 있으면 살 수 있구나 싶어요. 당장 옥천에 와서 어떻게 하나 걱정도 됐지만,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 일을 하게 됐어요. 지역에서 먼저 내 손을 잡아줬어요.”
최진규 대표는 옥천신문사에서 주중에 편집기자 아르바이트를 한다. 옥천순환경제공동체에서 만드는 소식지 ‘옥천사람들’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 안에서 그는 풀뿌리의 힘을 깨닫고 있다.
“옥천은 지역사회 모임이 많아요. 대청호주민연대, 농민회 등 소수의 지역 활동가들이지만 이 사람들이 갖는 힘은 커요. 이런 분들이 없다면 지역의 변화는 조금도 없을 거예요. 저도 앞으로 지역에 도움을 주며 살고 싶어요. 사람들과 더 많이 어울리면서 든든한 공동체를 만들면 좋겠어요.”
이웃과 함께 사는 세상이 이제 그가 살아가는 곳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최진규 대표에게 옥천은 그리 낯선 곳이 아니다. 옥천은 어머니 고향이었기에 어렸을 때 놀러 오곤 했었다.
그가 옥천생활을 결심한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출판사에서 10년 정도 편집자로 일하던 그는 빡빡한 서울생활에 지쳐있던 터였다.
“땡땡책협동조합에서 만나 친해진 하승우 형을 따라 옥천에 왔어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언제 가는 다른 지역에 가서 살고 싶었고, 계획이 현실화되면서 이곳에 온 거죠. 아내도 좋아했고요. 또, 옥천에 활동가들이 많아 ‘살아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거든요.”
땡땡책협동조합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여 함께 공부하고 연대하는 모임이다. 그는 이 모임을 통해 진짜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땡땡책협동조합은 같이 공부 모임 하던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어요. 혼자서 사회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기는 쉽지 않으니 우리가 힘을 모아서 해보자, 무언가를 해보자 해서 만들게 됐어요. 조합 이름을 지을 때 규정하지 말자고 해서 땡땡이라고 지었어요.”
2013년 열다섯 명의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한 땡땡책협동조합은 탈핵 관련 독서회, 밀양투쟁 독서회 등의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를 모아 소식지를 만들고 있다. 『후쿠시마에서 살아간다』, 『우리, 노동자로 살아가다』라는 책 두 권도 출판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책이다. 가격도 굉장히 저렴하다.
“조합원들이 공동작업해서 만든 책이에요. 이런 책은 기성 출판사에서 만들기 힘들어요. 팔리지 않는 책, 돈이 되지 않는 책이거든요. ‘땡땡’에서는 수익을 남기지 않아도 되는 책, 소책자가 아니면 다룰 수 없는 주제로 책을 만들고 있어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던 그는 ‘좋아하는 책’이 아닌 ‘잘 팔리는 책’을 만들어야 했기에 늘 부담감을 어깨에 얹고 살았다. 책은 ‘책’ 자체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 아니라 팔아야 하는 상품으로만 기능했다. 그는 조합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책,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강해졌다.
그는 땡땡책협동조합 활동으로 책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 더 즐겁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만들고 혼자 읽는 것보다 같이 만들고 같이 읽는 게 더 흥미롭다고 그는 말했다. 아내와 함께 만든 포도밭출판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서울에서 옥천으로 왔다고 해서 업무환경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똑같은 컴퓨터로 작업하고 같은 종이에 인쇄한다. 장소만 다르지 일하는 데 별 차이는 없다. 올해 5월에 나온 첫 책, 『우리는 군대를 거부한다』를 건네며 그는 말했다. 만들고 싶은 책을 드디어 만들 수 있게 됐다고.
“출판사에서는 매출 할당량이 있어 일을 해내야 하는 압박감이 있어요. 혼자 책을 만든다고 해서 인쇄하는 비용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손익분기가 낮아졌어요. 그만큼 책 한 권의 부담감이 낮아진 거죠. 책을 만드는 즐거움이 생겼어요.”
기존 유통망에 의존하지 않고 책을 판매할 수 있는 것은 지역 출판사, 포도밭출판사가 가진 특징이다.
“서울 출판사는 주로 마케팅으로 팔리는데 지역에서는 지역 사람을 통해 책을 알릴 수 있어요. 서울은 지역성이 낮아서 가능하지 않은 부분이죠. 사람을 통해 책을 판매하다 보니 책을 나눈다는 기분이 들어요. 출판사에서 일할 때보다 더 뿌듯하고요. 같은 종이에 제가 전하고 싶은 내용이 담긴 책을 만드는 진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는 앞으로 옥천 지역사회를 들여다보는 책을 만들려고 한다. 옥천에 필자도 생겼으니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지역 사람들과 지역의 든든한 출판 기반을 만드는 것 역시 그가 하고 싶은 일이다.
“돈은 많이 벌지 않아도 되니 우선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꾸역꾸역 서울에서 일 다니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 친구들에게 서울에 몰려있는 일도 지역에서 재미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지역으로 나온 출판사가 지역 청년들이 일할 수 있는 기반이 되면 좋겠어요.”
최진규 대표와 인터뷰를 마친 다음 날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이웃’과 다시 마주쳤다. 인사를 할까 말까 머뭇거리다 타이밍을 놓쳐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은 말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에겐 있는 이웃이 당분간 나에겐 없을 듯하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이 되고 싶다. 이성을 가진, 영혼을 지닌 한 명의 온전한 인간이 되고 싶다.” 『우리는 군대를 거부한다』, 124쪽, 안홍렬
『우리는 군대를 거부한다』는 2014년 5월, 포도밭출판사에서 처음 나온 책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중 53인의 이야기를 엮었다. 책 속의 53인은 다양한 이유와 경험을 통해 군대를 거부할 것을 선택한다. 단순히 ‘군대’를 거부하는 사람의 ‘군대 이야기’라기 보다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과 이들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겼다. 2001년 오태양 씨부터 2014년 강길모 씨 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당연한 것은 얼마나 있을까? 군대란 과연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에 관한 고민없이 군복무를 강제하는 우리 사회와 군사주의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