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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2호] 나는 페미니스트 입니다
내가 아주 싫어하는 말이 있다. 매달 이 페이지엔 싫은 것만 쓰는 것 같아 미안합니다. 그래도 해야겠다.
엄마는 자주, 남자가 없는 집의 불안함과 불안정함에 대해 말해 왔다. “집에는 남자가 있어야 돼.”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집에 나쁜 놈이 들어오면 내가 골프채나 야구방망이를 휘두를게. 생각해 보면 엄마에게는 스윙을 잘하는 딸 말고, 존재 자체로 든든한 남자 가족이 필요했던 것 같다. 쓰면서도 싫다. 슬퍼서.
중학생 때부터 이런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왜 혼자 밤길을 걷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남자인 친구나 남자인 어른이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어야만 안전한지. 어째서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 신발이나 남자 속옷 같은 걸 잘 보이게 두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는지.
일찍 일찍 다니라는 말과 여자가 밤늦게 어딜 돌아다니냐는 말과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 놓고 다니지 말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날 때부터 나는 당연히 위험에 노출된 존재인 줄 알았고, 몸을 항상 단속해야 하는 줄 알았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러다 울컥하기 시작한 건, 남자인 친구들은 나처럼 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다. 그들은 함께 노는 술자리에서 자정이 넘어도, 여자들보다 걱정하는 전화를 덜 받았고, 시간이 늦어지면 학교 안 동아리방 쇼파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하나가 눈에 들어오니 다른 것들도 보였다. 여성은 남성에게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존재일 뿐 아니라, 어떤 문제 상황이 생겼을 때에도 남성에게 해결을 ‘요청’하는 존재였다. 그렇게 길러졌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인식되어 있었다.
이건 주말 드라마 같은 데서 자주 본 장면인데, 여성 운전자가 차 사고가 나면 그 자리에서 상대 차주와 해결을 보지 않고, 호들갑을 떨거나 지나치게 어쩔 줄 몰라하며 남편이나 아들에게 전화해 불러내는 것이다. “뭐야, 무슨 일이야.” 하며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소 꺼벙하게, 그러나 듬직한 아우라를 풍기며 현장으로 걸어오는 (배우 권해효씨가 떠오른다.) 남편이 마침내 사건을 중재하고 끝이 난다.
두 달 전쯤 언니가 운전하다 옆 차를 긁었다. 상대 차주는 자리에도 없는 ‘남편분’을 찾았다. 우리 자매는 보험사에 전화했다. 차주분도 나와 언니가 ‘보호자’가 필요할 만큼 패닉에 빠졌다거나, 사고가 나면 일반적으로 보험사에 연락해 해결을 본다는 걸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여자니까, 시원찮아 보였을 것이다. 그뿐이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여자였고, 여자로 사회화 되었기 때문에 남자로 사는 게 어떤 건지 모른다. 그래서 내 생각을 의심했다. 내가 너무 민감한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 그런데 과거를 복기할 수록 불편함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세 달 쯤 전엔 모 기업에서 보험금을 지급하는 일을 하는 남자와 항정살을 먹었다. 그는 자신이 회사에서 하는 일에 관해 얘기했다. 듣다 보니 그 일이 끌려서, “나도 지원할래요.”라고 말했는데 그분은 “음, 남직원을 더 선호해요.”라고 말했다. 이유를 물었다. 이유는 이랬다.
‘고객’들이 여직원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였다. 의뢰인과 직원은 첫 상담을 전화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직원이 전화를 받으면 대뜸, 너 말고 상사를 바꾸라는 식이란다. 보험금을 책정하는 과정에서도 남직원이 담당할 때보다 잡음이 더 생긴다고 했다. 사람들이 여직원을 만만하게 봐서. 그 기업은 사람들이 무시하지 않는, ‘대기업’이다. 목소리를 굵게 내야 하나?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엄마는 내가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부터, 능력만 있으면 판사도 될 수 있고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말을 해 주었다. “이제는 여자도 대학에 가니까.”, “여자들이 똑똑해졌으니까.”라고도 말했다. 나의 엄마는 열다섯 살 때부터 옷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며 오빠들과 남동생의 학비를 대었다. 2016년의 나는 엄마보다 오랫동안 학교에 다녔으며, 내 삶을 남자 형제에게 희생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여자로서’ 마주치는 일상은 자주, 불편하고 불쾌하다.
집에 형부와 둘이 있다가 동시에 배가 고파질 때, 밥을 내가 차려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을 느끼며, 매우 구린 기분으로 식단을 고민한다. 밥 차리는 게 싫다는 게 아니라, 여자가 돌봄 노동을 하는 게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분위기가 싫다. 다 먹고 나면 형부는 밥상 뒤로 물러나고, 밥상과 나, 둘만 남는다. 난 ‘모성애’도 없고, 집안을 정돈하면서 행복해하는 성향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소위 ‘여성스럽다’고 불리는 것들이지만, 여성이 아니라 사람의 특성이다. 스포츠를 좋아하면서 취미로 십자수를 하는 여자를 ‘남성스럽다’고 할 건가, ‘여성스럽다’고 할 건가? 아무튼.
우리 사회에서 남자는 곧 사람인데 여자는 여성이다. 나는 여자인 성별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이 말이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