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2호] 폐교에 숨을 불어넣다

폐교에 숨을 불어넣다 | 책마을해리, 참 예쁜 이름이다. 그에 비해 ‘폐교’라는 단어는 참 스산하다. 아이들이 없어 문을 닫는 학교의 모습은 그 단어만큼이나 쓸쓸하다. 운동장에 풀이 우거지고 빈 건물에는 적막만 남는다. 점점 공동화되고 있는 시골의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전북 고창군 해리면 월봉마을에 폐교였던 공간에 ‘책마을해리’라는 예쁜 이름을 붙여 준 사람들이 있다. 이대건 촌장과 이영남 관장이다. 오랫동안 책 만드는 일을 했다는 두 사람은 부부이다. 가족 모두를 데리고 이곳으로 이주한 건 2012년이다. 책마을해리라는 이름이 붙기 전에 이곳은 폐교였다. 텅 비고 풀이 우거진 이름이었다. 1933년 광승간이학교로 개교하여 2001년 나성초등학교로 폐교되기까지 수많은 아이가 이 공간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런 시간과 상관없이 ‘폐교’라는 선고를 받는 순간 그 공간은 수명을 다한다. 공간은 여전해도, 그곳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공간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공간의 생명은 결국 이름 붙이기 나름이다. 딱 맞는 이름을 만난 책마을해리를 둘러보았다.

         

             
생산 공동체로서의 책마을

책마을해리로 가는 길, 바다에 이르는 강의 끝자락이 보인다. 검은 펄 위로 칠면초가 불긋불긋하다. 산이라 부르기도 뭣한 완만한 언덕이 이어지고 작은 저수지가 눈에 띈다. 하늘과 맞닿은 부드러운 선이 바다와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니, 바다가 보이지 않는데도 이미 바다가 보이는 듯하다. 저편 멀리 해송이 쭉 늘어선 곳이 눈에 들어온다. 가린 것 없는 트인 마을 저 너머 수평선이 숨어 있다. 강도 길도 마을도 그 수평선을 향해 바짝 몸을 낮추고 뻗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나긋함. 월봉마을이 주는 인상이 그렇다. 해가 뜨거워도 바닷바람을 숨긴 바람이 부드러운 서늘함으로 타지 사람을 안는다.

자발적 감금이 가능한 책감옥 


책마을해리에 도착하니 풀이 난 운동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운동장 입구 쪽에는 둥치가 굵은 플라타너스가 몇 그루 서 있다. 운동장 위쪽 정면으로 붉은색 벽돌건물이 보인다. 향나무에 둘러싸인 건물 앞에 동물 동상들이 서 있는 모양이 익숙하다. 건물 외벽에 ‘승공없이 통일없고 방첩없이 평화없다’는 문구가 이 건물이 지나온 오랜 세월을 증명한다. 195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란다. 그 시간을 견디고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 건물이 기특하다. 운동장을 지나 그 건물로 갔다. 입구에 붙은 작은 처마와 등이 예스럽다. 안으로 들어서면 신발장과 나무 마루를 깐 긴 복도가 나온다. 교실 두 개를 합쳐 만든  ‘책숲시간의숲’ 도서관은 천장의 나무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3만여 권의 장서가 천장 높이까지 꽂혀 있다. 천장이 높아 시원스럽다. 너른 공간에 걸리는 게 별로 없다. 천장 나무 골격들에 세월의 얼룩이 고스란하다. 그 중앙을 버티고 있는 나무에 건축년도가 적혀 있다. 60여 년 전 어느 날, 그들은 이 건물을 완성하며 어떤 꿈을 꾸었을까. 우리가 공간을 궁금해하는 건, 어쩌면 공간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거기에 담길 삶의 모습 때문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건너뛰어 또다시 그 꿈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1950년대에 지어졌다는 책숲시간의숲


“마을 공동체에 대한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어요.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기록하고 책을 펴내고, 경제적인 것도 공유하는 공동체요. 막연하게 생각하던 걸 잡지 만드는 일을 하며 좀 더 구체화했죠. ‘한국의 공동체 공간을 찾아서’라는 꼭지를 맡으며 책과 마을 공동체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어요. 그 와중에 학교라는 공간이 턱 하고 열리게 됐어요. 이 학교를 인수하고 2012년에 가족 모두 여기로 왔죠. 새로운 공동체의 시도예요. 느슨하지만 생각의 연대가 가능한 이들의 공동체라 할 수 있죠. 출판계 선후배들도 함께하고, 전라도의 사회적 기업, 전라도의 문화 예술이 연계되어 있어요. 유럽과 일본의 책마을과 결이 다른 생산 공동체로서의 책마을이 인문의 토대 위에서 가능하죠. 누구나 자기 경험, 생각을 꺼내 놓는 거죠. 독자가 생산자, 저자가 되는 마법이 일어나는 책마을 ‘해리’ 포터라고 이곳을 소개하곤 해요.”


이대건 촌장은 ‘생산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흥미롭게도 1933년에 땅을 내주고 학교를 처음 세운 이규택 씨는 그의 증조할아버지다. 마을에 길도 내주고, 저수지도 만들어 주고 했다는 그분을 마을 사람들은 참봉 하나씨(할아버지)라 부른단다. 2001년 폐교 당시 이대건 촌장에게 연락이 온 것도 후손이기 때문이다.

활자공방


그의 얘기를 듣고 아차 싶었다. 도서관으로 꾸며진 공간에만 방점을 찍을 게 아니라, 자기 경험을 쌓고 그것으로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는 활동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셈이다. 책마을해리의 모토는 ‘누구나 책, 누구나 도서관’이니까. 공간의 재생만 염두에 둘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이곳에 새롭게 생성되어 가는 생각의 연대와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생태계에 주목해야 했다. 


숲, 들, 바다, 갯벌이 지척에 있는 이곳에 책 좀 안다는 사람들이 ‘책’을 통해 사회적 그물망을 넓히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 그물망의 안쪽을 슬쩍 들여다본다. 

                 

                   

책이 지어지는 공간, 그리고 실현의 장소

책마을해리에는 10여 동 정도의 건물이 있다. 책마을해리는 복합적 유기체에 가깝다. 쓰임별로 나누어진 여러 공간만 해도 그렇다. 그래서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양이다. 책마을에 모여 있는 책은 15만 권가량이다. 이 책이 여러 군데 분산되어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 책은 버들눈작은도서관에, 나머지 자료는 책마을자료관과 앞서 소개한 책숲시간의숲에 모아 두었다. 책을 기획하고,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사진에 대해 공부하고, 쓰고 그리고 찍는 연습을 하는 누리책공방, 자발적 감금으로 책 읽기를 도와주는 책감옥, 야외공연장 바람언덕이 대표적 공간이다. 이외에도 한지활자공방, 나성사진관, 북스테이 별헤는집·꽃피는민박·시인의집이 있다. 

온누리책창고


이 공간들에서 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작업이 이루어진다. 출판캠프, 시인학교, 그림책학교, 마을학교 그 이름도 다양하다. 하지만 기본적 틀은 비슷하다. 모든 프로그램은 ‘읽고, 하고, 쓰고, 펴내기’라는 하나의 포맷을 가지고 간다. 여기서 직접 써 낸 글과 그림, 사진은 이대건 대표가 운영하는 도서출판 기역과 나무늘보를 통해 출간되어 전국의 독자와 만난다. 그는 ‘책’과 ‘책 밖에 존재하는 세계’가 서로 만나는 공간을 기획했다. 

나성사진관


“책마을에서 진행하는 건 선생님에게서 배운 것들의 증거를 찾는 과정이에요. 책은 하나의 시간과 공간이 압축된 물성을 띤 것이죠. 이것이 갖고 있는 의미망의 증거를 찾아보는 거죠. 책을 도식이라고 하면 실제로 풀어보는 그런 과정이라 할 수 있어요. 실현의 장소죠.”
언어라는 매개로 전달된 무형의 정신이 사람들과의 경험으로 풀어지며 현실 안에서 재현된다. 눈앞에 놓인 교류의 시간이야말로 그 의미망의 직접적 증거일 게다. 책이 태어나는 과정을 체험함으로써 책이 지닌 아날로그적 성격이 극대화된다. 그 과정을 이곳에서 찬찬히 따라갈 수 있다. 주제를 정하고, 취재노트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 직접 관찰하기도 한다. 이 모든 시간을 모아 종이책에 담는다. 

야외공연장 바람언덕

“꼬리 물기 뱀처럼 책 안에서 생태계는 꼬리를 물고 순환돼요. 이런 관계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어요. 읽기와 쓰기가 고리를 맺고 연결되는 것처럼, 혼자서 책 쓰기는 쉽지 않아요. 하지만 1박 2일 함께하며, 함께 쓰니까 가능해져요. 하나의 주제로 일종의 집단지성을 발휘하는 거죠. 여러 명이 이룬 작은 집단이 갯벌을 체험하고 혼자서는 할 수 없을 갯벌이라고 하는 하나의 지도를 맵핑하는 거죠. 처음에 의지가 없더라도,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경험을 하고 나면 자기들끼리 이런 주제를 가지고 함께 만들어 보자는 게 가능해져요. 함께 가는 공동체, 지역사회, 일터에서도 스스로 해 볼 수 있는 거죠.”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시간의 울림

책 하나를 완성하는 일은, 하나의 생각을 매듭짓는 일이자 관계를 짓는 일이다. 마을 어르신들과 마을학교에서 함께 “놀이인지 공부인지에 불꽃”을 일으켜 낸 두 번째 책 《개념어 없이 잘 사는 법》(도서출판 기역)을 보면 그 관계망이 보인다. ‘마을 아짐’들이 선생님과 함께 책마을해리에 모여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 나눈 시간들이 글과 그림이라는 결과물로 담겨 있다. 어린이 시인학교 2기가 펴낸 《숨어서, 숨어서》(나무늘보)에 아이들과 함께했던 김근 시인은 이렇게 썼다. “아름다운 여름이었어요. 지난여름 우리는 모두가 시였어요.” 이 말에 습지와 갯벌, 발가락을 간질이는 해변을 맨발로 걸었을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시간이다. 

책마을해리 식구들 앞줄 왼쪽부터 - 이대건 촌장, 강아지 발해, 이영남 관장, 뒷줄 왼쪽부터 - 이육남 작가, 김세미 사서, 명효원 인턴, 구여진 인턴, 김민경 체험팀장, 이영석 기획실장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어요. 사고 때문에 지능이 또래보다 처지는 아이였죠. 처음에는 통제가 되지 않아 힘들기도 했는데, 갯벌 옆 승마장에 들렀을 때였어요. 다른 아이들은 다 겁을 내는데 이 아이는 겁도 없이 말과 놀고, 말을 끌고 다니고 하더라고요. 돌아와서 그 아이가 말 그림을 그렸어요. 피카소의 작품처럼 멋진 그림이었죠.”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끌어올려지는 순간이었다. 오롯이 받아내지 못하고 지나쳤던 어떤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경험과 그것을 지켜봐 주는 성숙한 어른의 시선으로 포착되었다. 
 


야외공연장 바람언덕에서는 보름달이 뜨는 금요일마다 ‘부엉이와보름달작은축제’가 열린다. 밤 11시 30분에 모여 자정이 넘도록 함께 책도 읽고 공연도 벌이는 축제다. 얼마 전  보름밤에는 ‘행복’이 주제였다. 작가와 동네 사람들, 모두 모여 각자 가지고 온 책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찾아 낭독했다. 달빛 가득한 밤, 모두가 행복에 대해 말하는 행복한 시간이 이곳 해리에 있다. 

                   

                          


이혜정 사진 이용원

해리책마을은 청소년만화학교(8월 16일~18일), 어린이시인학교(8월 3일~5일), 청소년동학캠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전북 고창군 해리면 월봉성산길 88 해리책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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