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2호] 비가 되는 시간

구름이 허공을 가두는 마지막 조건처럼
비가 내린다

떨어질 때에만 잠깐, 유효한 이름으로 비가
쏟아질 때에만 잠깐, 완전한 몸으로 비가
흩날릴 때에만 잠깐, 퍼지는 생각으로 비가

부러질 때에만 잠깐, 과거를 돌아보는 비가
버려질 때에만 잠깐, 미래를 내다보는 비가
사라질 때에만 잠깐, 죽음을 비추는 비가

허공에서 바닥까지 투명하게 당겨놓은 가닥으로 혹은 그 가닥 뜯고 가는 시간으로
비가 제 몸의 투명함을 산책할 때,

비로소 처음의 지붕을 처음의 창문을 처음의 도로를 달리는 차들과 나무와 잎과 피어오르는 공기를, 
마지막으로―그것은 구름이 허공을 가지는 유일한 조건

나는 아이가 벗어놓고 간 잠바처럼
그네 위에 앉은 새처럼
             
(신용목, 〈투명한 순간〉 부분, 《아무 날의 도시》, 문학과지성사, 2012)

                              

신용목의 시집 《아무 날의 도시》는 우리가 이 도시의 포로들에 불과하다는 걸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묻지 마, 어디서 왔냐고.//(…) 묻지 마,//중력의 울타리를 친 행성의 서러운 수용소에서/줄지어 밥을 타러 가는 이유에 대하여.(〈포로들의 도시〉)” 이 도시의 절망은 이유도 까닭도 없기에 만성적 우울처럼 배경으로 깔려 있다. 답도 탈출구도 없는 이 세계는 횟집 수족관과 흡사하다. “우럭이 관 속에 누워 있다.//(…) 한생이 무덤 속이었던 우럭/물속에서 타 죽은 우럭(〈나도 가끔 유리에 손자국을 남긴다〉)” 그들은 수족관에 갇힌 우럭처럼, 이미 정해진 운명의 수순을 기다리며 아파트 유리창에 붙어 밖을 내다본다. 


도시의 출구 없는 멜랑콜리를 그리기 위해 시인은 이미지의 층위를 여러 겹으로 쌓는다. 그것은 하나로 모이지 않고 산발적으로 흩어진다. 목적 없이 허공을 맴도는 검은 봉지처럼 다음에서 다음 이미지로 건너뛴다. 신형철은 이 시집의 해설에서 “신용목의 이미지는 혼돈된 이미지가 아니라 혼돈된 것의 이미지”라고 설명한다. 그의 시에는 묵시록적 언어의 향연 가운데서도 신선하게 튀어 오르는 낯선 이미지가 역동적 힘을 지니고 웅크려 있다. “나는 텔레비전을 본다,/관 속으로 잘못 뻗은 아카시아 뿌리를/씹어 먹는 시체의 표정으로(〈노아의 여름〉)” 당겨지지 못한 화살처럼 멜랑콜리의 에너지는 까맣게 침잠해 있다가 어느 순간 낯선 이미지와 함께 격발된다. 


시 〈투명한 순간〉은 이 시집에서 그나마 밝은 편이다. 이 시에서 “비”는 출구 없는 멜랑콜리를 잠시나마 달래 주는 탈출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허공에 떠 있는 비가 맞이하는 순간은 그 자체로 이미 최초이고 최후이다. 비가 쏟아지는 순간, 비는 바로 그 순간 모든 인과를 벗어나 저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우리를 향해 뛰어온다. 또 다른 형태로 변화하기 위해서 비는 거침없이 쏟아져 어딘가로 사라진다. 


시인은 수증기 덩어리인 무거운 구름이 비로 바뀌어 쏟아지는 순간을 “구름이 허공을 가두는 마지막 조건”이라고 한다. 짧은 순간 허공을 직선으로 내리그으며 떨어지는 빗줄기의 모양은 무한으로 펼쳐진 공간을 잠시나마 한정된 직선으로 구획 짓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조차 아주 잠깐이라, 가두었다 하기도 어려운데, 더 극적인 점은 가두어진 직후에 바로 풀려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비는 “떨어질 때에만 잠깐”, 그 잠깐 잠깐 사이에 이름을 몸을 생각을 가지지만 그 모든 건 흩날리고 퍼져 버리기에 아름답다. 과거와 미래와 죽음이, 그 잠깐에 있다. 부서지고 버려지고 사라지는 순간에 있다. 완성되고 이름 붙여지고 규정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찰나적 스러짐 속에 영원의 빛이 번쩍하고 삶을 지나친다. 비는 그렇게 “제 몸의 투명함을 산책”한다.


그렇게 비가 내리는 동안, 비는 “처음”인 양 모든 것을 두드린다. 왜냐하면 아주 잠깐 존재하고 소멸하는 비는 모든 순간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처음 창문에 닿고, 처음 차와 나무와 잎사귀에 떨어져 그 즉시 소멸된다. 그것은 시인이 말하는 “최초의 나”와 일맥상통한다. 그렇기에 시의 말미에 다시 존재하는 나는 “아이가 벗어놓고 간 잠바처럼” 순수하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 비를 바라보고, 비의 최초와 최후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비가 되었으므로. 아주 투명한 순간이 그렇게 완성된다. 


글 그림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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