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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11호]애개미에 사는 사람들
동구 신상동 안아감 마을 | 안아감 마을로 들어가는 길, 멀리 한 할아버지가 한손에 쟁이를 쥐고 걸어온다. 고단한 아침 일을 마쳤는지 기운은 없지만, 이 길을 걷는 게 힘들지는 않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이 길에서 아주 먼 옛날 한 소금장수가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골짜기를 아무리 걸어도 마을이 나오지 않아 소금장수가 애가 닳아 죽은 곳. 마을 이름의 유래는 이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예전에 소금장수가 소금을 짊어지고 걸어오다가 너무 골짜기라 애 닳아 죽었댜. 그래서 애개미여. 도랑 따라 길이 있었는데 지게 진 사람 한 명만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이었어.”
올해 여든넷의 이찬열 할아버지는 이곳 안아감 마을에서 태어났다. 산골짜기에서 마을이 나오지 않아 소금장수가 애가 타서 죽었다는 그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가장 옛날의 안아감 마을 역시 산골짜기 작은 마을이었다. 작지만 집마다 애들 소리로 북적이고 집 앞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을 사람을 몇이라도 마주쳐 이야기 나누는 그런 마을이었다.
“지금은 젊은이 다 떠나고 노인네들만 남아 있는 겨. 늙은이들은 그냥 농사짓고 살어. 이제 몸이 힘들어서 농사도 못 지어. 그냥 다니는 거지 뭐.”
마을은 조용했다. 저 멀리 도로에서 간간히 차 소 리가 들려 왔고 새소리가 울렸다. 할아버지의 집은 마을 입구에서 멀지 않았다. 서른네 살 때 목수 한 명과 둘이서 한 달 넘게 지은 집이다. 이 집에서 육남매를 낳아 키웠다.
“갈치기가 힘들었지. 나는 먹도 못했는데 애들은 그래도 먹여 키웠어. 농사 지어서 먹여 살리기가 여간 힘들어. 그래도 내 평생 돈은 빌리지도 안혔어.”
한 곳에서 사는 동안 세상이 참으로 많이 변했다. 원래는 담장도 없던 집에 새마을 운동을 하며 담장을 만들었다. 이전에는 담장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 식구나 같았다. 여전히 오래 봐 온 마을 사람들과는 허물이 없지만, 지금은 토박이가 반, 새로 이사 온 사람이 반 정도 된다.
사는 게 어려웠지만 마음은 팍팍하지 않았다.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할 때 인부들이 집마다 방을 하나씩 빌려 살았을 때도 할아버지는 돈을 받을 생각을 하지 못 했다.
“그 사람도 빌어먹으러 왔는데 돈을 어떻게 받아. 애들꺼정 있고…. 그 가족이 3, 4년 넘게 우리 집에 있었지. 고속도로 날 때는 시끄러워서 사람 말소리는 알아듣도 못혔어. 굴 팔 때는 돌멩이가 여기까지 날아오고 했어. 고속도로 개통할 때 요 앞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지나갔지. 경찰들이 많이 지나갔어.”
아이들이 많다고 애개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할머니를 두고 할아버지는 멀리 나가는 일이 없다. 아침저녁으로 논밭을 돌보러 가는 게 전부다. 답답할 때면 집 앞 감나무 그늘에 앉아 바람을 쐬기도 한다.
감나무 그늘 밑은 시원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서로 부대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얹힌다.
“예전에는 북적하니 애들도 많고 친구도 많았어. 여기가 애들이 제일 많다고 소문도 났었어. 그래서 애개미라고 하기도 했어. 나 청년 때는 집마다 대여섯 명씩 있었으니까. 지금 친구들은 다 죽었어. 동네서 남자 중에는 내가 제일 어른이야. 여자는 나보다 한 살 더 먹은 할머니가 있어. 더러 경로당에 나오더니 이제는 나오들 안 햐.”
한창 농사일로 바쁠 때는 노인정에 사람이 없다. 겨울이나 되어야 하나둘씩 모여 윷놀이도 하고 밥도 해 먹는데 그마저도 나오는 사람이 점점 준다. 마을 사람은 줄어드는데 외지인의 달갑지 않은 방문은 늘어났다. 밤에 시내에서 차를 타고 와서 쓰레기를 몰래 버리고 가는 사람들, 근처 산에 왔다가 농작물을 뜯어가는 사람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골머리를 썩는다.
터널이 뚫린 앞산은 안산, 뒤에 있는 산은 큰골, 안산 옆에는 갈미봉이다. 안산을 넘어가면 옥천이다. 감나무 아래 앉아 할아버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한다. 남들은 등산하러, 나물을 캐러 오는 곳이지만 정작 할아버지는 산에 오른 적이 없다. 먹고사느라 바빠 등산 같은 건 생각도 못 해 봤다. 이야기는 어느새 다시 먹고사는 문제로 흐른다.
“요즘 포도 싸는 때야. 일요일에 딸이랑 사위가 포도 싸러 온다고 하는데 모르지. 지금은 포도 농사지어 봤자 헛일이여. 인건비도 안 나오는 걸.
이찬열 할아버지와 헤어지고 마을 안쪽으로 향했다. 포도밭, 벼농사를 짓는 논을 따라 난 길을 걸었다. 사람 대신 허수아비가 하나씩 나타났다. 모양도 제각각이다. 대충 옷을 입혀 놓고 모자를 씌워 놓은 것, 햇빛에 반사되는 독수리 모양 연, 자세히 살펴보면 주인의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종종 개집도 보인다. 사람 대신 밭을 지키며 낯선 이를 경계하면서도 그늘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땅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마을
마을을 돌아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한참을 가니 집 현관에서 손님을 보내며 인사하는 아저씨가 보인다. 마을 이야기를 청하니, 윗집 할아버지에게로 안내한다. 안아감 마을에서 80년을 살았다는 이동우 할아버지다. 이제까지 마늘을 한 접 한 접 묶어 두고 그늘 아래 의자에 앉아 쉬는 중이다. 할아버지가 묶어 놓은 마늘을 이제는 할머니가 창고로 옮긴다.
“다 나가고 마을엔 아무도 없어. 살길을 맨들기가 어렵잖아. 농사짓느라 힘만 들지. 힘이 나야 말이지. 마늘도 싸고 농작물은 다 싸. 작년 가을서부터 마늘 심어서 열세 접이 나왔어. 한 접에 오천 원이면 이게 얼마야?”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농사 안 짓는 젊은이들은 마을에 남을 이유가 없고 농사짓는 이들 중에 대청댐 수몰 지역에 논밭이 있던 이들은 보상을 받아 나갔다. 보상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곳에 남아 전기세를 내려고 농사를 짓는다.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지. 그린벨트로 묶여 있지. 땅을 건들들 못하잖아. 집 개축 몰래 하면 부수고 허가 내서 하려면 안 해 주고. 땅을 건들들 못해. 농사져서 뭐 하냐구. 쌀 한 마지기가 얼만데. 할 수 없어서 죽지 못해 살지. 땅 안 묵히려고 농사 짓는 겨. 농민들 다 어려워. 어떻게 할 길이 없어.”
여든 해를 산 할아버지와 예순다섯 해를 산, 마을에서 젊은 축인 아저씨가 농사지으며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야기를 잇는다. 선거철이 되면 농민을 위한다는 후보들이 머리 숙여 조아리지만, 당선이 되고 나면 농민의 ‘ㄴ’ 자도 꺼내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겠느냐고 말이다.
대덕군이었던 곳이 대전직할시에 편입되고 대전광역시 동구 신상동이 되는 동안, 마을에는 길이 나고 아스팔트가 깔렸다. 마을 앞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들어섰고 근처에는 대청댐이 생겼다. 자식들은 커 마을을 떠났고 마을 사람들이 줄었다. 그런데 할아버지에게 이 변화보다 와 닿는 건 농사일의 값어치가 떨어졌단 것이다.
“나 죽고 아들한테 논 물려 줘도 농사를 지으려나 모르지. 옛날에는 대가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잖아. 그런데 농사를 안 지으면 땅이 묵힌다고. 2년만 묵히면 산이 돼. 그걸 다시 개간하려면 돈이 들잖아. 장비 하루 쓰는 데 45만 원, 50만 원 한다고.”
몸이 따라주지 않아 신경 쓰이는 것은 땅이다. 저 세상으로 가더라도 땅만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산골짜기를 일구어 논을 만들고 밭을 만들고 집을 만들어 가족을 이루고 살아온 안아감 마을의 역사가 한 사람의 인생에도 다르지 않게 녹아 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초여름 날의 오후, 땅이 걱정인 사람들이 모여 농사 이야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