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11호] 이렇게 쓰면 기분이 조크든요

             
한국적이었다. 6월 11일, 대전에서 서울시청 광장까지 가면서 마주친 장면들은. 그곳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축제를 반대하는 ‘기독시민연대’ 등의 단체들은 광장을 둘러싸고 시위를 벌였다. 한쪽에선 비장하게 “동성애 하면 에이즈 걸립니다. 죽습니다.”를 반복했고, 시선을 잡아끄는 무대 위에선 한복 입은 여인들이 일렬로 서서, 무아지경으로 북과 장구를 두들기고 있었다. 떼로 방언을 쏟아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행인들이 ‘진리’를 들으려 하지 않아 안타까운 듯, 불투명하고 꽉 찬 눈동자로 강렬한 에너지를 쏘았다. 한국 어른들에게서 자주 봐 온 고집스러운 눈빛이었다.

반동성애 시위 무리에는 10대도 있었다. “동성애는 유전이 아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무지개색 끈을 발목에 두른 나를 경멸스럽게 쳐다보았다. 교회에서 동원되어 나온 것 같았다. 교회 안에도 성 소수자가 있을 것이다.
K-느낌이 나를 압도했던 순간은 “동성애 조장 에이즈 확산 세금 폭탄.”이라는 피켓을 보았을 때다. 퀴어문화축제 같은 걸 열면서 동성애를 ‘조장’하면 에이즈가 퍼지고, 치료에 들어가는 의료지원금이 늘면 세금인상이 될 거라는 건데…. 에이즈는 바이러스 보균자와 성관계를 할 때 감염될 가능성이 있는 질병이다. 동성 간 사랑을 하는 것이 에이즈를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것이 아니다. 성 소수자, 성 다수자 할 것 없이 돈 없어 힘든 와중에, 동성애자들 때문에 ‘세금 폭탄’ 맞게 될 것이라는 말은,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 정서에 불을 붙이기에 저열하다.
동성애 ‘조장’이라는 말도 웃기다. 이성애자 독자에게 묻고 싶다. 주변에서 동성애를 부추긴다고 하여, 없던 마음이 생길 것 같은가. 동성애도 이성애와 같은 사랑이다. 사랑은 조장할 수 없다. 사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이성애’만 존재하는 것처럼 말해 왔다.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처음 알게 된 청소년들은 ‘내가 비정상이 아닐까.’ 하며 불안해한다. 사랑의 에너지는 그대로,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혐오로 바뀐다. 그동안 로맨스는 거의 전부, 이성애를 전제한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의 기반에는 정상 가정 이데올로기가 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토끼 같은 자식이라는 이 안정적인 구성이 정상적인 가정이라는, 한국 사회의 기본값. 그러니까 반대시위 장소에서 한 소년이 “엄마 아빠가 사랑해서 저를 낳았어요.”나, “성결한 자녀 효도하는 삶 행복한 가정” 따위의 피켓을 들고 반동성애 시위를 하는 것일 테다. 그럼 불임부부는? 한부모 가정은? 아, 폭력적이다.

무수한 반동성애 시위자들을 뚫고 도달한 서울 광장에서 나는 무얼 느꼈나. 입에서 “여기 다른 나라 같아.”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아무도 내게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고, 각자 자신의 모습인 채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짧은 바지를 입고, 배꼽티를 입은 남자. 수영복을 입은 여자. 모두 말이다. 내가 잔디밭에 앉아있을 때 본 두 남자는, 어깨동무하고 걸었다. 한 사람의 티셔츠에는 “내꺼지만 남자.”라고 쓰여있고, 그 옆 사람의 티셔츠에는 “남자지만 내꺼.”라고 쓰여 있었다.

그곳엔 동성애자, 양성애자, 무성애자, 트렌스젠더, 그리고 성 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그곳에 왔던 퀴어 중에는 자신의 성 지향성, 또는 성 정체성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숨기고 살다가 축제 장소에 와서 비로소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365일 중에 단 하루다.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날은. 이날 한 참가자의 티셔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어색했지.”
격렬히 ‘진리’를 전파했던 반동성애 집단만이 퀴어축제와 퀴어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축제가 끝나고, 인터넷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찾아봤을 땐, “축제를 꼭 그렇게 선정적으로 해야 하나.”라는 의견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마 참가자 일부가 신체 노출이 있는 의상을 입기 때문에 거의 매년 ‘선정성 논란’이 생기는 것일텐데, 사실 선정성으로 따지자면 일부 대학 축제나 음악방송이야말로 논란 덩어리이다. 퀴어축제에 거부감이 드는 이유는, 선정성 때문이 아니라, ‘게이스러운’ 것을 보기 싫어서가 아닐까? 그들이 왜 노출했는지는 관심 없는가. 성을 양지로 끄집어 내보자는 거다. 광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대했다. 광장 밖에서 여성을 상품화하는 것들이야말로 사라져야 할 선정성이다. 이제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평가하지 말고, 자신의 ‘보는 눈’을 평가할 때다.

그런가 하면 “꼭 그렇게 성 소수자들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하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와는) 다른 (너의) 정체성을 (나에게) 드러내니 (내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난 네가 불편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누구의 기준인가. 동성애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성애자들은 꼭 그렇게 자신의 이성애 지향을 드러내야 하나?”

오후 일곱 시가 되었을 때, 광장 안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광장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을 거리에서 봤을 땐 반가웠다. 새끼손가락 끝에 돋은 붉은 실이 그들과 연결되어있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걸어 나오자, 그들은 사라졌다. 축제가 끝났다. 세상에는 이성애자 여자와 남자만 있는 것 같았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퀴어 축제는 퀴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행위이다. 있어도 보려고 하지 않고, 모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전에도 퀴어가 살고 있다. 축제를 열어야 한다. 끝내주게 즐겁고, 멋있게. 

 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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