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11호] Ryu.k.y를 만나러 간다

유경열 작가 | 목 한쪽에 쭈그리고 앉은 남자를 보았다. 움푹 팬 벽을 시작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동그랗고 작게 팬 벽은 까만 부엉이 눈동자가 되었다. 어떤 더운 날, 우연한 만남이었다. 유경열 작가는 오래된 벽의 흔적에 그림을 그린다. 유 작가를 본 이후로 유심히 벽을 보며 다녔다. 오래된 벽, 시간이 지나간 흔적이 남은 대흥동 벽에서 Ryu.k.y라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해 보려 한다
                 
유경열 작가가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올해 1면 확실히 하려고 하고요. 아이들 가르치는 일도 꽤 오래 했죠. 5년 정도 했으니까요. 미술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친구들에 비하면 늦은 나이였죠.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야 입시 미술을 시작했어요. 그림 그리는 건 어릴 때부터 좋아했는데, 그걸 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먹고사는 문제에 지레 겁을 먹었던 거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미술교육과라는 절충안을 찾고 입시 미술을 시작했어요. 미술교육과에 다니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대학에 입학해서도, 대학 졸업하고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뭔가 선택했을 때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거든요. 그래야 후회가 없으니까요. 막상 일하다 보니까 일을 하면서 내 작업을 한다는 게 어려웠어요. 잠깐 쉬면서 진짜 하고 싶은 걸 해 보자고 마음먹었어요.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에 관해서도 찾아보려고 했고요.”
뭘 해야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무엇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작업인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길인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당장 알 수 있는 게 없으니 차분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처음 일을 그만둘 때만 하더라도 대흥동 골목을 다니며 그림을 그릴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뭘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3년여 전부터 알고 지내던 박석신 작가를 만났다. 고민을 털어놓으니 쉬는 동안 문화공간 주차에서도 여러 프로젝트를 해 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가며 대흥동을 다시 보게 되었다. 도시가 형성되면서 쇠락한 도심, 그 안에서 오래된 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는 게 인상적이었다. 조화를 이루는 것에서 유경열 작가는 본인이 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가만히 시간의 흔적을 머금은 벽이 하나씩 던져준 영감을 따라 그림을 그렸다. 유경열 작가의 그림은 대흥동 문화공간 주차에서 시작했다. 문화공간 주차 앞 골목을 따라 죽 가다가 중앙로 112번길 38 소산원을 만났고, 중앙로 112번길 29 산호다방을 만나기도 했다. 지금은 문을 닫은 보문로 262번길 31-2 산호여인숙 한 귀퉁이에도 있고, 중앙로 130번길 37-6 미은오리작업실 옆 주차장에도 있다. 


벽이 뜯긴 흔적, 부서진 흔적이 유경열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벽이 균열하기 시작한 지점은 줄기가 되어 한 송이 꽃으로 피고, 페인트가 뜯긴 자국은 뒹구는 고양이가 되기도 한다. 삐져나온 못 자국은 남자가 입에 문 담배 한 개비가 되고, 녹슨 쇠 자국이 진하게 남은 벽은 피에로의 눈물이 된다. 

                 

                  

무엇이 안 될 수도 있지만

                     
찬찬히 본 대흥동은 오래된 건물과 새로 지은 건물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곳이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풍경이 잘 어우러지는 걸 보며 무엇이든 이곳을 헤치지 않았으면 했다. 무엇을 하든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림만 크게 드러나도록 하는 게 아니라 풍경에 흡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대흥동은 대흥동만이 가진 매력이 있는데 그게 조금이라도 훼손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신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오래된 건물이 주는 느낌이 있잖아요. 건물 외벽에 있는 흔적이 낡았다는 느낌보다는 어떤 영감을 주는 거예요. 벽에 있는 작은 흔적들 위에 어울릴 만한 그림을 하나둘 떠올렸어요. 그게 재미있어서 하나둘 그리다 보니 많아지더라고요. 처음엔 이렇게 100개를 하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100개를 넘기고 나니까 아직도 그리고 싶은 게 많더라고요. 200개까지 채우고 지도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이 있는 곳을 찾는 지도를 만드는 것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무엇을 해야겠다는 특별한 계획 없이 시작한 것들이 점점 하나씩 살이 붙었다. 무엇이든 시작했을 때 후회가 없도록 하자는 작가의 오랜 철칙 같은 것 덕분이었다. 


“지도를 만들겠다고 다짐한 건 보답 같은 거예요. 벽에 그림을 그리면서 처음엔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붙이고 양해를 구했어요. 그런데 워낙 많이, 워낙 작게 하다 보니까 일일이 양해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한 거예요. 나중에 지도를 만들어서 그림을 찾는 여행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을 때 유쾌한 추억 하나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게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제게는 영감을 주는 공간이었으니까, 이곳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고마움을 표시하는 거죠.”

                 

                   

지금은 시간의 흔적에서 나를 찾는다 

                 

 유경열 작가에게 지금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원하는지 찾는 과정이다. 처음엔 1년으로 계획했던 휴가도 얼마나 계속될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냥 지금에 최선을 다한다. 낡은 벽의 작은 틈에서 자기를 찾는 작업을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계속해 볼 생각이다. 


“옛날에는 작업할 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데 이런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까 계속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거예요. 어떤 때는 벽의 주인에게 허락도 받아야 했고, 우연히 그림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요.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고정관념이 깨지기 시작했어요. 관객 역시 작품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걸 깨닫게 된 거죠. 조금씩 생각이 변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놀라요. 편견이 깨지고 진짜 제가 어떤 모습인지 알아 가는 과정이겠죠. 대흥동에서 200개를 그리고 지도까지 만들면 대동이나 유성시장 쪽으로 가 보려고 해요.” 

                   


글 이수연  사진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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