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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4호]다를異
구 대전형무소 망루와 우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 참으로 무서운 발상이다. 이것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종종 비극을 초래한다.
역사가 증명한다. 대전 현대사가 그렇다. 좌익과 우익이 대립했다. 생각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총을 쐈다.
죽창으로 찔렀다. 그 과정에서 죄도 없는 수많은 양민이 함께 희생됐다. 비극이었다.
대전형무소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들이다. 요즘 교육계가 떠들썩하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 때문이다.
일련의 과정을 보며 새삼 대전형무소 비극이 떠올랐다. 다른 듯 닮아 있었다.
그 참혹한 사건과 국정화 문제가 말이다. 두 사건을 생각하며 대전형무소 망루와 우물에 다녀왔다.
비극의 역사를 기억한다
대전형무소(개소 당시 대전감옥, 1923년 대전형무소로 개칭)가 생긴 때는 1919년 5월 1일이다. 지금의 중촌동 현대아파트 자리에 개소했다. 대전형무소는 시작부터 비극이었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부족한 수감 시설 확충을 위해 곳곳에 감옥을 신축했다. 대전형무소도 그 과정에서 개소했다. 이후에도 안창호, 여운형, 김창숙 등 비중 있는 독립운동가가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슬픈 역사다.
대전형무소는 광복 이후에도 그대로 사용했다. 1961년 대전교도소로 이름만 개칭했다. 유성구 대정동으로 이전한 건 1984년이다. 이전하면서 형무소 본관과 담장은 철거했다. 각각 네 개씩 있던 망루와 우물만 하나씩 남겼다.
남아 있는 망루는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돼 있다. 적벽돌과 시멘트 벽돌로 타원형 몸통을 축조했다. 철근콘크리트로 각층 바닥판과 지붕부를 구성했다. 지상 4층 규모에 높이는 7.85m다. 건축적으로 가치가 크진 않다. 다만, 대전형무소 대신 남겨졌다는 점에서 역사적 상징성을 갖는다.
구 대전형무소 망루에 관한 재조사 필요
<2010 근대문화유산조사보고서>를 보면 현재의 망루가 1939년 건립된 것으로 나온다. 1939년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로 대전형무소를 증축했다. 망루도 그때 건립한 것으로 추측한 듯하다. 하지만 아래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 현재의 망루는 1962년 즈음에 새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2010 근대문화유산조사보고서>를 보면 현재의 망루가 1939년 건립된 것으로 나온다. 1939년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로 대전형무소를 증축했다. 망루도 그때 건립한 것으로 추측한 듯하다. 하지만 아래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 현재의 망루는 1962년 즈음에 새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우물은 망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위치는 추모탑 뒤편이다. 대전형무소 개소 당시 재소자 식수용으로 만들었다. 근 100년의 세월을 간직한 셈이다. 때문에 우물은 모든 걸 기억한다. 독립운동가의 슬픔도, 대한민국 광복의 기쁨도, 그리고 참혹했던 사건의 순간도. 1950년 6월로 거슬러간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를 반성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6·25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제주4·3항쟁 관련자, 여수·순천사건 관련자 등 정치사범 일부가 수감돼 있었다. 정부는 6월 28일부터 4일 간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포함해 보도연맹원, 민간인 등 1,400여 명을 산내 골령골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집단학살 했다. 같은 방식으로 7월 17일까지 3차에 걸쳐 총 7,000여 명을 학살했다. 북한군에 의한 석방과 부역을 우려한 탓이다.
7월 19일, 북한군이 대전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9월 28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전까지 대전은 북한군 치하였다. 북한군은 공직자, 청년단 간부, 민간인 등을 대전형무소에 수감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졌다. 수세에 몰린 북한군은 9월 25일부터 3일간 대전형무소에 수감했던 1,557명을 학살했다. 인근 구덩이에 묻거나 대전형무소 우물에 매장했다. 군경이 3차에 걸쳐 집단학살 한 것과 같은 방식, 같은 이유였다.
다시 대전을 장악한 국군은 북한군 부역자를 색출했다. 1,000명 이상을 대전형무소에 수감했다. 1월 17일, 재소자 166명을 산내 골령골로 끌고 가 학살했다. 이밖에도 재소자 439명이 맞아 죽거나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병들어 죽었다.
쌀 준다는 말에 보도연맹에 가입한 청년, 평범하게 살아가던 공무원, 북한군이 들이미는 총에 저녁밥 내줬던 할머니…. 총 8,700여 명이 대전형무소로 끌려와 희생됐다. 같은 핏줄과 피부색, 같은 언어와 생활방식을 나누던 우리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누나, 형이었다. 다만 생각이 달랐다. 혹은 생각이 다르다고 판결받았다.
역사학은 해석을 전제로 한다. 당대 기록이나 유적, 유물을 발굴하고 연구하고 해석하는 게 역사학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 해석한 결과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개인의 몫이다. 그것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말하는 민주공화국 기본 이념이다. 정부가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하나의 해석을 주입하겠다는 뜻이다. 민주공화국 기본 이념에 반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을 때 어떤 비극이 벌어졌는지, 대전형무소가 보여 준다.
쌀 준다는 말에 보도연맹에 가입한 청년, 평범하게 살아가던 공무원, 북한군이 들이미는 총에 저녁밥 내줬던 할머니…. 총 8,700여 명이 대전형무소로 끌려와 희생됐다. 같은 핏줄과 피부색, 같은 언어와 생활방식을 나누던 우리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누나, 형이었다. 다만 생각이 달랐다. 혹은 생각이 다르다고 판결받았다.
역사학은 해석을 전제로 한다. 당대 기록이나 유적, 유물을 발굴하고 연구하고 해석하는 게 역사학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 해석한 결과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개인의 몫이다. 그것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말하는 민주공화국 기본 이념이다. 정부가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하나의 해석을 주입하겠다는 뜻이다. 민주공화국 기본 이념에 반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을 때 어떤 비극이 벌어졌는지, 대전형무소가 보여 준다.
글 송주홍 사진 토마토 DB, 송주홍 사진제공 반공애국지사유족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