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그 이름처럼


중구 태평동


태평동은 남쪽으로는 유천동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유등천 물길을 따라 변동과 경계를 이룬다.
동북쪽으로는 호남선을 따라 오류동과 면해 있다.
태평동은 예로부터 유등천을 끼고 넓은 들로 형성된 마을로 벌말, 평리 등으로 불렀다.
1895년에는 회덕군 유천면 평리, 수침리, 신촌리, 용두리, 도마리 일부 지역이었다가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대전군 유천편 평리로 편입되었다.
1935년에는 대전부 설치로 대덕군 유천면 평리로 편입, 1942년에는 대전부 태평정으로 편입됐다.
1949년에 대전시로 승격하면서 ‘태평동’이 되었으며 1983년 인구증가로 분동하여 태평1동, 태평2동으로 분리했다.
태평동은 그 중심에 위치한 태평오거리에서 나뉜 길이 불가사리 모양처럼 사방으로 나뉘어 각각의 구획을 나누는 모양새다.
그중 한 축인 동시에 태평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태평로를 기준으로 하여 좌우로 태평1동과 태평2동이 나뉜다. 


 

 
넓은 들이었던 마을
태평(太平)동은 예부터 이 지역이 넓은 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짐작한다. 옛 지명인 벌말, 평리 등에서 그 유래를 엿볼 수 있다. 지금은 들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주거지역으로 완전히 변했지만, 그 이름에 걸맞은 평화로운 분위기가 언뜻 비친다. 
태평동은 그 이름처럼 평화롭고 조용하며, 한편으로는 큰 특징 없는 동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곳의 절반 정도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지 오래고, 동네 어디를 걸어도 특별한 인상을 콕 집어낼 수 없이 무채색 같다는 게 태평동에 들어선 첫 느낌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름의 세월을 간직한 듯 보이는 서대전역 뒷편 동네를 둘러보기로 했다. 태평오거리를 기준으로 남동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태평종합시장, 매년 목신제를 지내는 느티나무 쉼터 등이 자리한 곳이다.
태평1동 주민센터 부근에서 걸음을 시작해 대로변을 따라 죽 걸었다. 태평네거리를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 방향으로 코너를 돌아 계속 걸었다. 별다를 것 없이 낡고 바랜 도심지의 풍경이 이어지는 가운데, 태평카센타 바로 옆에 자리한 느티나무 쉼터에 도착했다. 늦가을을 지나는 때인지라 낙엽을 떨구기 시작하는 느티나무는 어딘지 왜소해 보인다. 뒷편 안내판에는 느티나무 수령이 250년이라는 정보가 쓰여 있었다. 단을 높인 쉼터 한편으로는 담소를 나누기 좋을 법한 정자를 마련해 놓았다. 이곳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을 맞아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느티나무 목신제가 열리고 있다. 
동네의 이런저런 사정을 듣기 위해 골목을 죽 걸으며 상점들을 기웃거렸다. 아파트 단지를 마주보고 있는 오래된 상가 건물에 들어선 금호전파사의 문을 슬몃 열었다.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느긋하게 앉아 있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중년의 부부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며 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궁금한 게 있으면 얼른 말하라며 아저씨에게 대답을 해 주라 일렀다. 아저씨는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볼륨을 낮추었다.
 

 
간직한 듯 보이는 서대전역 뒷편 동네를 둘러보기로 했다. 태평오거리를 기준으로 남동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태평종합시장, 매년 목신제를 지내는 느티나무 쉼터 등이 자리한 곳이다.
태평1동 주민센터 부근에서 걸음을 시작해 대로변을 따라 죽 걸었다. 태평네거리를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 방향으로 코너를 돌아 계속 걸었다. 별다를 것 없이 낡고 바랜 도심지의 풍경이 이어지는 가운데, 태평카센타 바로 옆에 자리한 느티나무 쉼터에 도착했다. 늦가을을 지나는 때인지라 낙엽을 떨구기 시작하는 느티나무는 어딘지 왜소해 보인다. 뒷편 안내판에는 느티나무 수령이 250년이라는 정보가 쓰여 있었다. 단을 높인 쉼터 한편으로는 담소를 나누기 좋을 법한 정자를 마련해 놓았다. 이곳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을 맞아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느티나무 목신제가 열리고 있다. 
동네의 이런저런 사정을 듣기 위해 골목을 죽 걸으며 상점들을 기웃거렸다. 아파트 단지를 마주보고 있는 오래된 상가 건물에 들어선 금호전파사의 문을 슬몃 열었다.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느긋하게 앉아 있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중년의 부부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며 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궁금한 게 있으면 얼른 말하라며 아저씨에게 대답을 해 주라 일렀다. 아저씨는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볼륨을 낮추었다.
 
 


 
“서울서 대전 내려온 지 20년 정도 돼서 옛날 일은 잘 몰라요.
요 앞 태평주공아파트 자리는 다 논밭이었대요. 미나리깡도 있었다지 아마.
다른 건 몰라요. 옆 골목 돌아가면 있는 메리야스 집 아주머니가 여기 오래 살았어요. 거기 가서 물어봐요.”
 
 
방직공장이 사라진 자리
연일 늦가을비에 한껏 축축하고 을씨년스러워진 날씨 탓인지 사람들의 반응도 영 차갑다. 몇 번의 퇴짜를 맞고 별수 없이 물어물어 경로당을 찾았다. 태평1동 경로당은 태평종합시장 인근에 자리했다. 점심 때가 막 지난 경로당에는 반찬 냄새가 솔솔 풍긴다. 어르신들은 상을 치우고 앉아 귤을 까 먹으며 한숨 돌리던 참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한 할머니가 태평동에 35년을 살았다는 다른 할머니의 등을 떠민다. 그러나 할머니는 크게 변한 게 없고, 아주 옛날 일은 잘 모른다고 했다. 결국 경로당에서 가장 연장자인 83세 김경순 할머니에게로 바통이 넘겨졌다.

“스물다섯에 흑석리에서 와서 지금까지 살았어. 여기가 강변이고 다 들판이었어.
아파트 있는 데가 다 들이었지. 변동 가는 길에 있는 동네를 들말, 벌말이라고 했어. 그 때는 집이 몇 개 없었어.
닭장에서 닭 먹이고 수돗물도 없어서 펌프질 하고 그랬지.
나중에는 조폐지 공장도 생기고 도랑가에 피혁공장도 있었어. 태평시장은 생긴 지 얼마 안 돼,
처음에 도로에 조금씩 놓고 팔다가 저렇게 됐지. 뚜껑(아케이드)은 작년에 한겨.
여기는 살기 좋아. 동사무소, 은행, 병원 다 없는 게 없으니까.”




 
 
 
본래 대부분이 벌판으로 이뤄져 있던 태평동은 일제강점기 무렵에 피혁 및 직물공장들이 들어서며 경공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동시에 인구 유입도 늘어난 것으로 여러 기록에서 전한다. 이후 1990년대 후반 채산성 악화로 어려움을 겪으며 피혁공장 등은 문을 닫게 된다. 1997년 11월 1일자 한겨레신문에 난 ‘대전피혁터 아파트건설’이라는 제목의 작은 기사에서 관련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사에서는 “지난 80년간 국내 피혁업계를 이끌어 왔던 대전피혁이 올해 말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 대전피혁은 지난 1917년 9월 대전시 중구 태평동에 설립돼 피혁원단 등을 생산하며 줄곧 국내 피혁업계를 주도해 왔고, 70년대 중반엔 3천여 명의 노동자를 데리고 1천억 원에 가까운 매출액을 올리기도 했다.”라고 전한다. 당시 피혁공장 등이 있던 유등천변 자리에는 버드내 아파트와 동양파라곤아파트 등이 들어섰다.
 
 
지우개로 지우듯

 
“느티나무는 원래 더 큰 게 있었는데 죽고 옆에 있던 두번째 것이 저렇게 큰 거여. 묵은 놈 있을 때나 250년이지 저건 그렇게는 안 되야.”
 
태평1동경로당을 나와 서대전역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태평1동은 쌍용아파트와 태평아파트가 들어선 서쪽과 서대전역 뒷편 동네로 나뉘어 있는 듯 보였다. 태평네거리에서 뻗어나온 수침로가 그 경계를 나누고 있었다. 이정표처럼 코너에 자리한 이경약국을 바라보며 길을 건넜다. 주택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된 이쪽 동네는 한눈에 보아도 스러져 가는 빈 집과 미처 간판도 떼지 못한 빈 상가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중 영업 중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는 ‘김조산소’의 허름한 외관을 카메라에 담고 있던 중 바로 맞은편 태평종합가구의 주인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빈집 찍는거유?”
 
올해 77세인 아주머니는 태평동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열여섯 살 무렵 태평동에 있었던 방직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때는 태평동에 사는 많은 사람이 방직회사에 다녔다고도 했다.
“아주 옛날에는 이 근처에 집이 몇 개 있었고, 요 앞 신굴다리랑 저 너머 아파트 있는 데가 다 벌이었어요. 냇가까지 다 벌판이었지. 유등천 냇가 모래밭에서 놀고 그랬죠. 유등천뿐만이 아니라 저기 길 건너 붕어빵 집 있는 데도 냇가였어요, 지금은 길이 복개돼서 그렇지.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동네에 물이 철철 넘쳐 흘렀어요. 공장이 많지는 않았는데, 큰 방직회사가 있었어요. 저기 아파트 있는 데가 방직회사였지. 6·25 난리 때 불에 타고서 나중에 새로 짓기도 했었어요.”
한창 얘기를 나누던 중 아주머니의 남편이 가게 일로 아주머니를 불렀다. 아주머니는 인사를 하고 가게 뒷편 골목으로 총총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벗어나 서대전역 뒤 철길을 따라 난 좁은 길을 걸었다. 유천동 방향으로 계속 걷다 보면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쌓인 연립주택촌이 나타난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련된 아파트 동네와 낡디낡은 주택가가 공존하는 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특별히 넘칠 것도, 특별히 모자랄 것도 없는 동네. 짧은 시간이나마 태평동을 걷고 들으며 든 생각이다. 어쨌든 이곳도 지우개로 지우듯 머지않아 아파트가 하나 둘 들어설 게다. 


 
글 사진 엄보람(monosolu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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