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9호] 대중가요역사

1980년대는 전두환 찬가를 일삼던 컬러TV와 함께 시작했다. 전두환은 박정희를 그대로 답습하며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다. 인권탄압과 고문은 사라지지 않았고, 군사 정권에 저항했던 광주민주화운동은 이 땅에 커다란 부채를 남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의 정당성을 위협했고, 전두환 정권은 3S(Sports, Screen, Sex)라는 말초적인 당근을 내밀어 광주의 피를 감추려 한다.

무엇보다 80년대 한국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꾼 건 컬러TV였다. 컬러TV는 한국을 소비자본주의 체제로 빠르게 편입시키며,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영화 산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통·폐합된 방송은 쇼 프로그램과 스포츠 중계에 집중한다. 쇼의 중심은 노래였고, 압권은 조용필이었다.

  

  

80년대 이전 한국음악 시장은 열악했다. 주류는 팝이었고, 가요를 듣는다는 건 용기가 필요했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은 “그가 한국 대중음악사에 끼친 결정적인 공로는 서구 대중음악의 헤게모니를 뒤엎고 시장에서의 한국 대중음악의 절대적 우위를 확립시킨 데 있을 것이다.”라고 조용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¹

  

   

¹ 강헌, 「조용필-한국 대중음악의 거대한 이정표」, 『2004 문학수첩 봄호』(문학수첩, 2004)

  

  

 발라드의 강자 이문세가 가요 시장의 우위를 다지기 전, 조용필은 한국 음반 또한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의미부여 했다. 조용필은 누구보다도 작가주의를 실천한 뮤지션이었고, 가수는 노래와 음반, 공연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걸 반 세기 동안 증명했다.

1980년에 발표된 조용필 『1집』은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전범을 세웠다. 조용필이 직접 작곡한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는 지금까지도 음악계를 양분하는 발라드와 댄스 음악의 원형을 제시한다.

조용필이 개척한 발라드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 이선희의 「J에게」, 이문세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를 거쳐 변진섭에 이르기까지 80년대를 지배하는 주요 장르로 자리잡는다. 이중 이문세는 눈여겨볼 만하다. 이문세의 노래는 영미 팝의 우월성을 상쇄시키며 한국 대중음악이 팝 시장을 넘어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단발머리」 또한 김완선, 소방차, 박남정 등의 댄스 음악 가수들이 주류로 등장하는 길잡이 역할을 해낸다. 김완선 하면 요염한 댄스 가수로 치부할 수 있으나 그녀는 김창훈, 신중현, 이장희, 손무현의 곡을 직접 받아 부른 만만치 않은 강자다.

조용필은 발라드와 댄스는 물론 록, 트로트, 민요, 블루스, 동요 등 각기 다른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음악의 문법을 집대성한다. 조용필 『1집』은 음악과 세대의 통합을 꿈꾼 그의 야망과 이후 발매되는 앨범들의 전형을 보여준다. 비록 조용필의 음악이 독창적이지는 않았지만, 모든 장르를 적절하게 재구성해 그만의 색깔로 재창조했다는 의미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조용필의 음반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한다. 시장의 성공은 성과로 나타났다. 1987년 가수왕을 거부하기 전까지 조용필은 MBC 가수왕 5회, KBS 가수왕 4회를 차지하며 방송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더불어 당대 최고의 인기가요 프로그램이었던 〈KBS 가요톱10〉에서 가장 많은 1위곡(15곡)을 배출했으며, 차트에 머문 주간은 68주로 가장 긴 기록을 세웠다.

작가주의를 지향했던 조용필의 가장 큰 성과는 노래 중심의 음악판을 앨범 중심의 음반 시장으로 변모시켰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1,500만 장이 넘는 음반을 판매했으며, 일본 시장의 판매량까지 합치면 2,000만 장에 육박하는 수치를 기록했다. 조용필이 80년대 강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건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니었다. 1968년 미8군 데뷔 이래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민한 결과의 축적물이었다. 조용필이 추구했던 앨범 중심의 음악은 당대 동료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1980년대를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로 도약시킨다.

  

  

조용필은 대중문화의 주체 또한 변이시킨다. 성인 취향에서 벗어난 「비련」은 한국 대중음악 시장에 10대를 불러들였고, 「나는 너 좋아」는 오빠부대라는 팬덤을 탄생시키는 계기를 만든다.

그 배경에는 3저 호황이 있었다. 금리가 떨어지고, 엔화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값싼 한국 제품이 활발히 수출됐다. 나라에는 돈이 넘쳤고, 가정 경제는 풍요로웠다. 넉넉하진 가계 덕분에 10대의 용돈은 늘어났고, 이들은 곧 시장의 소비 주체로 등장한다.

10대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게 바로 대중문화다. 10대는 자신이 지지하는 연예인을 통해 욕망을 분출하고, 소비를 통해 자신의 문화를 구축한다. 10대의 시장 진출은 한국 음반 시장의 활성화를 불렀다. 조용필 뿐만 아니라 작가주의를 지향했던 뮤지션의 음반 판매량이 늘어났으며 다양한 팬덤이 생겨난다. 10대의 오빠부대와 팬클럽은 성인과 청년 세대가 주도했던 시장을 3파전으로 확장시킨다.

조용필의 또 다른 미덕은 공연 활동이었다. 조용필은 척박한 공연문화의 불모지인 한국에 콘서트의 중요성을 알렸고, 당시로서는 드문 일본 활동과 중국 공연을 가졌다. 그는 해마다 적게는 40회, 많게는 100회가 넘는 공연을 펼치며 방송보다는 공연에 가치를 둔다. 조용필에게 방송은 노래를 위한 홍보수단일 뿐, 가수는 라이브 무대에 서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먼저였다.

그러나 조용필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전, 80년대 대중음악의 치명적인 약점은 정치의식 부재와 시대의 상처에 대한 외면이었다. 조용필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은유한 「생명」과 1987년 민주화 상황을 묘사한 「서울 1987」을 발표하여 최소한의 면죄부로 삼는다.

  

  

80년대 끄트머리, 조용필은 연작 『10집 Part I』과 『10집 Part II』를 통해 건재를 과시한다. 전작에서는 88 서울올림픽에 맞물려 「Seoul Seoul Seoul」이 크게 히트했고, 『10집 Part II』는 「Q」와 20분에 달하는 대곡 「말하라 그대들이 본것이 무엇인가를」로 동시대 해바라기가 일구어 놓은 어덜트 컨템포러리(Adult Contemporary)에 새로운 방점을 찍는다.

1980년대는 분명 어두웠지만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주류에서는 조용필을 비롯해 이용, 전영록, 김수철, 구창모, 이선희, 주현미 등이 각축전을 벌였고, 발라드 가수와 트로트 가수가 번갈아 가수왕을 차지했다. 여기에 언더그라운드로 대표되는 작가들의 작품이 각개약진을 펼친다.

  

  

한국에서 발라드와 트로트가, 댄스와 록이 정담을 주고받았던 장면은 얼마 되지 않는다. 드디어 한국 대중음악이 일본과 영미 팝을 벗어나 만개한 순간을 드러낸 것이다. 조화로운 경쟁 속에서 상생했던 수많은 명장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루기로 하자.


염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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