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9호] 미술이야기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 ≪달콤한 이슬-1980 그 후≫에 출품되었던 홍성담 작가의 <세월오월>을 두고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냐 아니면 반국가적 행위, 퇴폐적 행위냐 등 논란이 일고 있다. 예술표현의 자유가 아직도 몰상식한 정치적 이해와 편향적 비난 여론에 억압되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억압과 비난은 문제의 중심과 논지를 퇴색하게 하는 물타기 전략이고 그 표현의 중심에 자리한 국가적 비극은 개인의 독단과 편견 혹은 문화예술행정의 과오로만 몰아간다. 총체적 책임을 방관하는 짓들은 이제 아주 습관화·정형화된 코스가 되어버렸다. 본질 왜곡을 넘어서 표현의 의지까지 꺾으려는 관행이다.
이번 사태에서도 사건의 본질을 망각시키기 위해 “현직 대통령 비하”, “종북세력, 국가전복을 획책하는 민중예술도 아닌 쓰레기”, “예술의 격을 훼손하는” 등 갖가지 비난으로 사태를 각색한다. 그리고 연일 종편뉴스의 메인을 버라이어티하게 장식하고, 패널로 등장한 정치 문화계 인사의 얼굴과 입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작품을 맹렬하게 물어뜯는다.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그 고통을 함께하고자 한 예술가를 천박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쓰레기, 공명에 눈이 멀어 예술의 본질을 깨뜨리는 예술가로 취급하며 그들의 추종자에게 강력히 비난할 것을 호소한다.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이러한 반응은 기실 한국 정치사회의 계몽주의적, 폐쇄적, 비인간적, 반윤리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우리 사회가 당면한 모순된 구조를 직시하게 한다. 사건의 중심을 놓치지 않으려 분을 삭이는 와중에 ‘멘탈 갑’이어야만 이 시대를 살 수 있다는 개그 프로가 오버랩되며 지독하게 쓴 현실이 당혹스럽다.
  
  
홍 작가가 이 작품을 제작한 동기는 그가 예전부터 보여주었던 예술적 기질에서도 기인하겠지만, 이번 작품의 경우 시대에 대해 그가 불편한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낸 계기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980년대 걸개그림을 통해 그의 사유를 개진하던, 민주화 투쟁과 함께했던 그의 예술표현의지와는 단절시킬 수 없겠지만, 불연속적 측면에서 현대사회와 예술, 혹은 민주화운동 이후 예술의 사회적 기능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집단 대 집단, 집단 대 국가의 대립 이데올로기적 쟁투가 아닌 개인과 사회 또는 개인과 국가 간의 의견수렴과 표현방식으로 관점을 이동해 문제의 본질을 분석할 때 적어도 판단의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세월오월>의 배경에는 그의 작업실이 안산 단원고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작업실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함께 해왔던 곱디고운 아이가 수학여행을 간다며 떠난 후 팽목항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재회해야 했던 가슴 시린 사건이 있다. 그는 팽목항에서 희생자 유가족들과 며칠을 함께 보내며 그들의 슬픔과 분노, 좌절과 애처로운 희망의 고통을 절감했다. 문제 해결과 재발방지를 위한 조처에 따른 검·경·군, 정치인, 대통령의 다짐과 눈물을 철저히 믿고자 한 국민으로서의 배신감과 권력자들의 기만적 태도. 그리고 그 절망적이고 절박한 상황에서 ‘이 시대의 예술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예술이 존재하는가!’라는 행동주의 예술가로서의 근원적 물음을 던졌을 것이다. 예술가의 표현 의지가 사회 모순을 지시하고 드러냄으로 써 사회구성원이 모르는 고통과 슬픔을 상기하게 하는 것. 해서 일방향적 시선을 분산하고 되돌아보거나 살피게 하는 것. 이것이 예술의 한 기능이며, 타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예술가의 방식이어야 한다는 ‘수잔 손탁’의 일침이 떠오른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완전한 세계, 조화로운 세계의 상징적 단어가 아니라, 끝없이 분열되고 차이화되는 세계, 그러나 그 다양성과 차이가 존중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처럼 예술작품은 그러한 시대를 도래하게 하는 사유의 이미지로서 역할 하게 해야 한다. 현 미술계의 작태가 예술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한, 권력의 구도에 재편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가는 시점에서 그는 현장에서 생생하게 경험한 날것 그대로이며, 시대의 고통을 그림으로 함께 하고자 하는 자유의지를 발현했고, 시대의 상징으로서 한 점 손색이 없다. 그의 행위는 진정 용기 있는 행동이기에 그들을 비난하고 있는, 이름을 얻으려는 자들의 발광에 비유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예술가의 다양성과 창작활동의 지속성을 가능케 하는 요인 중 하나는 시대정신이라 생각한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혁신적인 문화예술의 패러다임이 형성되는 시기에는 현시대의 유행적 현상을 비틀거나 뒤집어 생각하고 예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파격적 형식이 등장했다. 세계 미술사 속에서 시대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 예술이라 부르는 모든 형식과 내용은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다. 이것은 예술가의 자율성과 창조성, 시대적 금기로부터의 자유로운 사유와 상상력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다.
  
  
예술에 담긴 풍자, 유머, 위트, 골계미, 통렬한 비판의식 등은 과거의 경험과 사건을 은유적으로 비틀어 보임으로써 새로운 시대적 의미를 발생시키고 현실적 현안들을 재인식하게 하는 거울이다. 따라서 개인의 상상력과 사회 환경 사이에는 끊임없는 순환이 존재하며,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자 양자는 상호보완적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문화예술계의 사건들이 과연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또한, 예술가를 지망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시대의 예술에 대해 어떤 이해를 하게 될지도 말이다. 개인적 성공이 최대의 행복이자 목표인 이 시대에 과연 이들의 의연함이 얼마나 큰 공명을 일으킬 수 있을까? 현시대의 예술이 유행현상에 길들여져 획일화되는 경향이 이러한 비정상적 사태를 초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유치원 교육에서부터 대학교육에 이르기까지 문화예술영역은 항상 고정된 세계관과 가치관에 입각해 바라보았을 뿐, 한 번도 시대의 반성과 사유 속에서 존재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게 했고, 그 세계에 접근해 볼 기회조차 없는 현실 속에서 예술에 대한 단편적, 계몽주의적 억압 기제가 인식을 조종한다. 아울러 우리 사회는 창작활동에 제한을 가하는 많은 금기사항이 존재한다. 정치, 법, 종교, 이념, 가치관 등 자유롭게 사고하고 발언할 수 있는 영역들이 암묵적인 터부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그리고 암묵적으로 자행되어왔던 일들이 이제는 사회적 면죄부와 같은 언론과 권력의 힘을 얻어 무자비한 억압과 강제를 통해 우리 사회를 재편하고 있다.
  
  
여기서 예술표현의 자유와 의지를 다시금 논할 필요는 없다. 다만 폭력과 억압만이 국민의 분노와 염원, 희망을 꺾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정치인들의 행태와 문화예술의 다양성과 자율성,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와 공정함이 없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정상적인 일들이 왜 비정상적인 것들에 의해 시달려야 하는지, 한국정치사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광주정신의 오늘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광주비엔날레가 뜻하는 시대정신의 반영으로서의 전시란 어떠해야 하는가, 또 전국 국공립미술관과 국제규모의 주요 전시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반문해야 할 것이다.

황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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