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9호] 김운하와 함께하는 책거리

생각해 보니 두 세 해 전, 독서 자기계발서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한 작가가 자기 책 속에 십 년 치 인문 고전 목록을 제시한 걸 보고 식겁한 적이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말 그대로 ‘격분’했다. 우선 거기에 제시된 십 년 치 인문 고전 목록을 보는데 나름대로 이십 수년을 열공 모드로 책을 읽어온 내가 안 읽은 책이 절반이 넘는다! 이런, 인생 헛살았네. 더 놀라운 건, 1년 차 추천도서에 지금 이 순간 키보드를 두들기기도 짜증나게 어렵고 힘든 긴 이름,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의 『군사학 논고』며 유향의 『전국책』 태공망과 황석공의 『육도사략』이 들어있지 않은가? 나의 이십년 훨씬 넘은 독서경력이 트럭에 무참히 깔린 애호박 신세가 되버린 순간이었다.

1년 차 독서초보들에게 『군사학 논고』을 읽고 어디에 쓰라는 걸까? 『전국책』은? 한 번 웃자고 농담한 것이 아니라면, 이 살벌한 자본주의 생존 전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뛰어난 책략가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일까? 역시 사는 건 전쟁이지.

  

  

그러나, 이건 아니다. 바로 이런 얼토당토 않은 책들이 순진한 독자들에게 무시무시한 고전독서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주범이다. 독자가 자유롭게 책을 찾아 읽을 권리,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독서를 할 권리 대신에 고전이라는 권위와 고전리스트를 무거운 짐처럼 짊어진 수동적인 낙타로 만들어버리는 행태. 혹은 유명한 고전을 읽었다는 지적 허영심만을 뱃속 가득 채우기 위해서이거나.  

나는 고전에 대한 이런 식의 맹목적 우상숭배주의를 반대한다. 우리가 숭배해 마땅한 고전 같은 건 없다. 또 독서인 혹은 교양인 행세를 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목록 같은 것도 없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잘 썼거나 못 쓴 책과 내가 좋아할 만한 책과 그렇지 않은 책, 내게 지금 필요한 책과 그렇지 않은 책만 있을 뿐이다. 더욱이 한가롭게 고전만 파고들면, 당대의 과제에 대한 인식이나 문제의식을 놓쳐버릴 수도 있다.

고전 독서는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자 자신이 ‘현재’ 상황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개인적인 관심과 문제의식, 나아가 당대가 제기하는 문제와 대결하기 위한 고민과 사유의 연장에서 자신에게 필요할 때 찾아 읽어야 한다. 결코 고전이라는 권위나 고전 목록에 휘둘릴 이유가 없다.
 

  

  

영국 경험주의 철학을 완성한 데이비드 흄은 결코 고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로크와 버클리 등 당시 영국 철학계에 선풍을 몰고온 새로운 철학을 통해 자신의 문제의식과 사유를 치열하게 가다듬었고, 그 결과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서양 철학사를 뒤흔든 획기적인 저서들을 내 놓을 수 있었다.

임마누엘 칸트는 어떤가? 1711년 생인 데이비드 흄보다 고작 열세 살 어린 1724년 생인 칸트는 흄의 그 책을 찾아 읽었다. 물론 당시 흄의 책은 고전이기는커녕, 신간 가운데서도 흄 자신이 “인쇄되는 순간부터 사산 되어버렸다.”고 할만큼 당대 독자에게 철저한 외면을 받았던 책이다. 하지만 칸트는 그 책을 읽고 “흄이 자신을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고 할만큼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칸트의 위대한 책 『순수이성 비판』은 흄의 그 ‘신간’이 아니었으면 결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또한 칸트는 장자크 루소를 읽었다. 시계처럼 정확한 일상의 주기를 지켰던 칸트가 루소의 『에밀』을 읽던 날만은 너무나 깊은 감동을 받은 나머지 그날 산책시간을 어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루소의 그 책은 1762년에 초판이 나온 책이었고, 더욱이 나오자마자 불온한 ‘금서’로 지정되어 루소가 스위스로 피신을 가야했던 책이었다. 당대의 금서와 고전 사이에는 얼마나 먼 거리가 있는가!

이 두 철학자가 고전 맹목주의자였다면, 기껏 고전 철학자들에 대한 훌륭한 해설가에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또 20세기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조차 많은 독서를 하지 않은 걸로 유명하다. 그는 과거 철학사에 별 관심이 없었고, 그 모든 철학 고전을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학부전공이 철학도 아니었고, 제트 엔진을 설계하기도 한 항공공학도였다.

한 권의 책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다. 바로 버트란드 러셀이 당시에 내놓은 『수학 원리』라는 책이었다. 그 책을 읽고 비트겐슈타인은 버트란드 러셀에게로 달려갔고, 그리고 철학자가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생애는 오직 사유, 사유하는 것이었다. 그의 공식적인 저작은 사실 현대 영미철학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논리철학논고』 단 한 권 뿐이다. 나머지 『철학적 탐구』를 비롯한 모든 책은 노트와 메모, 일기들이고,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편집하여 출판한 책이다. 그는 이런저런 고전이나 철학책을 읽어대는 대신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사유했고, 너무 치열하게 사유한 나머지 심신이 지칠 때는 그저 재미삼아 당대의 미국판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지금까지 책을 읽어 오면서 옛날 책과 당대의 책을 구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전과 비고전의 구분은 내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나의 문제의식과 사유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피터 싱어의 『실천 윤리학』이 동시대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프랑소와 라블레의 『가르강티아와 팡타그뤼엘』이 최신 발매되는 그 어떤 소설보다 더 현대적으로, 심지어 더 포스트모던하게 느껴진다. 진심으로 나는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면서 그 속의 어떤 요소들에서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나 존 롤즈의 『정의론』보다 더 급진적이고 진취적인 면을 발견하곤 한다. 플라톤은 통치계급이 부패하고 타락하는 근본 원인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바로 부와 일부일처제 아래 처자식 때문에 결국 부정과 부패가 생기고, 권력과 부의 사적인 세습이 공동체를 파멸시킨다는 것을. 요즘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 바로 그런 세습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서가 아닌가?

  

  

지금 여기서 내가 감히 고전무용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전이든 아니든, 그 어떤 책이든 한 권의 책 자체가 유용하거나 무용한 것은 아니다. 그걸 결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백 권이건 천 권이건, 한 생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하는 고전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자신에 대한 진지한 관심’ 이야말로 모든 독서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존재 가치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독서가 주는 순수한 기쁨과 재미이지만, 그러한 즐거움이란 것도 궁극적으로 그런 기쁨을 통해 부수적으로 자기자신과 삶, 세계를 좀 더 잘 알게 해주는 인식의 쾌락과 연결될 때 우리는 더 큰 기쁨을 얻는다. 독서에서 재미와 인식은 분리불가능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만일 당신이 한 권의 책에서 자신의 실존적인 삶과 관련된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책을 ‘해석’하는 것보다 그 책에서 당신이 무슨 ‘고민’을 발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작가의 고민과 작품의 고민, 그리고 당신이 책 속에서 발견한 고민을 연결시키며 깊이 생각해 보라. 즉 해석하지 말고 고민을 발견하라. 그러면 한 권의 책은 당신에게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걸어올 것이며, 색다른 전율과 기쁨을 만나게 될 것이다.


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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