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9호] 대전·충남문인탐방

50년대 문단 최고의 기인(奇人)으로 꼽히는 김관식 시인을 만나러 간다. 대전에서 호남고속도로로 진입하여 연무/논산 IC로 나와 2km 정도 가면 소룡리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다 보면 그의 묘소와 시비를 만날 수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의 묘소만 덩그러니 남아 쓸쓸했는데, 권선옥 시인의 노력과 김경세 주민(김관식 시인의 당질) 등의 도움과 논산시의 후원으로 묘소 옆에 시비가 세워져 훨씬 보기 좋았다. 현재 그의 생가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김관식 시인의 당질이 그곳에 살고 있어 시인의 생가지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곳에서 나와 강경으로 갔다. 그가 다닌 아담한 강경중앙초등학교를 둘러본 뒤 강상고등학교(강경상고의 후신)에 가서 그의 동문이 세운 시비도 보았다. 논산 공설운동장 옆 공원에 강경상고 동문인 박용래 시인과 김관식 시인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남다른 기행(奇行)으로 많은 사람에게 화제가 된 김관식 시인의 시 중 유독 가슴에 와 닿는 시가 있다.

  

  

방안 하나 가득찬 철모르는 어린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등록금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랴.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

백금(白金)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寶劍)이 된다.

아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 보다.

-「병상록」 부분

  

  

이 시에는 가여운 자식을 두고 떠나야만 하는 시인의 서글픈 모습과 가난 속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으려는 옛 선비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술’을 유난히 좋아하여 37세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시인. 자신의 생을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그는 잠자고 있는 아이들에게 일종의 경구(警句)처럼 유언을 남기고 홀연히 떠난 것이다. 그는 가난으로 인한 가족의 힘겨운 삶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그 ‘가난’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을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지로 생각하였다.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을 통해 궁핍하고 힘겨운 삶이 훗날 “훌륭한 보검(寶劍)”이 될 수 있음을 그는 믿었다.

김관식 시인은 1934년 3월 4일(음력) 충남 논산군 구자곡면 소룡리 505번지(현재 충남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 505)에서 부친 김낙희(金洛羲)와 모친 정성녀(鄭姓女)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한다. 그의 아버지는 6천여 평의 논밭을 소유한 유지였다. 한의사이기도 했던 그의 아버지는 ‘약값 싸고 잘 낫는 양심적인 명의’로 소룡리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소문이 자자했다. 또한, 그는 서원(書院)의 전교(典敎)와 향교의 제관(祭官)을 맡기도 했다. 아버지 밑에서 시인은 네 살 때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일곱 살에는 경서(經書)를 뗐다.

1936년에 강경으로 이사 갔다. 당시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시장 중 하나로 꼽히던 강경은 육운과 수운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내포 평야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새로운 문물의 교역을 담당하던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에는 당시 전국에서 수재들이 모인다는 강경상업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시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고향 소룡리에서 신흥도시인 강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1947년에 시인은 강경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한학과 서예 실력이 남달랐는데, 그것은 가람이 한글을 쓰고 그가 한자를 쓴 습자책을 낸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암기 면에서도 천재성을 발휘하였다. 시인이 금강 방죽 10리 길을 다 걸을 때까지 한시와 바이런, 하이네 등의 시, 그리고 서정주 등의 시를 줄줄 외웠을 정도로 총기가 좋았다고 한다.

시인의 숨겨진 방랑 기질이 드러난 때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였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시인은 아버지가 지주로 몰려 투옥되고 전답을 몰수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소 몇 마리를 팔아 책을 사서 떠돌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만난 스승이 당대 한학에 능통했던 최남선을 비롯하여 오세창, 정인보 등과 한국 시단을 이끌고 있던 서정주, 조지훈 시인 등이었다. 서정주 시인은 김관식과의 첫 인연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내가 6·25전란 때(1951년) 전주로 피난 가 전주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웬 고등학교 학생 모자를 쓴 학생이 한발 높이가 되는 한서를 보자기에 싸들고 찾아왔다. 그게 무엇이냐 물었더니 주자대전(朱子大典)이라고 하면서 최병심(崔秉心) 선생(성리학의 마지막 법통)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왔던 길에 들렀다는 것이다. 한번 읽어보라고 하니까 죽죽 낭송을 하는데 놀라웠다. 마침 방 하나가 비었으므로 우리 집에 기거하라고 했더니 일주일가량 묵고 갔다.

  

   성리학의 마지막 법통인 최병심을 찾아가는 길에 만난 일주일간의 인연이 서정주와 김관식 시인 사이를 동서지간으로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미당의 집에 걸려있는 한글 족자를 보고 김관식이 누구 글씨냐고 물었고, 이에 미당은 처제의 글씨라고 대답했다. 이때 김관식 시인은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삼아도 좋겠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미당의 처제가 있는 정읍으로 가 구혼하지만, 그녀는 시인이 아직 학생 신분이고 네 살이나 아래였기에 거절한다. 이에 그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작전을 짜기 시작한다. 그 작전은 하숙하고 있던 그가 구두닦이들을 집으로 불러 유인물을 나누어주며 읍내 곳곳에 뿌리도록 한 것이다. 그 유인물에는 김관식과 방옥례가 이미 사랑하는 사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너무 창피하여 다니던 은행도 그만두고 집안에 틀어박혔다. 나중에는 인근 지역으로 도망가기도 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김관식 시인은 “나에게 선생님의 처제를 주지 않으니 지금 죽습니다.”라는 유서를 서정주 시인에게 보낸 뒤 음독자살을 기도하였다. 이에 당황한 서정주 시인은 부랴부랴 처제를 설득하여 정혼하기에 이르렀고, 1954년 3년 구애 끝에 육당 최남선의 주례로 방옥례 여사를 신부로 맞이하게 되어 서정주 시인과 동서지간이 된 것이다.

1955년 11월 김관식 시인은 정식으로 등단한다. 시 「연(蓮)」, 「계곡에서」, 「지하문(紫霞門) 근처」등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추천받게 된다. 당시 서정주 시인에 의해 박재삼, 신동준과 함께 천료(薦了)된 것이다.

이 시기 김관식은 대부분의 작가가 모여 있는 명동으로 진출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후의 불란서 풍의 어둠과 절망의 로맨티시즘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문예살롱’, ‘갈채’, ‘엠프제스’, ‘돌채’, ‘동방살롱’ 등의 찻집에 모여 퇴폐적인 문학에 관해 얘기하곤 했다. ‘번지 없는 문단가’라는 이름이 떠돌아다닐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곳에 김관식 시인이 등장한 것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염무웅 평론가의 지적대로 “규격품의 범람에 끝내 항거한 시인”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1956년에 김관식은 시선집 『김관식시선』(자유세계사)을 펴낸다. 자서를 통해 시인은 동양의 자연과 생활에 대해 다시 한 번 성찰할 필요성을 느끼며, 서구의 사조가 아닌 동양의 전통적 사상과 감각, 정서, 예지, 풍류를 민족의 운율 위에서 노래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인제는

산골로 들어가서 취미(翠微)로나 늙으련다.

햇살 바른 땅을 골라 과일 나무야 좀 골고루 심어 두고

이끼 낀 따뷔연장 바윗돌에 문질러서 몇 또야기의 팔밭을 일궈 산도(山稻)며 씨앗도 간혹 더러 삐허야지.

촉촉이 젖어 내려 초록빛 눈망울이 희맑은 봄비 속에 헌 삿갓 제켜 쓰고 대수풀 여기 저기 저절로 돋은 죽순을 꺾어 오지 화로에 소금 발라 구어 내어 나물 무쳐 놓고

엊그제 새로 빚은 독아지를 허물어 바윗틈에 어리운 샘물과 같이 맑앟게 고인 놈을 우선 한 그릇 오무가리에 담아서 맛보기로 마신 다음 아가리 큰 웅배기에 성근 체를 받혀 지게미조차 주먹으로 마구 쥐어 짜 걸러설랑

꼭지 달린 조롱박 종그래기 잔(盞)으로 잘름잘름 넘치도록 그득히 떠서 연거푸 거후르면 세상은 그만일세.

- 「귀거래사」 부분

  

  

시인이 꿈꾸는 세상이다. 산의 팔밭을 일궈 곡식을 심고 죽순을 꺾어 나물 무쳐 놓고 그 나물을 안주 삼아 동동주를 마시는 일, 그것이 바로 시인이 원하는 것이다. “시비 없는 세상에 시비 없이 태어나 시비 없이 살다가 시비 없이 가는 것”(「소부허유 전(巢父許由 傳)」)이 시인의 소원이었을 것이다.

1960년 4·19학생 운동 이후 그는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그러나 최대의 강적인 장면 후보와 대결한 그는 낙선하게 된다. 그는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부친에게 받은 유산 강경의 논 다섯 마지기와 집을 처분하였고, 과수원까지 팔았다. 선거 패배로 갖고 있던 재산은 모두 날아가고 빚만 떠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거에 패배했음에도 절대 절망하지 않았다.

이 시기 시인이 꿈꾼 것은 시유지인 홍은동에 시인의 마을을 짓는 것이었다. 이때 장면 정권에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인이 무허가 건물을 지으면 경찰이 와서 허물었고, 다시 지으면 허무는 일이 무려 여덟 차례나 반복되었다. 아홉 번째 다시 집을 짓자 경찰관이 왔고, 이때 시인이 소주 한 병을 들고 지붕으로 올라가 버티자 경찰도 시인의기행에 손을 들었는지 단속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시인의 마을’이 만들어진 것이다. 신경림, 조태일 시인 등이 이곳에 거주하기도 하였다.

술을 지속해서 마시던 그는 결국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몸이 망가지는 스승을 보다 못한 제자의 큰 배려로 이루어졌다. 그곳에서 치료를 받고 나온 그는 여전히 궁핍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럼에도 시인은 가을 햇살이 내려앉는 뜰에서 짙은 향기가 나는 국화꽃 잎을 띄운 막걸리에 방금 뽑은 무를 안주 삼아 마시기도 했다. 그러다가 배추밭 이랑에서 자기도 하고, 일어나 아이들의 차비를 위해 시를 쓰기도 했다.

  

  

귀를 씻고 세상 일 듣지를 말자.

피에 젖은 아우성

저마다 가쁜 호흡을 지키기 위해

사나이는 모름지기 곡괭일 들고

여자여, 너는…….

  

  

(……)

  

  

단정학(丹頂鶴)은 야위어 천 년을 사네, 성인에게 가는 길은 과욕(寡慾)의 길.

밭고랑에서 제 땀방울을 거둬들이는

지나(支那)의 한 꾸리(苦力)와 같이

세월을 목에 감고 견디어 보자.

가만히 내 화상(畵像)을 들여다본즉

이렇게―언구렁창에 내던져 마땅하리라.

눈으로 눈이 들어가니

<눈물입니까.> <눈물입니까.>

요지경 같은 세상을 떠나

  

   

오늘도 나는, 누더기 한 벌에 바리떼 하나.

눈포래 윙윙 기승부리고

사람 자국이 놓인 적 없이

흰곰만 아프게 소리쳐 우는 저,

천산북로(天山北路)를 넘는다.

- 「가난 예찬」 부분

  

  

위 시에서처럼 그는 가난한 삶에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을 즐겼다.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라는 구절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은 가난한 삶을 살지라도 옛 선비처럼 ‘리(利)’의 관점이 아닌 ‘청심과욕’의 견지에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시인의 알코올 중독 증세가 점점 심해져 갔다. 이에 그는 술병을 버리고 발로 짓밟아 우그러진 주전자를 천장에 매달아 놓았다. “이놈의 주전자! 보기 싫은 주전자! 술을 못 이기다니, 내 결심이 대단한데 술에는 못 이기다니….”라고 하면서 ‘송주문(送酒文)’을 흰 벽과 책표지에다 써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결국 다시 술을 마셨다.

1970년 봄, 시인은 ‘창작과비평’에 시를 보냈다. 그 원고료로 시인의 소원대로 아이들의 공책과 신발을 사주었다. 며칠 후 시인은 대전에서 한의원(생문방한의원)을 하는 형님에게로 가서 두 달가량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형님이 준 용돈을 모아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술을 끊지 못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970년 8월 30일 오전 11시쯤 그는 자택에서 별세하여 고향 소룡리에 안장된다.

김관식 시인은 애국과 정의의 상징적 인물인 면암 최익현을 유난히 좋아하였고, 5·10 선거 당시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선거 유세 도중 사망했을 때 현직 교사의 몸으로 경무대까지 돌진했다가 경찰서에 연행, 훈방된 일도 있었다. 갈 곳 없는 친구를 데려다 재우고, 술과 밥을 대접하는 것을 더 없는 재미로 느꼈다. 이처럼 김관식은 ‘더러운 무리’들에게는 눈을 부릅뜨고 ‘비겁한 친구’들에게는 자비의 눈물을 흘리는 시인이었으며,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보면 한없이 정을 주는 다정한 시인이었다. 선비의 지사다운 기개와 따뜻한 감성을 지녀야만 가능한 것들을 시인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가 더 와 닿는 것은 ‘느릿느릿한 강경 사투리’로 중앙 문단에 파열구를 낸 점이다. 지역어(방언)가 그의 지사적 기질과 만나 새로운 문학장을 형성하게 된 점,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아닐까?


글 사진 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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