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9호] 대전 유성구 안산동 진정이 마을

1.

한낮에 마을은 고요했다. 아이들 키만큼 자란 고추밭에서 등을 잔뜩 구부린 채 일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설핏 보인다. 은행나무와 가죽나무가 여러 그루지만 둥구나무는 없다. 본래 없었다고 한다. 조붓했던 안길은 차 한 대가 조심히 지나갈 정도로 넓혔고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었다. 공사한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검은색 아스팔트와 그 위에 도색한 하얀색 페인트가 한참 내린 빗물에 그 선명함을 더한다. 주변 풍광과는 어우러지지 못한 어색함이 불편하다. 마을 앞 뒤로 길고 거친 선을 만들며 지나는 넓은 도로가 마을 안길까지 잠식한 듯하다. 개를 여러 마리 기르는 집이 많은데 이방인 허용 거리가 무척 길다. 가까이 다가가야 비로소 옹골차게 짖기 시작한다. 안길에서 만나는 주민은 모두 반갑고 친절하게 인사를 받아준다. 경계보다는 품어주는 느낌이 강해 편안하다. 마을 위를 뒤덮은 하늘이 무척 넓고 시원하다.

  

  

2.

대전광역시와 세종특별자치시 경계 즈음에 있는 마을 ‘진정이(里)’는 전형적인 산자락 마을이다. 경사가 완만해도 도로에서 마을을 올려다보면 지붕 부분만 눈에 들어온다. 반대로 마을 제일 위에 있는 집에서는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길 건너 마을까지도 손에 잡힐듯 선명하다. 마을 앞 논도 계단 형태를 띠고 있다. 대전역사박물관 지명유래 기록에 진정이에 진정은 한자로 참진(眞)자와 정자정(亭)자를 쓴다고 나온다. 마을 전체 경관이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명도 함께 실렸다. 한자어를 해석하고 마을을 둘러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높은 정자에 올라 내려다보는 것처럼 마을 전체 풍광은 아름답다. 예전부터 그곳에 있었을 골목길은 자유롭게 흐르며 그 아름다움에 선을 더한다.

  

  

  

  

정분남(72) 씨는 강원도 태백이 고향이다. 당시 탄광에 일하러 온 아저씨를 따라 대전까지 내려왔다. 아저씨 고향은 대평리지만 지금은 멀지 않은 진정이에서 산다. 아마 진정이에 시집온 사람 중 가장 멀리서 왔을 거라는데 할머니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왼쪽부터 정분남, 서갑분, 강정례 할머니.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을에서 만난 주민에게서 이곳 이름이 왜 ‘진정이’인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다. 80대 할아버지들과 90대 할머니에게도 물어보았지만 정확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대신, 이 근방 동네에서 전하는 농담을 들을 수 있었다.

“징을 치면 잠 그만 자고 일어나서 일하라고 징(진)정이라고 했다잖여.”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무내미에서 물어보고 새재에서 밤을 새고…. 안산에서 앉아 진정이에서 진정하고 길을 나섰더니 어두근이에서 어둑해져서 자(작)골에서 자더라.”

각자 기억을 끌어내 이야기를 이리저리 맞춰보려 애쓰던 할머니들이 ‘꺄르르’ 웃는 것을 신호로 손을 든다. 결국 정확한 이야기를 모두 듣지는 못했다. 이 이야기는 필시 이 근방 이야기꾼이 만들어내었을 스토리형 농담이었다. 그것도 한 사람의 창작물이 아니라 보태고 빼면서 시간을 두고 여럿이 만들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진정이와 주변 마을 지명이 모두 등장한다. 지명의 음에 집중해 뜻을 담아 이야기로 풀어냈다.

마을 지명과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 할머니들은 모두 서갑분 할머니 집 툇마루에서 만났다. 서 할머니는 올해 92세로 이 동네에서 가장 어른이다.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에는 세월의 흔적이 분명하지만 한쪽 무릎을 세우고 꼿꼿하게 앉은 모습이 정정하시다. 지금 살고 있는 집 바로 옆집이 서갑분 할머니가 태어난 집이다. 진정이에서 멀지 않은, 국방과학연구소가 들어선 무내미라는 곳으로 시집을 갔다가 가족과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서갑분 할머니가 사는 집과 태어난 바로 옆집 모두 근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집이다.

“이 옆집이야 내가 태어난 집이니까 진짜 거의 100년은 되었을 것이고, 이 집은 내가 어렸을 때 짓는 걸 보았던 기억이 나니까 70~80년 정도는 되었을 겨. 근형이 아버지가 지었어.”

토방을 높게 올리고 그 위에 나무로 틀을 잡은 뒤에 흙벽돌을 찍어 집을 지었다. 방은 두 칸이고 나무를 떼는 부엌이 바로 붙어 있다. 마루 옆에는 나락을 담아 두었던 토강이 있고 마루 위에는 실겅을 달아 물건을 올릴 수 있게 했다. 서갑분 할머니가 태어난 집에는 지명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한 강정례(87) 할머니가 산다. 강정례 할머니 고향은  외삼동이다.

“거서 나서 컸는데, 제유 요로 왔어요.”

서갑분 할머니와 강정례 할머니는 외사촌 시누이 올케 간이다. 서갑분 할머니가 태어난 집은 더 오래되었는데도 짱짱한 느낌이다. 두 집은 무척 닮았다. 아니 거의 똑같다. 소박한 一자형 집에  최근에 와서 수직으로 마당 쪽에 집을 달아내 지은 것도 똑같다.

강정례 할머니는 밭에 있는 자두나무에서 떨어진 자두 한 개를 가져왔다며 칼로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게 칼집을 내 건넨다.

“다 익으면 정말 달고 맛있는데 아직 안 익어서 좀 실껴~.”

자두는 정말 셨다. 신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의외로 입안에 감기는 맛이 개운하고 좋다.

  

  

  

  

3.

진정이 마을은 앞뒤로 주요 도로 세 개가 지난다. 마을 바로 앞에 있는 2차선 도로는 옛날 서울에서 부산을 오가던 중요 도로였다. 옛 국도 1호다. 그 도로에서 동쪽으로 대전-세종간 도로가 새로 생기면서 그 기능을 다했다. 마을 뒤로는 대전-당진간 고속국도가 생겼다. 고속국도 때문에 마을 뒷산인 동살미에 가기가 어렵다. 마을 양쪽 끝에 굴을 두 개 파주기는 했으나 아무 곳에서나 올라가던 옛날만 할까. 소음도 문제다. 고속국도가 생길 때 주민 사이에 반대도 좀 있었던 모양인데,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 진정이 마을에는 20여 호 남짓 모여 산다. 다른 농촌 마을처럼 컸던 마을이 쪼그라든 것은 아니다. 본래 마을에 집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더 늘었다. 옛날에는 10여 호 남짓 살았단다.

“참, 집이 드문드문 있구나.”

청주에서 58년 전에 이곳 동갑내기 신랑에게 시집온 오옥균(80)씨가 스물 둘에 진정이 마을에 도착해 받은 첫인상이다. 마을을 지나는 큰 개울도 없어 식수가 풍부하지도 않았다. 마을회관에서 북쪽으로 마을 공동우물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메워 논으로 만들어서 흔적은 없다. 새로 지은 집 앞에 전봇대 부근이다.

“우물에 물이 많지도 않아서 제일 부지런한 사람이 새벽 서너 시에 나가 물을 길어가면 다음 사람은 물이 찰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요.”

그러니 그 우물에서 푸성귀를 씻거나 빨래를 한다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빨래는 길 건너 동촌마을에 있는 개울에 가서 했다. 앞내개울이라고 불렀던 그 개울에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6·25 한국전쟁을 거치며 지낸 세월이 남자들에게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계절 내내 산과 들에서 살다시피 한 삶이었다. 땔감과 논에 넣을 풀을 베느라 동살미 서쪽에 조금 더 높은 산인 구절산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서쪽에 있는 우산봉까지 지게를 지고 오갔다. 모든 것이 부족한 시절이었다.

그래도 배우고 가르치려는 사람이 있었다. 북쪽으로 이웃한 동네인 어두근이에 작은 서당이 자리했다. 오옥균 할머니 남편인 최병원(80) 할아버지의 작은 할아버지 최범석 씨가 훈장으로 있던 서당이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외삼동에 있는 외삼초등학교까지 걸어가야 했다. 외삼초등학교는 광복 후 6·25 한국전쟁 직전인 1948년 외삼국민학교로 개교했다. 최 씨 할아버지 서당은 일제 강점기에 생겨 전쟁이 터졌을 때 잠깐 쉬었다가 다시 문을 열었으니 국민학교와 서당이 공존했던 시기가 제법 길었던 모양이다.

진정이 마을에 특정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해주 최씨가 좀 살고 김해 김씨도 있는 편이었다. 최병원 할아버지도 이 동네에서 5대째 살아온 토박이 집안이다. 어렸을 때 이곳에 살았던 5대는 현재 외지에 나가 산다.

진정이 마을은 대평리와 유성, 거의 중간 지점에 있어 양쪽 장을 모두 보러 다녔다. 두 장 모두 진정이에서 20릿길이었다. 농사 지은 쌀과 잡곡을 내러 다녔다.

20여 호 남짓한 작은 마을이지만 남쪽으로 이웃한 원안산과 북쪽으로 이웃한 어두근이, 동쪽에 동촌, 세종특별자치시와 경계지점인 작골 등은 모두 한 마을처럼 친하게 지냈다. 마을 사이에 있는 마실앞들과 소샛들 등에는 각 마을에서 모두 농사를 지러 나왔다. 각 마을은 그렇게 가운데 놓인 들을 공유했다.

  

  

오옥균 최병원 부부


글 사진 이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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