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큰 나무야


누군가 ‘키큰나무산책로’라고 이름 붙인 길이다.
산책로에 들어서자마자 까치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한밭대로 바로 옆, 수정타운아파트를 둘러싼 산책로였다. 쌩쌩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곧게 하늘을 향해 뻗은 나무가 양옆으로 나란히 서 있다. 그 사이로 난 길에는 사람 하나가 넉넉하게,
둘이 걸으면 오붓하게 지나갈 만큼의 넓이다. 누군가 붙인 ‘키큰나무산책로’라는 이름이 제법 잘 어울려
덩달아 ‘키큰나무산책로’라고 부르기로 했다. 
 
 
산책로에 이름은 없어요
“주민들이 따로 부르는 이름은 없어. 아파트를 처음 지을 때부터 나 있던 길이니까 꽤 오래됐지. 아파트가 1993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기 있었어. 나무가 이렇게 있으니 좋지. 지금은 황톳길 조성한다고 하는데, 이게 수정타운아파트에서부터 샘머리아파트, 둥지아파트까지 이어지게 한다던데? 횡단보도를 건너긴 하지만 그렇게 한 바퀴 돌면 운동도 되고 얼마나 좋겠어.”
매일같이 운동 삼아 아파트 주변을 빙 둘러 산책한다는 이찬선 씨의 이야기다. 이찬선 씨의 이야기를 듣고 이 길의 시작을 찾으러 아파트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톳길은 수정타운아파트 1동부터 시작한다. 아직 황토 위에 덮어둔 비닐을 벗기지 못했다. 대전 서구에서 진행하는 사업이며, 10월 1일부터 12월 27일까지 공사를 진행한다. 울퉁불퉁 조약돌과 흙이 뒤섞인 산책로 위에 평평하게 황토를 깔면 황톳길이 된다. 아직 들어오지 말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망설이다가 슬쩍 들어갔다. 걷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표지판 같은 건 무시한 채 들어와 걷곤 했다. 

비맞은 나무 사이로 
11월에는 자주 비가 왔다. 비에 젖은 나무들은 더 절절하게 초록색을 뽐냈다. 키 큰 초록 나무들 사이에는 가끔 색을 칠하는 단풍나무가 있다. 초록 나무는 주로 소나무, 메타세쿼이아와 같이 푸른 하늘도 같이 가릴 만큼 키가 큰 나무들이었다. 종을 알 수 없는 나무도 많았다. 가끔 길이 좁아지는 구간도 있는데, 산책길 한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선 모습이었다. 일부러 사람이 심었다기보다는 어쩌다 자리를 잘못 잡은 것처럼 보였다. 작은 키에 날씬하지 못한 나무는 키가 큰 나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조그맣게 서서 옆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무를 피해서 길을 걸어갈 테고, 키 큰 나무들은 작은 나무를 만져주지 못할 것이다. 작은 나무는 손을 아무리 뻗어도 키 큰 나무들의 온기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길 위에 서서 어리둥절 겨울을 맞은 작은 나무는 모든 잎을 떨어뜨리고 눈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손주들 숙제 도와줄라고 줍는 거야. 단풍잎 말려서 숙제하는 데 쓰라고 줄 거야.
나는 수정타운 입주할 때부터 들어와 살았어. 멀리 나가기 힘드니까 가끔 이렇게 아파트 주변을 도는 거지.
산책로에는 황토를 깐다고 하는데, 안 미끄럽게 하는 게 최고야.
미끄러워서 넘어지면 큰일 나는 거지. 아파트? 아이고.
나는 처음에 여기 들어왔을 때 절간인 줄 알았어.
주택 살 때만 해도 집 앞에 나오면 바로 사람들이랑 떠들고 놀았는데.
여기는 사람들이 말 한마디 안 붙이고, 할 말이 있어도 꽁해가지고.
아이고, 얼마나 답답한지 몰라. 나는 아직도 아파트가 답답해.”


바닥에 떨어진 단풍 중에서도 곱게 빨간 물이 든 것만 골라서 줍는다.
70 평생의 이야기가 소설책 한 권이 된다는 유 씨 할머니는 아파트 주변 한 바퀴를 돌고 막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아파트 주변을 장악한 키 큰 나무들
수정타운아파트를 지나고, 샘머리아파트 쪽 산책로에서는 8차선 한밭대로의 우렁찬 자동차 소리가 덜 들렸다. 산책로에서 단연 걷기 좋은 길은 샘머리초등학교 옆으로 난 길이었다. 운동장 바로 옆이라 체육 시간만 맞으면 운동장에서 재잘대는 초등학생들을 볼 수 있다. 한밭대로 옆 산책로 나무들보다는 샘머리 초등학교 옆 산책로에 있는 나무들이 좀 더 행복할 것 같았다. 
자동차 소리가 잠잠해지자 새 소리가 크게 들렸다. 사람들이 걷고, 참새가 짹짹거린다. 까치가 나무 사이를 날아다녔다. 사뿐사뿐 가벼운 날갯짓이었다. 멧비둘기도 만났다. 갈색 비둘기는 태어나 처음 보았다. 낙엽 더미에 숨어 두 마리가 뒤뚱뒤뚱 걸어 다녔다. 
둥지아파트 쪽 산책로에는 아직 깔리지 못한 황토 더미가 놓여 있었다. 12월 27일이 되면 2km 남짓한 이 길에 모두 황토가 깔릴 것이다. 사람들은 걷기 좋고 새들은 가끔 날아와 쉴 수 있다. 키 큰 나무 사이를 모두 걸었다. 키 큰 나무는 도시의 매연이 힘들겠지만, 나무는 다 이해해줄 거라고 오해해 본다. 사람들은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으며 잠깐 큰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따로 입구는 없지만, 대전 서구 수정타운아파트 수정공원으로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어요.
수정타운아파트 길이 끝나면 건널목 하나가 나오는데 건널목을 건너면 샘머리아파트 산책로를 만날 수 있어요.
샘머리 아파트 산책로가 조금 더 조용해요. 12월이 되면 둥지아파트 쪽까지 황토가 모두 깔릴 거예요.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판이 있지만, 12월이 지나면 표지판이 사라질 거예요. 아주 살짝만 보시라고 소개해 드려요. 


 
 
 
글 사진 이수연(wordplay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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