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9호] 이하준 교수

『철학이 말하는 예술의 모든 것(이하 예술의 모든 것)』은 2014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선정도서(옛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 세종도서 학술부문 선정도서는 기초학문분야의 연구 및 저술활동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선정하며, 『예술의 모든 것』은 철학, 윤리학, 심리학 분야에 선정된 스물네 권 중 한 권이다. 저자 이하준 교수는 한남대학교 교양융복합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미학과 철학을 강의한다. 이 교수는 『예술의 모든 것』에서 ‘언제, 누가 예술을 시작했을까?’ 부터 ‘예술의 종말, 그리고 그 이후?’까지 열아홉 개 질문을 던진다.

철학을 전공한 이 교수는 처음엔 취미로 예술을 접했다. 바쁜 일상에서 ‘쉼’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보니 관심이 생겼다.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예술과 미술에 관한 이론을 공부하며 지식을 쌓았다. 취미가 공부로 이어지고, 미학을 강의하면서 『예술의 모든 것』을 집필했다.

  

  

철학을 전공한 교수가 예술을 이야기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많은 철학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예술을 끌어들이고, 그것에 빗대어 자신의 논리를 표현하곤 합니다. 그중 미술은 철학자에게 뗄 수 없는 매개체이기도 했고요. 저 역시 공부하면서 많은 예술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고 미술과 더 가까워졌죠. 취미로 시작해 공부가 돼버린 거죠. 전통적인 의미에서 관념미학은 철학으로 볼 수도 있고요. 너무 어렵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는 강의를 하고 싶었습니다. 집필할 때 원칙이 있었습니다. 많은 철학자를 인용했지만, 이 책을 보면서 독자의 예술적 감수성을 자극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성공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는 철학자나 예술가의 이름이 많이 등장해서 학생들이 어려워하더군요.

  

  

철학자들이 자신의 논리를 눈에 보이는 ‘미술’로 설명한다는 말이죠. 『예술의 모든 것』에서도 다른 예술 장르 중에서도 미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보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라는 작품을 거론했습니다. 미술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중 미술이 많았던 것은 철학 이전에 미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철학은 어떤 것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학문이잖아요. 개념과 문자가 있기 이전에도 인간은 무엇인가를 생각했고요. 그것을 벽화와 같은 것으로 기록하곤 했죠. 말을 배우기 이전에 아이가 이미지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같아요. 예술이 인간의 표현 본능이라고 여기는 거죠.

  

  

모든 사람이 본능에 따라 예술을 시작하지만, 모두가 예술을 지속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문명의 역사는 본능 순화의 역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인간이 모든 본능을 지극히 당연하게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먹고 싶을 때 무조건 먹고, 자고 싶을 때 무조건 자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본능의 순화라는 것이 자기억압의 역사입니다. 본능을 순화하면서 문명이 발달한 것입니다. 문명이라는 것은 자기억압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요. 본능을 억제하면서 관습이 생깁니다. 아주 어릴 때는 몰랐던 것이 하나씩 자기 안에 ‘법’처럼 자리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의 얼굴을 그리면서 우리는 ‘살구색’을 칠하잖아요. 검정이나 흰색을 칠하지 않고요. 이러한 역사 속에서 예술 또한 제도화된 것입니다. 예술이 제도권에 편입되면서 예술가, 예술 교육자, 예술을 배우는 학생이 특별한 사람만 누리는 혜택처럼 규정된 것입니다. 많은 본능이 그렇게 제도 속에서 억제되었죠. 예술이나 표현본능만이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다시 예술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닌 ‘생활 속의 예술’이란 말이 일상에서 쓰이고 있는데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인이나 문화산업 관련자와 같은 사람들이죠. 주로 예술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문화산업과 정치경제학적인 논리가 이미 문화, 예술을 바라보는 데 침투되어있다는 것이죠. 예술 자체를 속물화된, 실용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인데…. 그게 부정적이지만은 않아요. 예술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정치와 산업에서 예술이 분리되었던 적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니까요.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인 거죠. 예술의 정신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볼 것인지, 특정한 목적의 매개체로 볼 것인지, 레저시간에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문제니까요. 예술의 상업화 시대 이후엔 일반화된 논의인 것 같습니다. 자본화된 사회에서 예술창작자의 삶과 그 이전에 예술창작자의 삶은 엄연히 다르니까요.

  

  

예술이 특정계층의 전유물로 남아야 한다는 말로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 역시 모든 이가 예술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예술가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문화예술진흥법에 보면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을 건축하려면 건축 비용의 일부를 회화, 조각, 공예 등 미술작품 설치에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만을 노리고 조각하는 조각가가 많죠. 그런 친구들이 예술가인가요? 예술 장사꾼인지 예술가인지는 그 사람이 어떤 의식과 태도로 예술을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연구자의 의식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는 사람과 강의 시간에 강의만 하는 교수는 다르죠. 예술도, 예술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진짜 ‘예술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지, 궁금합니다.
  
  

시대의 인간을 읽지 않는 예술은 예술이 아닙니다. 예술가라면, 역사 한가운데에서 사회와 역사의 목소리를 자신의 작품을 통해 내재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예술을 하는 거죠. 생존을 위한 직업 예술가라고 볼 수도 있고요. 직업 예술가와 진짜 예술가는 엄연히 다른 것 아닙니까. 자신의 예술행위를 통해 지금과 다른 세계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유토피아를 보여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대를 읽고, 시대 정신을 담아내면서 다른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죠. 예술가 역시 철학자가 되어야죠. 지금의 목소리를 담으면서 자신이 구축한 다른 가능성과 세계를 보여주어야 하니까요. 니체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자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죠.

  

  

‘사회와 역사의 목소리를 자신의 작품에 구현해내야 한다’는 말이 흥미롭네요. 그런데 표현의 자유라는 말을 쓰잖아요. 그게 곧 예술가의 자유성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말이고요. 예술의 사회성과 자유성이 동시에 이야기된다는 것이 어쩐지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한 어떤 것도 사회성과는 분리될 수 없어요. 자유라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항하는 자유일까요? ‘자유’를 외치는 예술가들은 어떤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쳤던 것이었죠? 사회의 억압이나 종교 등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들에서 자유를 외치는 것이죠. 예술의 자유를 외치며 펼친 많은 예술가의 작업이 당시 사회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부터 억압을 받고, 어떤 것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죠. 많은 사람이 자유롭다고 평가한 시인 이상도 그때 사회 안에서 자유로웠던 거죠. 민족과 국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서구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심리적 안식처를 찾았던 것이잖아요. 그것 역시 시대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모든 예술은 사회적이라고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자유성이라는 것은 그 시대가 어떤 예술적 견해가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됩니다. 예술의 사회성과 자유성은 모순이라기보다는 논리적 긴장관계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저서에서 예술 감상법에 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질문에 반론도 하셨고요.
  
  

예술 감상에서 얼마만큼 아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을 예술의 바다에 드러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어떤 유파의 미술에서 감동하는지 아는 과정이거든요. 그것은 일정한 시간의 축적이 필요하다는 거죠. 축적의 역사 없이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축적하기 전에 나타나는 선호도는 일종의 감각이죠. 처음엔 모두 그렇게 감상으로 시작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다 취향이 생기고요. 양질 전환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양이 축적되면 질적인 변화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죠.

  

  

그런 시간의 축적은 ‘먹고 사는 데 바쁜 사람’에게는 먼 이야기인 것 같네요.
  
  

예술과 같은 정신적인 생산물은 인간의 역사 이래 배고픔의 문제가 해결된 자들의 향유물이었어요. 철학 역시 강남 아줌마들의 귀걸이, 코걸이가 됐죠. 예술의 전당 오전 프로그램은 모두 돈이 있고, 시간이 많은 사람이 점유하고 있고요. 예술 향유권을 보장하는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문화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예술 소외계층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한국사회에 적어도 1/4을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이 예술을 누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예술과 문화, 정신세계의 역사에서 점프란 없습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축적이 필요하죠. 미국 역시 유럽 예술에 콤플렉스가 있어요. 예술이라는 것은 그냥 잘 살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나라 역시 그냥 잘 사는 것만을 바라보는 때는 지났잖아요. 언제까지 뒤따라가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앞서나가려면 인문학과 철학, 예술을 모든 국민이 누릴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해요. 예술향유를 위한 보편적 시민권을 헌법이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의 모든 것』 말고도 철학 관련한 저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획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예술과 대화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어떤 말보다 어떤 그림 한 점이 더 큰 위로가 될 때가 있죠. 저는 예술을 통해 그것을 경험했고, 다른 사람도 그런 경험을 하리라고 믿었기에 이 책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고요. 대전에 내려온 지 이제 3년이 넘었어요. 앞으로도 지역에 죽 있을 예정이고요. 점점 지역 문화에 관해서도 관심을 두고, 공부하려고 합니다.


글 이수연 사진 정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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