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9호] 우리들의 작은 세상

중·고등학교 시절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가 반에 두어 명 정도는 꼭 있었다. 말도 없고 숫기도 없는 친구들이 학교 축제만 되면 만화 속 주인공처럼 옷을 입고 나타나곤 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땐 그 친구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우리가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듯 그 친구들은 만화를 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화를 즐겼을 뿐이었다.
디쿠페스티벌

대전컨벤션센터 앞은 이미 초록색, 파란색, 빨간색 가발을 쓰고 만화 속 주인공을 꼭 닮은 모습을 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8월 23일 토요일과 24일 일요일, 이틀 동안 대전컨벤션센터에서 제22회 대전종합만화축제 디쿠페스티벌이 열렸다. 직접 코스프레를 한 사람(이하 코스)과 그들을 사진기에 담는 사람, 일반 관객이 함께 어우러져 행사장이 북적거렸다.

이번 디쿠페스티벌은 대전컨벤션센터 1층과 2층에서 동시에 진행했다. 1층에는 페스티벌에 참가한 모든 이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자신의 코스프레를 뽐내고, 사진촬영도 할 수 있도록 넓은 공간을 마련했다. 그 옆으로 만화와 관련된 물건을 판매하는 개인 부스와 기업부스가 박람회 형식으로 진행됐다.

개인 부스에서는 웹툰을 패러디해 짧은 만화로 만든 ‘회지’부터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가방, 각종 문구류까지 다양한 물건을 판매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물건을 사기 위해 사람들은 길게 늘어선 줄도 마다하지 않았다. 개인 부스와 함께 만화 관련 용품을 판매하는 기업 부스도 많은 이의 눈길을 끌었다. 그림 전용 태블릿 PC, 코스프레를 위한 가발, 만화책이 테이블에 가득했다.

2층에서는 만화와 관련한 다양한 행사와 공연이 열렸다. 오후 12시 30분 디쿠페스티벌 강보석 공동대표의 개막선언을 시작으로 독립애니메이션 상영, 도전! 골든덕, 애니메이션 가요제, 코스튬플레이 포즈쇼 등이 펼쳐졌다.

  

  

작은 세상 속 너와 나

대전컨벤션센터 1층 곳곳에 자리를 펴고 앉은 코스들이 많이 보인다. 짙은 눈 화장과 높은 구두, 색색이 가발은 기본이고 더운 여름날 겹겹이 껴입은 옷까지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그들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1층 구석에서 일본 만화 ‘흑집사’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변신한 다섯 명의 소녀를 만났다. 열일곱부터 스물한 살까지 짙은 화장 뒤로 앳된 얼굴이 보인다.

“저희는 코스프레 관련 온라인 카페에서 만났어요. 디쿠페스티벌이 열리기 전, 다섯 명이 모여 ‘흑집사’ 캐릭터로 코스프레 하자고 미리 이야기하고 조금씩 준비했어요. 의상은 용돈도 조금씩 모으고 아르바이트해 번 돈으로 마련해요. 더운 거, 그게 가장 힘들어요. 그래도 재미있어요.”

다섯 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스물한 살 비영 씨는 씨엘, 세바스찬, 엘리자베스 등 각 캐릭터를 설명한다. 사진을 한 컷 부탁하자 수줍은 다섯 소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강렬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봤다.

신기함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1층을 돌아다니다 카메라 세례를 가장 많이 받는 한 코스팀을 만났다. 만화 ‘하이큐’의 배구팀으로 완벽 변신한 그들은 정말 만화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 같다. 스스로 ‘소희와 아이들’이라 부르는 그들은 그냥 만화가 좋고, 코스프레가 좋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묻자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아요. 신경 안 써요. 까짓것 욕하라고 하죠 뭐.”라고 시원하게 말한다.

  

  

  

  

수줍게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로 변한 코스에게 다가가는 한 관람객을 보았다. 진짜 캐릭터가 아님에도 그는 매우 수줍은 얼굴로 코스 옆에 서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꾸벅 인사를 하더니 조용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단순한 흉내가 아니었다. 이제까지 가졌던 편견과 고정관념이 한 번에 깨지는 순간이었다. 만화 속 주인공이 된 그들은 현실 속의 ‘나’와 다른 또 다른 ‘나’였다. 먼저 만난 비영 씨도, 하이큐 배구팀의 소희 씨도, 그리고 수줍게 코스에게 다가서던 한 관람객도 만화 속에서 또 다른 나를 찾았고, 자신감을 얻었고, 행복해했다.


글 사진 박한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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