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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10호] 3.11의 기록
일본에 살다 보면 ‘지진’이라는 반갑지 않은 녀석과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아무리 건물의 내진 설계가 잘 되어 있고 지진 대비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다 해도 언제 어디서 마주하게 될지 모르는 지진은 시한폭탄 그 자체지요. 2009년, 제가 일본에 유학을 오고 나서 지진의 무서움을 처음으로 겪은 건 2011년 3월 11일이었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전철 안이었습니다. 갑자기 전철이 끼익하고 멈추더니 방송이 흘러나왔어요. ‘지진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사오니 잠시 운행을 중단합니다.’ 지진 때문에 전철이 멈추는 건 가끔 있던 일이기에 별거 아니겠지 하고 좌석에 앉아 전철이 출발할 때를 기다렸어요. 차장의 말대로 전철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흔들림의 강도가 점점 세지고, 곧 멈출 줄 알았던 것이 오랫동안 지속됐어요. 집으로 돌아가던 유치원생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시간이 흐르고, 흔들림이 멈춘 후에도 전철은 30분 이상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전철은 다음 역을 향해 출발했지만 바로 다음 역에서 운행을 중단했고, 목적지까지 전철을 탈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역 안에서 우왕좌왕했습니다. 저 역시 빈 택시를 구할 수 없어 기숙사까지 다섯 정거장이나 걸어가야 했습니다.
'전철 안에서 화장실 가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하고 농담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켜 보니 농담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강한 지진이 몰고 온 피해가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빨간 글씨로 한 귀퉁이에 ‘긴급 속보’라고 쓰여 있는 뉴스 화면이 마음을 불안하게 했습니다. 다급한 아나운서가 무너진 건물, 교통수단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들을 중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중계는 쓰나미였어요. 거대한 파도가 마을을 삼키자 아나운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아…!’ 하고 탄식할 뿐이었어요. 지진이 몰고 온 쓰나미의 피해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자연재해를 겪어 본 적이 없는 제게 그때 그 상황은 현실이 아니라 영화 속의 장면 같았어요.
사상자, 실종자들이 늘어나며 일본 전국의 분위기는 침울했습니다. 걸핏하면 여진 때문에 핸드폰에서 지진 주의 경보가 시끄럽게 울려댔고, 어딜 가든 지진에 대한 걱정거리가 대화의 주제였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며 일본은 더더욱 어수선해졌습니다. 이제 일본은 끝이라고 하는 비관적인 목소리가 세계 곳곳에서 들려왔고, 심지어 몇몇 유학생 친구들은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 짐을 쌌어요. 지진 자체의 힘도 무섭지만, 지진이 몰고 온 쓰나미와 원전 사고는 더더욱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철저히 대비 하더라도 자연의 힘에는 맥을 못 추는 인간. 3.11 동일본 대지진은 인간에게 무엇을 경고하려 했던 걸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쓰나미 피해가 심했던 동북지역에는 무너진 집의 파편을 정리하고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봉사 활등 지원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모여 봉사 활동을 가게 되었습니다. 뉴스에서 봤던 피해현장을 직접 목격하니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우리는 쓰나미에 엉망이 된 마을을 청소하는 일을 했습니다. 집, 가구, 집 안의 물건 등 여러 가지 조각들이 난무했습니다. 앨범 속에서 빠져나왔는지 사진도 진흙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사진 속 사람들은 과연 무사할까. 너무 마음을 담아 일하다간 눈물이 날 것 같아 묵묵히 작업하게 되는 이상한 봉사 활동이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 발생 후 5년이 지난 올해, 방심할 틈도 없이 구마모토에 강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마침 한국에 있을 때라 일본의 분위기는 직접 느끼지 못했지만, 동일본 대지진 때처럼 안타깝고 긴박했을 거예요. 일본에서 살아가는 인생을 선택한 이상, 앞으로 일어날 지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미리미리 공부하고 준비해야 해요. 지진을 예측하는 기술도 점점 발전하고 있고, 위험에 대비하는 방법도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지진이 오더라도 더는 두렵지 않을 만큼 발전하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