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110호] 고구마 백 개 물 없이 드실 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바뀔까
이 말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이제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는데 궁동 카페에서 한 친구의 인터뷰 명목으로 만나 대학생 넷이서 수다를 떨다가 인터뷰어도 인터뷰이도 나도 아닌, 나머지 한 명 입에서 나온 말이고,
마침 우리의 화제는 젠트리피케이션
땅값이 비싸지 않은 동네에 예술인들이나 개인 창업자들이 터를 잡고 모여 살게 되면, 그 거리의 ‘감성’에 반해 오가는 사람들이 늘고, 유동인구가 폭증하니, 건물주가 이때다 싶어 임대료를 올리면, 막상 그 거리의 ‘감성’을 만들어 낸 가게의 주인, 즉 세입자들이 훌쩍 뛴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결국 이건 뭐, ‘방 빼!’나 다름없어지는, 주인 양반 이게 웬 말도 안 되는 일이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모습이 전국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되다가, 얼마 전 살기 좋은 우리 대전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누군가 ‘건물주는 수익성을 추구할 자유가 있다.’라고 주장을 펴면
자유라는 말이 주는 긍정적인 뉘앙스 덕분에, 돈에 사람이 포획되고 마는 (세입자나 건물주나) 모습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유의 결과라고 생각해서 그 문제에 실제로 손댈 수 있는 분들이 ‘풀기 힘든’ 문제라고 인식하고 바깥에서는 그것을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라고 이름 붙이는데,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가 말하길, 그곳 사람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을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인식하는데, 법적으로 건물주 마음대로 임대료를 올릴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이고, 여기에 더해 독일이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고 느낀 건, 난민에게 학교 시설과 모든 강의를 개방했다는 거였는데, 그들이 난민을 단순히 자게 해 주고, 먹게 해 주고, 몇 번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립해 살 수 있게 근본적인 부분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어서,
우리나라라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이유는 요즘 우리를 둘러싼 문제들이(테러방지법이라거나 옥시라거나 어버이연합이라거나 비정규직 문제라거나) 충분히 실망스럽기 때문인데, 이날 우리가 가장 많이 한 말은 ‘화가 나.’였고 사회에 아직 발을 들이지 않은 한국 청년들이라면 정작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민보다 외부에서 마주치는 비인간적이고 몰상식한 일들에 기운이 빠졌거나, 적응해 버렸을 텐데,
박탈감을 느끼고
화가 난 젊은 애들이 ‘행동’해서 직접 바꾸지 않는 건, 사회에 대한 불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리가 총대를 메고 이렇게 저렇게 했을 때, 최소한의 안전마저 빼앗아 버릴 것 같은 데다가 선거 말고는 일상의 정치에 참여하는 방법을, 우리의 공교육에서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행동하는 교사들을 낙인찍고 억압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 왔다고, 그런 기억은 무섭다고,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고,
요즘 젊은 애들이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싸 놓은 형형색색의 똥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워야 할지 몰라 그 앞에서 답답해 하는 중이고, 지금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감정은 답이 없다, ‘노답’인데 이것으로도 부족해 ‘핵노답’이라고 강조해 표현하는 것인데, 우리는 당장에 취직이 어렵고 무엇을 가지지 못할까 봐 불안한 게 아니라, 사람 목숨보다 기업존립을 걱정하고, 대학교의 수술을 정부가 집도하며, 중고등학생들에게 진짜 정치를 가르치지 않으며 문화를 겉으로만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 요컨대 모두의 머릿속에 박힌 커다란 덩어리 하나가 아니라 혈관을 타고 온몸을 흐르는 돈과 자유라는, 사람과 사랑과 문화가 빠진 의식을 긍정하는 모습이 무서운 것인데,
고구마 백 개를 먹은 듯한 답답함으로 수다를 이어오다가, 그럼에도
우리 넷이 이 상황을 이상하게 느끼고 화를 내는 것이, 변태적이지만 기분 좋은 일이라고, ‘우리는 꿈을 꾸는 소녀들’은 아니지만 생각하려고 하니까,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려고 하는 애들이니까, 여기에 모두 쏟아내고 답을 찾으러 가는 것이다.
“진정한 창세기는 처음이 아니라 끝에 있다. 그것은 사회와 존재가 근본적이 될 때, 즉 자신들의 뿌리를 움켜쥘 때만 비로소 시작한다.”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