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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9호]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에게 묻고싶을 때
5월은 월간 토마토가 태어난 달, 올해 토마토는 아홉 살을 맞은 것을 기념해 ‘대전을 즐기는 아홉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공간을 중심으로 시간을 보내는 여러 방법이다. 여기서 ‘공간’은 대전을 소개하는 대표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생활에 좀 더 밀접하다. 월간 토마토 구성원들이 직접, 자신의 생활 반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흥미로운 코스를 하나둘씩 소개한다. 글을 싣는 순서는 의미 없다.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죽는다.
누구나 그렇다. 단순하지만 분명한 삶의 주기다.
침산동 뿌리공원에서 이사동 은진 송씨 묘역에
이르는 길을 걸었다. 그 길은 우리네 삶의 주기와
닮아 있었다. 생(生)과 사(死). 두 글자에 담긴
평범한 진리를 일러 주고 있었다.
뿌리공원에서 은진 송씨 묘역까지는 대략 8km다. 쉼 없이 걸으면 세 시간, 천천히 둘러보며 걸으면 다섯 시간가량 걸린다. 행정동 기준으로 보면 침산동에서 무수동, 구완동을 거쳐 이사동에 이르는 길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보문산 남서쪽 끝에서 보문산을 둘러 남동쪽 끝에 닿는 길이다. 유등천 줄기를 거슬러,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를 따라 이리저리 걷는다.
시작은 뿌리공원이다. 한국족보박물관, 성씨별 조형물, 십이지신상 등 뿌리를 주제로 한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만성교를 건너 뿌리공원에 들어선다. 분홍빛, 주황빛 화려한 철쭉이 반긴다. 나비와 벌이 자유로이 난다. 드넓은 잔디광장에 아이들이 뛰논다. 자전거 탄 이들이 광장을 둘러 달린다. 생동감이 넘친다. 생명이고 축복이다.
다시 걷는다. 뿌리공원 동쪽 끝으로 가면 다리가 나온다. 유등천을 건너는 방아미다리다.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교통광장이 나온다. 산서로와 이어진다. 산서로를 따라 걷는다. 인도가 따로 없으니 조심해야 한다. 한참 걸으면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 길로 간다. 무수동 무수천하마을이다.
무수천하마을은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무수천하(無愁天下)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하늘 아래 근심 없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그런 분위기가 느껴진다. 마을은 보문산 줄기인 운남산 자락에 기대어 있다. 맞은편엔 방장산이 우뚝 서 있다. 운남산과 방장산 사이로, 즉 마을 앞쪽으로 오대산에서 발원한 물줄기 구완천이 굽이친다. 산과 물이 넘실대는 배산임수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든 굶어 죽지 않는 명당 마을이라고 말한다. 여유가 흐른다. 풍요로움이 가득하다.
무수동에서 구완동까지는 약 2km다. 구완천을 거슬러 굽이굽이 걷는 구간이다. 천천히 걸으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제법 멀다. 근데 지루하진 않다. 산과 들과 물과 새와 나무가 벗해 준다.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내친김에 신발과 양말을 벗고 구완천에 발을 담가 본다. 물이 맑고 차다. 서늘한 기운이 몸에 퍼진다.
구완동은 보문산 줄기와 오도산에 둘러싸여 깊숙이 들어앉은 마을이다. 예부터 피난처로 알려졌을 만큼 주변 산세가 깊다. 마을 어르신에게 물으니 6·25 전쟁 때도 피해가 전혀 없었단다. 구완동의 완이 완전할 완(完)인데, 어르신에 따르면 “난리 통에도 모든 마을 주민이 완전하다.”고 해서 구완동이란다. 구완동에는 윗마을, 아랫마을 합쳐 스물일곱 가구가 산다. 깊다. 깊어서 조용하다. 도란도란. 마을 어르신과 나누는 이야기가 아랫마을까지 들릴 거 같다. 가만히, 모든 걸 멈춰본다. 정막이 흐른다. 상념이 사라진다.
마을 끝까지 가면 오른쪽으로 샛길이 나온다. 고개를 넘어 이사동으로 가는 임도다. 구완동과 이사동 간 교류가 거의 없다 보니 산길이 거칠다. 사실은 그래서 걷기 좋다. 사람 때가 묻어있지 않다. 나와 자연뿐이다. 30분가량 걸으면 이사동이다.
이사동은 오도산 줄기를 등진 동향 마을이다. 1499년 조선시대 문신 송요년이 이곳에 자신의 묫자리를 마련했다. 그때부터 은진 송씨 집성촌으로 이어져 왔다. 능선을 따라 분묘 1천여 기가 있다. 무려 5백 년 세월이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분묘가 있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죽음의 흔적들이다. 바라보고 있자니 웅장하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허망하다. 삶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여기서 끝이다.
삶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고요하다. 내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만 보인다. 살다 보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에게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런 때 걸어 봄 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