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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0호] 대중가요역사
1980년대 역사는 비록 불우했지만, 음악만큼은 어느 시대보다도 풍요로웠다. 조용필이라는 거대한 봉우리가 존재했고, 방계에서는 수많은 명장이 산맥을 이뤘다.
주류에서는 이용, 김수철, 전영록, 이선희가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했고, 언더그라운드로 통칭되는 동아기획의 아티스트들은 한국 창작자의 역사를 대표했다. 몰락을 맞았던 트로트는 주현미를 통해 부활했고, 마이클 잭슨에 영향 받은 댄스 음악은 주류로 안착했다. 민중 음악은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무엇보다 발라드는 한국 대중음악을 지배하는 주요 장르로 성장한다.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은 각기 다른 장르가 경쟁했지만, 배타하지 않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역사상 가장 다양한 장면을 담아냈다. 실제로 2008년 경향신문과 가슴네트워크가 공동 주관으로 발표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는 80년대 작품이 서른여섯 장으로 가장 많았다.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이 성장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공은 음악 소비 주체인 10대에게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한국 대중음악을 성장시킨 1등 공신이었다.
1982년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고, 중·고생의 두발과 교복자율화가 이루어졌다. 맞물려 시행된 본고사 폐지는 10대를 대학 입시 압박에서 이완시켰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준다. 자연스럽게 이들의 관심은 대중문화에 쏠렸고, 자신이 지지하는 스타를 구매하기 시작한다.
특히 1981년 미국에서 개국한 MTV는 이들이 대중문화의 주체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대로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시장이 변모한다. 당대 10대는 미국의 팝문화에 경도됐고, MTV 최고의 수혜자였던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는 음악 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국에서도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젊음의 행진〉, 〈영 11〉이 영미 뮤직비디오를 방송하면서 댄스음악의 길이 본격적으로 열린다.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댄스 음악의 길을 열었다면, 83년 히트한 나미의 「빙글 빙글」은 댄스 음악의 치기를 걷어낸다. 정점은 김완선이었다. 86년 데뷔한 김완선은 산울림의 김창훈, 신중현, 이장희, 손무현의 곡을 받으며 다른 댄스 가수들과 차별성을 보였고, 그녀의 아우라는 그전의 모든 걸 압도한다. 한국의 마이클 잭슨으로 불린 박남정 또한 현란한 춤으로 댄스 음악의 한 축을 담당했고, 일본 음악의 영향을 받은 소방차는 군무를 창시하며 아이돌의 기원을 이룩했다.
80년대를 통틀어 가장 빛났던 순간은 들국화를 비롯해 김현식, 시인과 촌장, 어떤날, 신촌 블루스 등으로 대표되는 언더그라운드였다. 이들은 TV가 아닌 공연장에서 대중을 만났고, 연예인보다는 음악가로의 삶을 영위했다. 이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동아기획이라는 든든한 기획사의 지원과 싱어송라이터라는 자가 능력 때문이었다. 이들 작가군 대개 예술성과 창작력을 고루 갖췄기 때문에 누구의 간섭도 허락하지 않았다. TV에 출연하지 않아도 이들의 음반은 시장에서 각광을 받았고, 공연장은 장사진을 이뤘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 작가들은 주류에 저항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창작에만 골몰했고, 능력에 비해 철학이 부재했다. 끝내는 김현식의 죽음과 서태지의 등장으로 전성기를 마감한다.
¹ 이용, 김수철, 전영록은 양대 방송사에서 조용필이 집권한 가수왕 연속 도전을 각각 82년, 84년, 86년 저지했고, 이선희는 폭발하는 가창력으로 팝발라드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분명 이들의 노래에는 한계가 있었다. 자의식이 부족했고, 연예인으로서의 풍모에만 집중했지만 적어도 80년대를 풍요롭게 만든 한축이었다.
60~7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트로트는 80년대 초반 급격히 몰락한다. 나훈아, 심수봉이 선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주현미의 출현은 그래서 의미심장했다. 84년 데뷔한 주현미는 그전의 트로트 어법과 차별성을 보이며 트로트 부활에 앞장선다. 그녀의 노래가 달랐던 건 애상을 벗어나 즐기는 음악으로 트로트를 변신시켰다는 점이다. 주현미가 박준규와 함께 발표한 고속도로용 앨범 『쌍쌍파티』는 100만 장이 팔리며 주현미를 각인시킨다. 주현미는 단조 중심의 트로트를 장조로 변화시켰고, 트로트의 이미지를 상쾌하고 발랄하게 만든다. 여기에 약사 출신이라는 출신 배경은 트로트의 천박한 이미지를 걷어내는 데 일조한다. 88년 주현미는 「신사동 그 사람」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MBC와 KBS 가수왕을 동시에 차지한다. 양대 방송사의 가수왕을 차지한 건 조용필 이후 주현미가 최초였다.
당시 트로트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권과 방송국의 힘이 컸다. 노태우 정권은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문화의 다양성과 한국 전통 가요 부활이라는 명분으로 트로트를 복권했고, 방송사는 인위적으로 트로트 가수에게 가수왕을 시상하며 의미부여 한다. 오랜 무명 시절을 겪었던 현철이 89년 KBS 가수왕을 수상하며 방송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사건은 단적인 예다.
소녀 팬층이 발라드를 사랑했다면 10대 소년들은 백두산, 시나위, 부활로 대표되는 강력한 사운드를 지지했다. 쌍팔년도 헤비메탈이라는 신조어와 각종 스쿨 밴드가 등장한 게 이때였다. 조용필까지도 잉베이 맘스틴의 「Far Beyond The Sun」을 표절할 정도였다. 80년대 헤비메탈은 녹음 기술 한계와 상업성이 부족해 컬트층의 음악으로 치부됐지만 이때의 메탈 키드는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작가와 음악 감독으로 성장한다. 서태지는 물론 김종서, 이승철, 강기영, 손무현, 임재범 등이 대표적이었다. 비록 주류에 입성하지는 못했지만 헤비메탈의 탄생은 80년대 다양성을 보여준 장면 중 하나였다.
1980년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또 다른 모습은 속칭 운동가요로 취급받는 민중 음악의 등장이었다. 이들 진영은 군사 정권에서 철저한 탄압을 받았지만, 대학가에서 전통을 이어가며 명맥을 유지했다. 민중 음악은 애초 노래보다는 메시지 전달에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노래를찾는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며 민중 음악 또한 주목을 받게 된다.
이들의 『1집』에 수록된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가 MBC 퀴즈 아카데미의 엔딩곡으로 삽입되며 이름이 알려졌고, 이어 발표한 『2집』은 밀리언셀러에 육박하는 기록을 세운다. 『2집』에 수록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사계」는 노래방에서 불릴 정도로 커다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노래를찾는사람들을 비롯해 민중 음악은 87년 민주화 테제의 수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들의 노래에는 메시지와 철학이 존재했지만, 음악성보다는 운동성을 지향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다만 노래를찾는사람들이 배출한 김광석과 안치환이 90년대 조동익과 조우하며 작가로 성장하는 모습은 눈여겨 봐야한다.
80년대 대중음악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장르는 발라드였다. 발라드의 문법은 조용필, 이선희, 이광조를 거쳐 이문세에 이르러 만개한다. 이문세는 한국 음반을 사도 돈이 아깝지 않다는 인식을 심은 최초의 가수였고, 당대 LP값을 올린 주범이었다. 발라드는 이문세를 거쳐 김종찬, 이승철 등이 영역을 확대했고, 변진섭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한다. 변진섭은 87년 MBC 신인가요제로 데뷔한 후, 1, 2집 모두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명실 공히 이문세의 뒤를 잇는 발라드의 강자로 등장한다. 특히 『2집』에 수록된 「희망 사항」의 히트는 당대 남녀노소 모두를 사로잡는 보편성을 발휘했고, 이장희 이후 사라졌던 구어체가 다시 등장하는 계기를 만든다. 다른 무엇보다 발라드는 팝송에 밀려 있던 한국 대중음악이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980년대는 다양한 음악이 폭넓고 깊이 있게 퍼진 시대였다. 80년대 작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90년대 대중음악이 이데올로기와 정치에서 벗어나 자신을 노래할 수 있었다. 90년대 들어 한국 대중음악은 일본 문화, 미국 문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드디어 자기 말을 시작한다.
² 바로크 메탈을 구사했던 잉베이 맘스틴의 위상은 조용필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표절할 정도로 대단했다. 조용필 『9집』에 수록된 「청춘 시대」는 잉베이 맘스틴의 「Far Beyond The Sun」의 표절곡으로 판명 났고, 이 사건은 조용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