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0호] 미술이야기

1. 오이디푸스와 안티 오이디푸스
  
  

프로이트는 모든 욕망의 근저에서 성욕을 찾아낸다. 다시 말해 “모든 욕망은 본질적으로 성욕이다”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욕망은 다시 어머니에 대한 욕망으로, 남근으로 귀착되는 욕망으로 환원한다. 이것은 다시 욕망의 억압을 요구하며 아버지의 법(질서, 문화, 문명 등)을 등장시킨다. 결국 쾌락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이드(Id)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초자아(Super-Ego)와 충돌하여 ‘현실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아(Ego)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인해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 없게 된 욕망은 이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드러낼 수 있는 것과 드러낼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다양한 표상(representation)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명제는 성욕과 무관한 예술가들의 창조적 욕망, 정치가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 종교인들의 욕망(희생의 감수) 등과 같은 다양한 욕망까지도 성욕이 승화된 것이고, 리비도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그 대상을 바꾸어버린 욕망으로 환원시킨다. 따라서 현실적인 것은 무의식이 숨겨진 채 드러나는 기표였고, 무의식적 욕망의 대체물이었으며, 무의식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이 경우 진정한 실재, 진정한 현실이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무의식이고, 반복하여 행하게 하는 숨겨진 ‘원인’이 된다. 말해진 것, 상상된 것을 통해 숨겨진 실재계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가의 일이다.

  

  

반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와 다른 방식으로 무의식을 정의한다. 욕망을 성욕화하는 것, 그것을 엄마-아빠-나의 오이디푸스적 가족삼각형 안에 가두는 것도, 그리고 무의식을 표상들의 산출할 뿐인 극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무의식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욕망을 성욕에서, 인격화되고 인간화된 욕망개념에서 구해내고자 한다. 욕망이란 ‘하고자 함’으로 성욕에 제한될 까닭이 없으며, 무언가를 새로운 방식으로 하고자 함, 놀고자 함, 사유하고자 함이다. 이것은 어떤 활동을 하기 위해 만나고 접속하는 신체에 속하는 것이며, 그 신체들을 접속하여 작동하게 만드는 요인이며, 그러한 작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무의식이란 우리의 신체를 통해 작동하는 우리 자신의 욕망이고, 그런 욕망에 의해 생산되는 기계와 실천들의 집합이며, 그런 것을 변이시키고 변환시키는 변혁의 장, 그 모든 것의 질료로서 그 모든 욕망이 자리잡고 작동하며 물러서고 전진하는 기관없는 신체를 뜻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비판을 통해 자본주의, 파시즘, 식민주의 등과 맺고 있는 공모관계를 폭로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인간 내면으로의 힘의 방향 전환, 바로 내면적 고통, 죄의식으로서 가책의 발생이다. 들뢰즈는 가책의 첫째가는 정의는 ‘힘의 내재화에 의한, 내부로의 힘의 투사에 의한 고통의 증대’라고 설명한다. 적극적 힘으로서의 욕망이 반응적 힘-죄의식으로 변질된다. 이것은 나의 성적 욕망은 사적인 인물들, 즉 아버지, 어머니를 통해 제한되지 않고 사회적 생산과 연결되어 있는데, 국가의 창설자들이 가져온 자본주의는 오이디푸스와 공모하여 가족에 대해 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욕망을 변질시켜 욕망의 가족화를 탄생시킨다. 결과적으로 욕망이 사회적, 경제적 형태의 창출에 참여하지 못하고 미리 할당되어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 장소, 자본주의가 마련해 준 한 <형상>을 채워주는 질료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데 가족화한, 혹은 사유화한 욕망은 어떻게 그렇게 순순히 자본주의의 하층 계급의 <형상>을 제 모습으로 받아들이는가? 가족이 사회 체제의 외부에 놓여 오이디푸스화하는 일은 가족 체제와 사회 체제가 들어맞게 되는 일과 함께 진행된다. 가족 체제와 사회 체제가 들어맞는 것은 자본주의의 항과 가족의 항이 일치한다는 것, 서로 대응하는 소우주와 대우주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정당화하고 조장하는 역할을 정신분석이 담당했으며, 아버지를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빗장을 부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 숙명이다. 그리하여 모든 억압을 부수어버릴 혁명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금지된 것을 넘어서려는 노력은 죄의식에 의해 감금당한다.  

  

  

2. 생산으로서의 욕망
  
  

생산으로서의 욕망이란 무엇인가? 생산이라는 말이 지닌 뜻풀이에 입각해 이 욕망을 결여(결핍)와는 전혀 상관없이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욕망은 ‘어떤 활동을 하기 위해 만나고 접속하는 신체에 속하는 것이고, 그 신체를 접속하여 작동하게 만드는 요인이며, 그러한 작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그것은 성욕도 아니고, 인간이나 생물의 욕망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신체가 접속하여 에너지나 힘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게 하는 생산력으로 설명한다.

  

  

들뢰즈에게 노마드의 몸은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고, 욕망은 생산하는 욕망이며, 생산하는 욕망은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을 흐르는 기계이다. 생산하는 욕망이란 욕망의 근원적 성질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관계에 의하여 형성되는 현실적 욕망의 모습은 항상 그 관계를 규정하는 사회구성체의 형식과 연관된다. 곧 현실적 욕망은 항상 사회적 욕망인 것이다. 들뢰즈는 동일적인 것, 그것에 종속된 개념적 차이, 모든 실체적인 것이 부서진 자리에서는 힘의 차이와 반복, 생성으로서의 존재, 일의성의 개념 등이 태어난다. 또한 오이디푸스 비판을 통해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의 모든 파시스트적 술책, 죄의식의 매커니즘이 폭로된다.

동양의 현자인 노자는 ‘욕’을 무욕과 유욕의 이중성으로 전개시켜 나간다. ‘욕’은 현대적 의미에서 ‘욕망(desire)’이다. 이것은 도의 보충대리와 같은 하나의 ‘짝패’ 또는 ‘새끼줄’로 이해할 수 있다. 노자는 도를 무위와 무불위, 무욕과 유욕의 양가성을 지닌 관계로 표현한다. 무위는 무욕으로, 무불위는 유욕으로 연결지을 수 있다. 도덕경 1장에서 “고상무욕(故常無欲), 이관기묘(以觀其妙); 상유욕(常有欲), 이관기요(以觀其憿): 그러므로 항상 무욕으로 그 미묘함을 바라보고, 항상 유욕으로 그 돌아감을 본다. 차양자(此兩者), 동출이이명(同出以異名), 동위지현(同謂之玄), 현지우현(玄之又玄), 중묘지문(衆妙之門): 이 둘은 같이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같이 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또 현묘해서 뭇 신묘함의 문이 된다.” 도는 유·무가 차이가 나도록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또한 날실과 씨실로 천을 짜나가는 직조의 법칙처럼 모든 것이 반복하여 돌고 도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판의 최종 심급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욕망 혹은 힘의 의지인 ‘목적도 없고 원인도 없는 욕망’을 이 사회에 풀어놓는 일이 철학의 소명인가? 니체는 “네가 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내가 무수히 계속 그것을 하기를 원하는가?’라고 자문하면서 이는 네게 가장 굳건한 무게 중심이 될 것이다”고 말한다. 비판의 최종 심급에서 욕망은 무엇인가를 욕망할 때마다 그 욕망하는 일이 무한히 반복되어도 좋은지 매 순간 물어나간다. 노자와 들뢰즈의 비판 철학의 최종심급에는 이러한 신중한 욕망, 미친 폭군들에게 시달린 세계사에 다시 반복되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 무엇인지를 고뇌하는 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참고문헌

이진경, 『노마디즘 I』, 휴머니스트, 2002

서동욱, 『들뢰즈의 철학』, 민음사, 2002

최명관 역,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1994

장시기, 『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 당대, 2005

클레어 콜브룩 / 한정헌 역, 『들뢰즈 이해하기』, 그린비, 2007.

한국도가철학회,『노자에서 데리다까지』, 예문서원, 2001

김형효,『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 청계, 1999

노자 / 왕필 주 / 임채우 역, 『왕필의 노자주』, 한길사, 2005


황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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